- 젊음은 영탄법으로 가고 과거는 과장법으로 남는다던가. 흘러온 길 탄식 없고 노닐던 풍류는 차림새부터가 다르다. 동래의 마지막 예기(藝妓) 유금선의 소리엔 아직 ‘조선의 향취’가 남아 있었다.
제1회 부산 학축제 공연을 위해 벚꽃 가득 핀 거리로 나선 윤금선씨.
신라시대 전설에 허심청은 병든 사슴들이 김 오르는 물에 몸을 적셔 병을 고쳤다는, 동래에서 제일 큰 온천이다.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고서에 이규보나 김종직 같은 당대의 문사들이 온천수의 풍취며 약효를 시로 적어 남겼을 만큼 계곡을 낀 아름다운 노천탕이었다. 고려 충선왕 때 지조 높기로 이름난 박효수는 “황홀하게 꿈속에서 무하유향(無何有鄕)을 노는 듯하다” 했던가. 지금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온천호텔이 ‘허심청’이란 이름을 달고 들어서 있다.
광복 전, 은빛 비늘 반짝이던 청춘들은 이곳에 술을 차고 모여들더랬다. 금정산을 베개 삼아 벚꽃 흩날리던 노천탕은 일제 강점기 때 인공호수로 변했고, 일대 한량들의 좋은 술자리가 되어주었다. 오늘, 예 놀던 춤 동무는 하나 없고 만개한 봄꽃들만 ‘세월은 모두 춘몽일 뿐’이라며 바람에 너풀거린다.
봄이라 반겨줄 임이 있을까. 그 바람에 밀려 분단장하고 나선 참은 아니건만 일흔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꼿꼿이 선 허리가 선(線)까지 곱다. 쓸데없는 나잇살은 애초 지니지 않고 살기로 작정이나 한 양 일생 지켜왔을 단출한 몸피에 얼비치는 과거. 동래의 마지막 예기(藝妓) 유금선(柳錦仙)이 오늘 소리 할 공연은 제1회 부산 학축제 중 하이라이트인 동래학춤의 구음이다.
“떼 부리는 아이 업고 구경들 오소”
이번 학축제는 지역의 문화·예술활동을 기업이 후원하는 메세나운동의 일환으로 호텔 농심·허심청과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기획하고 주최했다. 시간이 되자 허심청 앞마당에 들어서는 인파가 엄청나다. 협회 이성훈 사무국장은 동래에 이렇게 많은 구경꾼이 몰린 건 처음이라고 한다. 봄날 일요일, 날도 좋고 꽃도 좋으니 떼 부리는 아이 업고 잠이나 자려는 남편 깨워 구경이나 해보소∼, 청하지 않아도 온 이가 어림잡아 3000이상이다. 동래에서 한다하는 춤꾼들이 모두 나선 무대이니 드라마 재·삼탕해주는 일요일 오후 TV에 비할 바가 아니겠다.
지난해 10월 ‘전무후무(全舞珝舞)’ 공연을 기획해 강선영 김덕명 김수악 문장원 이매방 장금도라는 국보급 원로춤꾼들을 한자리에 모아 찬사를 받은 무용평론가 진옥섭이 ‘시나위에 맞춰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나온 한량이 꾸벅 인사하고 지팡이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차마 잊지 못할 춤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한 학춤의 주인공 문장원(文章垣) 옹의 춤과 유금선의 소리가 어우러지기를 기대했지만, 오늘은 동래학춤 군무(群舞)다. 올해 세수 90의 노 명무(名舞)는 축사로 춤을 대신했다.
뜨거운 피 펄떡이는 남자 춤꾼들이 야류(野遊)를 한마당 풀고 나야 학춤 차례가 온다. 그의 무대다. 동래야류는 탈춤이다. 고성 오광대춤이나 봉산탈춤 하회탈춤 같은 타 지역 탈춤보다 대사가 난해하고 연극적 요소가 많다. 예부터 이 지역은 정월 대보름이면 이렇게 신명을 풀어왔다. 동래야류로 시작한 길놀이가 끝나면 내로라하는 춤꾼들이 추는 학춤으로 대보름 밤은 언제나 더 밝았다.
그러나 오늘은 한낮, 학들이 등장한다. 오늘만은 운중백학(雲中白鶴)보다 화중백학(花中白鶴)이다. 흩날리는 벚꽃 아래 노니는 학들을 볼라치니 “덩-기덕쿵더러러러쿵-기덕쿵더러러러”, 따라 어깨 들썩여지니 굳이 천마리 다 접지 않아도 꿈이 절로 이루어질 성싶다. 학춤은 한 명이 출 수도 있지만 최하 다섯 명에서 300∼400명까지 출 수 있는 춤이다. 한 명이 출 때는 호흡과 흐름, 한 획의 느낌이 중요하지만 군무는 다르다. 수십마리의 학이 일제히 깃을 꺾거나 날개를 펴는 찰나의 유속에 관객들은 함께 빠져들고 즐거워한다.
학들의 시나위에 감기는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 북 소리. 네 악기가 내는 고르게 꽉 찬 장단은 매정하게 그의 소리를 막아보려 하지만 일순 엇박자로 흐름을 빗기며 곡을 이끄는 유씨의 구음에 뒤처질세라 잦아지는 학들의 발길, 그 걸음 맞춰 굿거리장단도 잦았다가 휘몰아친다.
서울행 KTX 막차가 밤 9시 30분에 떠나던가, 해가 기운다. 시간이 많지 않다. 허심청 인근의 호텔 그릴로 걸음을 재촉한다. 봄 오후를 설레게 한 춤꾼과 소리꾼을 만나기 위해서다. 몸이 부풀면 정신마저 넘칠세라 춤출 적마다 제 살을 덜어냈는지, 가뿐한 몸피마저 꼭 닮은 두 양반은 살아 있는 동래 역사다. 평생을 ‘춤 기운’에 취해 산 노 명무 문장원은 유금선의 구음이 받쳐주지 않으면 춤이 살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구음도 예악(藝樂)이라”
“소리는 이화중선이처럼 해야 소리제. 상성에 가서도 듣는 사람 귀에 좋은 소리라야 하는 기라. 요새 테레비에 소리한다고 나오는 아-들은 엔간하믄 다 떡목이라. 소싯적에는 이 사람 소리도 이화중선이 못지 않았제. 인자는 기침병 때문에 옛날만 못해도 아직도 청음인 기라.”
맑고 곱고 애원하는 듯한 소리를 ‘천구성’이라고 하는데, 소리 하는 이들은 이를 제일로 친다. 소리가 거칠고 탁하면 ‘떡목’이라 하고, 맑기만 하고 깊이 없는 소리는 ‘양성’이라 해서 격에 쳐주지 않는다. 노 명무는 유금선의 목을 두고 ‘천구성’을 얘기하지 싶다.
문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예능보유자이자 부산민속보존협회 이사장으로 동래의 민속예술 보존과 발전을 위해 일생 살았다 해도 넘침이 없을 인물이다. 그가 없었으면 동래가 꼽을 무형의 문화재들 곧 동래야류,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 동래고무(鼓舞), 이 네 종목의 전통예술은 복원이 어려웠을 것이다. 젊어 놀고 보아왔던 춤들을 선배동료들과 되살리는 데 일생을 내놓았다. 고무 복원은 유금선의 외사촌 석국향(釋菊香)의 고증이 한몫을 했다. 1993년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로 유씨를 적극 추천해 그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큰 힘을 쓴 이도 문 이사장이다.
흔히 ‘입타령’으로도 부르는 구음(口音)은 전통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국악의 한 분야다. 단순히 악기의 소리만 묘사하는 의성(擬聲) 영역에 그친다면 예(藝)라 할 수 없을 터. 글자 그대로 악기 대신 입으로 낸 소리로 가락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세계 여러 민족의 음악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음을 발견할 수 있으나 우리 구음이 유독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절절함에 있다. 감정이 흐드러진 민족이기에 가슴에 차고 넘어 더는 담아둘 수 없는 애별리고(愛別離苦)를 말로는 모자라 음으로 흥얼거려 달랬던 것이다.
악기만으로는 미진해 갈급한 2%의 그 무엇을 구음이 이끌어 관객을 젖어들게 만드는 애조. 그중에도 절절이 한 맺혀 숙고사 물겹저고리에 피 배어나는 듯한 살풀이는 또 어떠리. 살풀이마냥 듣는 이의 단장을 감아 잡는 맛은 아니더라도 학춤 구음에도 오직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사무침이 묻어 나온다.
구음은 악기들과 아우러지는 합주나 독자적인 소리연주 외에 교육 차원에서도 쓰인 지 오래다. 구음이라고는 하나 통용되는 법칙이 있어서 어떠한 선율이라도 적지 못하는 게 없다. 구음이 처음 악보로 등장한 것은 금합자보(琴合字譜)의 거문고보와 적보(笛譜)부터다. 이후 수많은 고 악보에 사용되어왔다. 이 점에 착안해 오늘날까지 기악교육이나 악보 기보의 방편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구음의 표현은 관악기와 타악기 현악기에 따라 다른데 관악기는 ‘나·누·루·러 같은 ㄴ·ㄹ 계열의 자음으로, 타악기는 ‘덩·떵·쿵·덕 된소리나 파열음 계통의 자음을, 현악기는 ‘당·동·징’ 등 ㄷ·ㅈ 계열의 자음을 사용하여 구음한다. 이들 자음은 음성학적으로 볼 때 악기가 내는 소리와 닮아 있다. 이렇게 구음을 읽는 방법과 규칙을 구음법이라 하고 문자로 기록한 기보법을 육보(肉譜)라고 한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은 고려시대부터 구음이 전해왔음을 기록하고 있을 만큼 예악(藝樂)으로서의 역사도 깊다.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다독이다가도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애잔하게 가슴을 문지른다 싶다가도 처절함에 등이 휘게 하고, 더운 피 도는 인간의 육성이다가 이내 신비스러운 피안의 소리가 되는 음악…. 사람의 소리는 소리이되 언어적 구체성을 완전히 배제한 기묘한 음색의 발성이 듣는 이를 최면 같은 몽환으로 잡아끄는 음악, 그것이 바로 구음이다.
소리는 불행과 함께 오다
유금선의 기침은 오래 묵은 병이다. 서너 살 적 앓은 홍역의 뒤끝이다. 호적에도 2년 늦게 올릴 만큼 약한 몸이었을까. 그녀의 말마따나 “토깐이 괴기라도 고아 멕였으면” 탈이 없었으련만 계집애라 그 치레도 없었다. 젊어 힘 성할 때는 기침도 동무할 만했다. 천식은 소리로 먹고사는 그녀의 인생 후반부를 진저리치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가슴 설레기보다 날리는 꽃가루에 병원 갈 일이 더 태산 같다.
호적 탓에 1931년생이 된 그가 태어난 곳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권번(券番)이 있던 집이었다. 학소대(鶴巢臺) 고분으로 유명한 복천동에서 나고 첫 소리를 배웠다. 지금이야 복천동 하면 가야시대 무덤을 떠올리지만 그가 날 때는 그저 산이요 구릉이었다. 고분이 발견된 것은 1969년이다. 광복과 전쟁을 거친 남부여대(男負女戴) 인생들이 살 비비며 살기에 적당한 산이었기에 판잣집들이 빼곡했던 언덕으로 기억한다. 헌집들 사이로 새 집 짓겠다고 터잡다가 나타난 천년 무덤, 동래시장을 지나 동래여고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옆 경사로 모퉁이를 돌면 돌연 나타나는, 그 옛날 뛰놀던 그 동산이 가야시대 무덤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개발되기 이전의 복천동은 맑은 샘으로 더 잘 알려진 동네였다. 새미는 경상도 말로 샘이다. 복새미를 뜻하는 동네이름도 그렇거니와 옛무덤 곁자락에 있던 동래여고의 상징도 옥천, 그러니까 옥새미로 불렀던 게 어린 날 그의 기억이다. 밥 지으며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다 밥 태워 욕 먹기 일쑤였던 때가 열한두 살 무렵이다.
춤이면 춤, 창(唱)이면 창, 못하는 것 없이 두루 갖춘 미색으로 유명했던 고모(유항앵)는 영남 일대에서 소문난 명기(名妓)였다. 자라면서 본 건 인력거에 화려한 옷, 뽀얀 분 화장이었고 들리는 건 오직 소리였다. 어린 그에겐 너무 예쁜 ‘독’들이었다. 소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 대신 자신을 맞던 동기(童妓)들의 소리가락…. 담 너머 들려오던 아릿한 타령조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래서 같이 불렀다. 봄나물 캐면서도 불렀고 오빠 생각 날 적에도 부르고 또 불렀다. 산천으로 헤매며 부른 가락, 그래도 내 소리는 그 아이들보다 월등 낫다고 생각했다.
1 20대 초반 무렵의 유금선(왼쪽)씨. 옆은 같은 동래 권번 출신이자 절친한친구이던 김강남월이다.<br>2 1960년대 초반 부산 남포동에서 ‘금정 화식’이란 일식집을 하고 있을 때 찍은 사진.<br>3 1997년 일본 후쿠오카 축제 초청공연 전야제 사진. 왼편은 함께 공연한 장구 명인 신태영씨.
세상을 ‘소리’로 살겠다고 그때부터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부모가 세상 뜬 후 어리보기로 삼사년을 살았다. 소학교 5학년이던 해, 눈만 뜨면 소리가락으로 입성을 찾는 아이를 지켜보던 고모는 그녀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동래보다 물 넓은 서울로 터를 옮기면서 당대의 명창 박녹주의 집으로 금선을 보냈다. 경북 선산이 고향인 박녹주의 집은 전국에서 소리를 배우러 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댔다.
고모 유항앵과 아는 사이였기에 받아 준 얼굴 까만 열네 살 촌 계집아이가 소리에 재질이 있다는 걸 박 명창이 알았는지 모르겠다. 돈은 없고 배움은 갈급한 그저 그렇고 그런 군식구를 늘 한둘은 끼고 있던 집, 금선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말이 소리공부지 소리보다 일을 더 많이 했다. 터서 갈라진 손등을 보면 엄마얼굴이 있었다. 서울하늘은, 손등이었다.
“춤은 경상도”라 했건만
“한 1년이나 있었나, 노래는 좋아도 내사 마 일을 마이(많이) 시키서 못 있겠대. 그래 내려와가꼬 외사촌 언니하고 죽 살았제. 그 언니가 낼로(나를) 키우고 권번에도 넣었다 아이가.”
외사촌 언니란 앞서 말한 동래고무 복원의 산 증인 석국향이다. 국향도 기적(妓籍)에 몸담았던 여성이다. 때깔 좋은 한복 차려입고 목청껏 소리를 뽑던 아이들을 담 너머 바라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언니가 권번에 자신을 데려가던 날 금선의 여린 잔등은 바짝 날 서 있었다.
권번에서는 그토록 하고 싶어 마냥 몸 달아하던 소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춤은 기본이고 악기에 묵화, 한자공부와 교양까지 두루 배웠는데 창(唱)과 춤은 수업료를 내야 배울 수 있는 과목이었다. 소리를 가르쳐준 첫 선생은 박씨라는 성과 얼굴이 약간 얽었다는 인상만 남아 있다. 그후 전남 능주 출신의 명창 박기채 선생에게 본격적인 소리 수업을 받는다.
전 국민이 상영관과 비디오, 나중에는 공중파를 통해 본 바 있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가르쳐줬듯 판소리는 서편제와 동편제로 나뉜다. 서편제는 다시 이날치 계열 서편소리와 강산제 서편소리인 보성소리로 갈라지는데, 박기채는 당시 보성소리의 유일한 계승자 송계 정응민이 아끼던 제자였으나 요절했다.
한양의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천리를 가면 나오는 동래(東萊). 이 천릿길은 의주로와 더불어 조선 땅의 등뼈가 되었던 제4로 영남로다. 기나긴 길 중간에서 맞는 아뜩한 백두대간 조령(鳥嶺, 문경새재). 그래서 조선은 사람이든 호랑이든 숨차지 않게 넘으라고 고개를 뚫고 조령 이남의 땅을 영남이라 했다던가. 영남은 춤이 흔하고 좋아 예부터 “소리는 전라도요, 춤은 경상도라”했건만 진본 서편제 선생을 사사한 유금선의 목은 동편제, 서편제, 경기소리, 그 어느 쪽도 막힘이 없다.
“선생은 흥부가를 제일 잘 불렀어, ‘한평천지’하고…. 한평천지는 ‘광주 담양을 바라보며~’하고 시작하는데 아매도 집이 그리웠던갑대. 우리한테 지가 배우고 은 대로 배워야 한다 카믄서도 까탈시러거등. 노랑목(떨림 있는 얄팍한 소리)하고 발발성(떨림이 심한 소리)하고 코로 내는 비성은 질색인기라.”
머리가 좋아야 소리도 잘하는 법이다. 같이 소리 공부하던 동기가 한 30명 있었는데 선생은 금선에게 수업을 맡기고 출타하기 예사였다. 그만큼 그의 소리가 좋았고 기억력도 뛰어났다.
열넷부터 3년간 권번을 졸업할 때까지 악생(音樂先生)을 여러분 모셨다. 소리는 최장술·강창범, 춤은 최소학 선생에게 배웠다. 강태홍 선생은 가야금을 가르쳤지만 돈을 내야 했으므로 일찍 접었다. 부모 없는 가난한 동기에겐 그 몇 전도 부담이 됐다. 이중 강창범 선생은 만능 엔터테이너로 춤, 소리, 악기 못하는 게 없어 이 방면의 과목은 때로 선생 혼자 가르치기도 했다.
‘채 맞은 생짜’란 말이 있다. 제대로 수업받고 공식경로를 밟아 명부에 오른 기생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기생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에는 용모와 기예보다 회초리로 맞으며 엄하게 배운 권번시절의 추억이 더 큰 자리를 잡고 있게 마련이다. 행수기생(行首妓生)이 내리던 매질에 붉게 물들던 어린 종아리들을 어찌 잊을 텐가. 그래서 한다하는 기생들은 너나없이 출신과 선생을 따졌다.
유금선도 ‘채 맞은 생짜’다. 한데 우등만 하던 그는 맞은 적이 없었다. 졸업시험 성적도 일등급이었다. 그동안 배운 소리와 악기, 교양을 다 시험을 쳤는데 악기는 기본으로 장구, 꽹가리는 할 줄 알아야 했다. 사실 그의 소리는 진즉에 동래 인근에 소문이 나 졸업도 하기 전 땋은 머리 늘인 채로 주연(酒宴)에 나간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채 맞고’ 졸업한 동기들은 화초머리를 얹어야 권번에 나서게 된다. 그도 권번에 자신의 명패를 거는 날이 왔다. 그의 이름은 명패 앞줄에 걸려 있다.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柳·錦·仙. ‘봄날 버드나무 아래 신선들이 노닐 여열(餘熱)한 비단치마’, 그게 아니라면 ‘봄날 버드나무 아래 비단 베고 누우니 신선이 부럽지 않더라’일까. 어린 그를 홀로 두고 먼 길 떠난 부모가 이런 운명으로 살라고 알고 지어준 이름이던가. 누가 화초머리를 얹어주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열일곱 살이었다.
“동래기생 치마폭엔 묻히고 만다”
권번은 본디 우리말이 아니다. 1910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관기(官妓)제도가 철폐되자 매인 데가 사라진 동래기생들이 생존을 위해 ‘동래기생조합’을 만들었고 이태 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만 바꾸었다가 1920년에 다시 ‘동래권번(券番)’으로 이름을 고치게 됐다. 그 배경에는 일본이 있다. 전국에 산재했던 기생이나 창기조합의 명칭을 모두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게 해 10년 새 세 번이나 개명한 것이다. ‘권번’이란 교방(敎坊, 조선시대 관청에 딸려 있던 기생양성소)의 일본식 발음이다.
잘 알다시피 동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아 1960~70년대에 웨딩마치를 울린 대다수 부부들의 추억이 잠긴 곳. 거슬러 일제 강점기에는 유독 온천을 좋아하는 일인들에 의해 개발돼 함경도의 백천온천, 황해도의 신천온천과 더불어 3대 온천장으로 꼽히던 땅이었다. 이북에 있는 두 지역은 모습이 어찌 변했는지 알 수 없으나 동래는 어귀만 들어서도 모든 간판이 자신이 곧 ‘온천’임을 몸으로 알려준다. 골목골목마다 ‘온천’이란 글자를 상호에 얹은 간판이 즐비한 것이다.
복천동 ‘새미’들이 그러하듯 동래의 역사로 흘러온 온천천이 수영강으로 모여들고 수영강은 다시 바다로 이어진다. 물 인심 후한 지역은 사람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일본과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도 그렇지만 일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탈을 노골화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유곽을 세운 곳이 부산이요 온천장이었던 것도 그런 방증이다.
일본인들이 동래에 세운 것은 ‘오키야권번(置屋券番)’이었다. 게이샤들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번창하는 온천장 손님들을 끌어모으고 조직적으로 성매매까지 하며 동래기생의 생업을 넘보았다. 일본인들이 벌인 공창(公娼)제도는 묵과할 일이 아니었다. 동래권번은 더욱 철저히 가무음곡(歌舞音曲)의 기예만 보여주었다. 예기로서의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음으로써 일제에 대항한 것이다. 동래기생의 그런 기질은 다 그 뜨거운 물과 땅에서 오지 않았을까. 일제 강점기 조상님 호적을 남에게 내어주느니 싸그리 불질렀던 영모단이나 동래장터 만세운동, 동래고보 동맹휴학이 그랬듯 동래는 굽히기를 거부하는 부산 기질의 본산이다.
“평양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기생 치마폭에는 묻히고 만다”는 옛 말마따나 전국 한량들이 알아주던 동래기생들도 시대의 변화는 묻을 수 없었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김동년(金東年) 박난전(朴蘭田) 변비봉(邊飛峰) 같은 동래기생의 우두머리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동래기생조합(東萊妓生組合, 이후 권번)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강요된 왜색 아래서도 우리 전통 가무와 음률의 맥을 보듬고 지켜냈다.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년, 유금선
권번에서 요정으로, 요정에서 나루토(鳴戶旅館)나 아라이(荒井旅館)로 중심점이 기울던 시대의 행간에 유금선이 있었다. 권번 앞줄에 언제나 붙어 있던 명패는 그의 인기를 말해주었다. 그 시절 영업부장들은 회사보다 권번에 출근하는 날이 더 많았다. 앞줄에 붙은 명패의 주인들을 먼저 모셔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부르는 자리가 많은 기생일수록 몸값도 비쌌다.
동래라는 지명이 생긴 이래 이때만큼 호황이었던 적은 없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여관이요, 요정이었다. 게이샤보다는 예기(藝技)의 수준이 장인을 능가하는 동래기생을 찾는 일인들도 많았다. “왜놈 순사 앞에서는 서 있어도 동래기생 앞에서는 무릎 꿇고 만다”고도 했다. 수요보다 공급이 모자랐다.
당시 온천장을 주름잡던 4인방이 있었다. 동무로 서로 아끼던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년 그리고 유금선이다. 4명이 조를 짜서 움직이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찾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함께 앉았다가 틈을 봐 한 명이 옆 요정으로 가면 잠시 후 또 한 명이 다른 여관으로 갔다 돌아오는, 하룻밤 2~3번의 술청은 그들을 금방 부자로 만들었다. 봄이면 ‘불상추놀이(남자들의 야외 계모임)’, 가을이면 ‘단풍놀이’로 낮을 보내고 밤이면 요정을 뛰는 ‘주연(酒宴) 속 청춘’들이었다.
기생 한 명이 받는 행하(行下)는 한 시간에 1원50전이지만 이들을 부르기 위해 한다하는 한량들은 물 쓰듯 돈을 썼다. 선(先) 화대로 최하 100시간에서 300시간을 불러야 4인방을 부를 수 있었다. 요릿집에서 받는 큰상 값이 5원에서 10원 안짝이었다. ‘방귀깨나 뀌는’ 한량이 아니고는 용색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잘나가는 4인방이었던 것. 한산모시 숙고사 항라… 옷장을 열면, 같은 옷 두 번 입고 나설 수 없어 한 철에 갈아입을 한복이 열댓 벌 준비돼 있던 화려한 시절이었다.
영남은 춤이 흔하고 좋아 예부터 “소리는 전라도요, 춤은 경상도라” 했건만 진본 서편제 선생을 사사한 유금선의 목은 동편제, 서편제, 경기소리, 그 어느 쪽도 막힘이 없다.
그렇게 불나방처럼 깃 비비던 열아홉살, 청춘의 정점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키가 훌쩍 큰, 일본서 설계를 공부하고 온 부잣집 청년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를 만난 것도 봄날이었다. 친구들 소개였다. 첫눈에, 가슴이 불에 덴 것만 같았다. 무슨 말에 무슨 인사를 했는지 꽃을 보았는지 그를 보았는지 화르륵, 제 몸이 곧 타버릴 잉걸인 성싶었다. 그 사람이 진짜 금선의 머리를 얹어준 이고 자신이 죽던 날까지 그녀를 놓지 않았던 이다.
권번이 있던 명륜동에서 온천장까지 2km 거리를 화려한 기생들을 태우고 달리던 인력거가 사라지고 전화기가 그 부재를 메울 몇 년이 흐른 사이, 광복이 됐고 그가 청혼을 했다. 아홉 살 연상이던 그는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꽃 같은 내 사랑을 지키자니 자신의 가정이 걸림돌이었고, “천지빽가리(엄청 많은 수효)로 컴컴한 사나(사내)들” 곁에 두고 보자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스물다섯살에 식을 올렸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혼례였다.
첫눈에 불에 덴 것 같던 사랑
그에게 시집간 날로 기방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첩’으로 붙잡아놓은 금선에게 미안한 마음을 몸으로 보여주려 작정했던지, 살면서 그가 낱낱이 보여주었던 애정행각은 기억의 갈피마다 접혀 있다.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 일본 출장이 잦았고 집을 비우는 만큼 금선의 선물은 늘어갔다. 고가의 패물은 세관의 눈을 피하려 했음인지 전대처럼 허리에 둘러차고 왔다. 옷을 사올 적에는 모자에 구두 핸드백, 스타킹까지 일습을 빼놓지 않았더랬다.
어느 날인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물건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브래지어였다. “내 크기를 어찌 알아서?” 물었더니 와코 백화점 점원에게 “요만하다”고 두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임신이 안 돼 후사가 없는 그를 위해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요크셔테리어 한 쌍을 일본에서 사들고 온 일도 있다. 전쟁 후라 물자가 귀했다. 키우라고 거저 줘도 “사람 먹을 양식도 없는 판에 개는 무슨” 손사래 치기 십상인, 그 시절의 개 사육은 오로지 식용이 목적이었다.
“강아지를 알라(아이)로 생각했제. 부산에는 수의사가 없어서 그 아가 아프모 서울까지 병 고치러 데꼬(데리고) 댕다. 그 작(때)에는 쥔 양반이 돈을 겁나게 벌어서 수유리 대지극장 옆에도 집이 세 채나 있었다 아이가.”
‘닭살스러운’ 행각은 오래 갔다. 사랑이 깊음도 병이라. 질투로 골이 진 적도 많았다. 신명이 많아 소리로 신을 풀고 살아야 사는 것 같았던 그녀였기에 권번 쪽과 아예 끊고 살려고 하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소리가 너무나 하고팠다. 혼자 놀기 적적한 서른도 청춘…, ‘옛 친구 그립소’ 노랠 삼자 명창 장판개의 아들 장영찬을 독선생으로 불러주었다. 장영찬은 그 아버지를 닮아 춘향가 중 사랑가와 심청전을 유달리 잘 뽑는, 호남형의 명창이었다. 6개월 남짓이었을 게다. 젊은 명창과 아내의 만남이 불안해서 수업은 그 길로 끝이 났다.
남편의 권유로 부산 광복동에서 ‘수평다방’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찻집도 해보았다. 겉으로는 금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지만 소리청일랑 영영 잊어버리라는 속내였다. 그래서 서둘러 주선하는 것도 남편이었고 종당에는 못하게 하는 이도 언제나 남편이었다. 설계를 전공한 사람이라 인테리어며 전기배선이며 인근에서 제일 모던한 업장으로 꾸며놓고서는 1년 만에 가게를 다른 사람 손에 넘겨야 했다.
‘가요무대’에서 만났을 유금선
금선이 노래자랑을 나간 게 화근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전국노래자랑 같은 경연이 임시수도 시절에도 있었는데 대회에서 그녀는 2등을 차지했다. 1등으로 뽑힌 원방현은 선발되자마자 곧바로 음반을 취입해 가수의 길을 걸었다. 1956년 유행했던 ‘꽃 중의 꽃’이 그의 히트곡이다. 가요계로 나간 원방현은 2등에 머문 유금선의 실력이 너무 아깝다며 아베크 음반을 한번 녹음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한다. ‘꿈에 본 내고향’ ‘경상도 아가씨’ 등의 노래로 후에 인기가수가 된 박재홍을 소개받고, 음반사에서 오디션도 보았다. 동성애 듀엣까지 나오는 요즘에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남녀가 함께 음반을 취입하는 일은 파격이었다. 한국 최초의 남녀듀엣 음반이 될 뻔했던 곡 취입은 녹음 직전 무산되었다. 역시 남편의 반대가 이유였다.
소리로 ‘견성(見性)’한 그의 목은 경계가 없다. 소리는 ‘밥’이었고 일상이었으므로 고상한 영역 지키기에 힘쓸 예술이 아닌 바에야 그 옛날 박기채 선생이 일러준 대로 부르고 싶은 모든 것을 불렀다.
유금선씨는 구음 후계자 양성을 위해 금정산 금강공원에 있는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매월 둘째, 네째주에 전수교육을 하고 있다.
“내하고 사는 동안은 본댁에는 제삿날만 들어가제. 그쪽 생각하면 나도 참 못할 짓 마이 했지 머. 본댁에는 2남3녀 두는데 다 너무 잘산다 아이가. 늘그막에 나도 그 아-들한테 혹시 피해가 가모 안된께내 이런 것(인터뷰)도 참 조심스럽네.”
남편의 이름을 묻자 송씨라고 성만 가까스로 말해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많던 재산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1963년에 ‘금정화식’이라고 남포동에서 제일 큰 일식집을 열었다가, 부도난 친구의 어음 700만원을 남편이 안게 되고 그 뒷막음으로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기울다가 마지막엔 대주까지 업어가는 불행이었다.
금정산에 한번 올라보시라
남은 건 빚이었다. 마흔한 살, 다시 판으로 나섰다. 눈 밑 주름에 세월을 얹기 시작한 얼굴, 주름은 가려도 슬픔은 덮지 못할 화장을 하고 다시 돌아온 자리. 그 날, 그 자리에 그가 있을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자리였다. 젊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더 열렬했던 사랑이었고 금선이 제 가슴을 태우게 한 사랑한테로 가버렸음에 여백으로 끝난 사랑이었다. “와 나왔노.” 요정에 붙은 명패를 보고 설마 ‘그녀인가’ 불렀다고 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옛날 그 앞에서 붉어졌던 뺨은 붉은 등 아래서도 왜 그리 파리했을까. 다 꿈이었다. 꿈속에 사랑이란 이름한테 놀러갔더란다. 허망한 놀음이라, 잠 깨자 사라진 물거품처럼 손에 쥐었던 사랑은 가뭇없고 상처 입은 가슴만 서로 마주 보던 자리였다. 아무 말도 없이. 그날 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에 울었다. 소리가 아니라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눈물 속에 불렀다.
그 사람은 당시 부산지역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큰 회사와 공장을 가진 재력가였다. 막 2차산업이 자리잡던 1970년대 초에 대량화 시설을 도입해 생필품을 생산했다. 그의 공장제품은 그 분야에서 부산뿐 아니라 전국 점유율 1위였다. 그는 이후 금선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선 지 1년 만에 가게를 열 정도로 돈을 모았다. 온천장에 ‘오미정’이란 상호로 다시 요릿집을 열었다. ‘운은 일생에 한번 온다는 말이 맞다’고 윤금선은 믿고 있다. 명창이라는 주인의 이력도 그렇거니와 음식맛도 소문이 나 단골이 많았다. 밥 파는 재미가 쏠쏠할 무렵 ‘복국 사건’이 났다. 그의 집에서 복요리를 먹은 일행 중 한 명이 사망한 것. 이 일로 그녀는 초상비와 유족위자료를 포함해 그간 모은 돈을 다 날렸다. 7000만원이라는 거금이었다.
빈손으로 다시 일어서야 했다.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사회기강을 이유로 요정이란 업종은 허가조차 내주지 않아 동래세무서 뒤에 ‘삼화식당’이란 이름으로 재개업을 했다. 그럭저럭, 사랑 없이도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화투로 손 털고 일어서니 코앞에 버티고 선 나이 60.
“돈은 참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 카이. 내가 원 없이 벌고 원 없이 써본 사람인께, 무서븐 거는 병인기라, 병보다 더 무서븐 거는 바로 늙은 내(나)를 내가 보는 기라.”
사람은 기다려주지 않는데 시간은 너무 빨랐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했다 나온 지 며칠 되지 않는다는 그의 손끝에 에쎄 담배가 한 개비 들려 있다. 마지막 남은 ‘동래기생’이면서 이날 이때껏 술 한잔 입에 대어본 일 없는 그에게 담배는 ‘웬수’ 같은 평생친구였다. 이 친구가 어느 날 불시에 ‘소리’를 뺏어가는 날, 하늘이 정해놓은 자신의 역할도 끝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그는 쭉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매월 둘째, 넷째 주가 전수교육이 있는 날인데 교육을 받는 회원은 현재 200여 명이다. 소리하는 이에게 천역(天疫) 같을 병을 동반자로 알고 사는 그는 이즈음 구음 전승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그가 바라는 선까지 치고 올라와주는 제자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절반도 못 전하면 어떡하나, 답답한 마음 재우려 다시 담배를 든다.
서산인 금정산에 해가 기운다. 하얀 대공을 붉게 불들이며 주름진 얼굴로 향해오는 불꽃, 남은 한 토막에 동래의 마지막 시간이 감겨 있다. 화사한 청춘에 박히던 두 줄기 인력거바퀴 자국, 그 아픔이 새긴 골에서 흐르던 소리. 기나긴 세월을 감아둔 소리, 한세상 너울거린 춤을 부르는 소리였다. 아침이면 세상은 다시 봄을 맞고 꽃잎은 그 봄이 짧다고 후드득 지리라. 그 봄 지나 또 올 봄에 천마리 학이 비단처럼 노닐 ‘소리’, 유금선의 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