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종교적 결벽, 정치적 갈등이 빚은 역사의 오욕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5-02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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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기잡는 곳’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도시 세일럼. 바다와 햇살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세일럼이 낳은 대 문호 호손은 선조의 만행에 대한 원죄의식을 ‘일곱 박공의 집’ ‘주홍글자’ 등의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쏟아냈다. 세일럼 기행은 집단 히스테리에 희생된 원혼의 흔적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세일럼 마녀박물관.

    뉴잉글랜드의 7월 햇살은 화사하기만 했다. 그러나 세일럼(Salem)을 찾아 나선 나에게 성하의 짙푸른 노변 정경은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옛 로마인들은 어느 장소든 그곳을 지켜주는 ‘장소의 정령(Genius loci)’이 있다고 믿었다. 근본적으로 직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땅에서 이 장소의 정령이 나그네에게 말을 걸어옴직한 만곡부가 있다면 세일럼이 바로 그런 곳이리라.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일럼은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 그 어두운 역사의 상흔이 밴 곳이다.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억의 저편에서 잠들기를 거부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억울하게 죽은 세일럼의 희생자들은 반복되는 이 집단적 히스테리에 필시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3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떠도는 원혼이 있다면 나 같은 이방의 길손에게라도 어찌 하소연하고 싶지 않겠는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가 ‘옛이야기’를 비롯한 초기의 단편들과 ‘주홍글자’를 쓴 곳이 이곳 세일럼이요, 유명한 ‘일곱 박공의 집’의 무대 또한 세일럼이다.

    세일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구당 유길준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883년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유길준은 귀국을 미루고 혼자 남아 세일럼 인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덤머 아카데미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이런 연유로 그가 남긴 편지를 비롯한 유품들이 이곳 세일럼의 피바디 엑세스 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세일럼,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보스턴 교외를 벗어나 지방도로 107번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차창을 스치는 바람이 거세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이다. 해안이 가까워지면서 노변의 나무들도 키 작은 관목으로 바뀐다. 이곳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캐이프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중 한 사람인 로저 코낸트(Roger Conant)가 1626년 약 50명의 식민자를 거느리고 이곳 아늑한 항만에 이주하면서 세일럼의 역사는 시작된다.

    세일럼의 원래 명칭은 ‘나움케악(Naumkeag)’. 원주민 인디언 말로 ‘고기 잡는 곳(fishing place)’이라는 뜻이다. 이어 1628년 존 엔디콧(John Endecott)이 이끄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선발대가 도착했다. 엔디콧은 식민지 본진이 정착할 터를 닦으면서 이곳이 평화의 땅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명을 세일럼으로 바꿨다.

    1630년 6월12일, 존 윈스롭이 주축이 된 식민지 본진이 당도했으나 인근을 둘러본 윈스롭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길 포기했다. 남쪽 해안을 계속 답사해 내려간 윈스롭 일행은 찰스 강어귀를 주목하다가 그곳 또한 식수가 충분치 못함을 알고서 최종적으로 강 건너 반도 쪽을 정주지로 정하고, 링컨셔에 있는 그들의 고향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이라 명명했다.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면서 항구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35년 세일럼 교회의 목사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서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됐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했다.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세일럼의 첫 이주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한 절연할 것과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했다. 윌리엄스는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고,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의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의 추방 요구를 수용했다.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의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시작이다.

    댄버스의 광풍(狂風)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조지 폭스(George Fox·1624∼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를 요구하고,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했는데,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해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런 반역의 역사적 체험이 철없는 몇몇 소녀의 일탈적 행동을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비화시킨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첫 목적지로 삼은 세일럼의 마녀박물관은 세일럼 콤몬의 맞은편, 호손의 이름을 딴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 얼굴이 길쭉한 형상의 고색창연한 청동상이 눈길을 끈다. 마녀사냥에 연루된 인물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뜻밖에 세일럼의 창설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이다. 1913년에 그를 기리는 협회가 헨리 킷선 (Henry A. Kitson)에게 제작을 의뢰해 봉헌한 것이다. 마녀사냥의 진앙지라는 세일럼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각가 킷선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아무튼 코낸트의 동상은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미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표를 산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곧장 기념품 가게다. 가게는 온갖 종류의 마녀 형상과 마술 도구로 가득 차 있다. 그 치욕의 역사가 이제 세일럼의 가장 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해 돈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활용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논리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가게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서니 마녀와 마녀사냥의 역사적 변천사가 벽면을 채웠다. 이어지는 중앙의 큰 홀에서는 마녀사냥의 촉발에서 재판에 이른 과정을 입체화해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되고 있었다.

    세일럼 마녀사냥의 발원지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세일럼이 아니고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댄버스다. 1692년에 댄버스는 ‘세일럼 빌리지’라고 불렸는데, 1637년경에 세일럼 사람들이 더 넓은 땅을 찾아 이주해 세운 곳이다.

    도시 주변에 새로이 형성된 정착지는 자치권을 얻어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해가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하지만 세일럼은 오랫동안 세일럼 빌리지에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역으로 번성하던 세일럼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세일럼 빌리지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689년 세일럼 빌리지의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져, 숙원이던 독자적 교회를 세우고 교구 목사를 새로 초빙할 수 있게 되면서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으나, 초빙돼온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사탄 사주 받은 마녀를 찾아라!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작품 ‘마녀 심문’ (T.H. Matteson, 1853;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세일럼 빌리지의 담임목사 패리스의 집에서 시작됐다.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질렀다.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했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하게 했다.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한다.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바베이도스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세일럼으로부터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됐다.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했다.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됐다.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갔다.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다.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였다.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됐다.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됐고,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프록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됐다.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 빌리지를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윈스롭의 일기에 따르면 이미 1647년에 마녀재판이 열린 적이 있고, 그 이듬해에는 마가렛 존즈라는 여자가 마녀로 처형됐다. 1662년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집단적인 마녀소동이 일어나 13명이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5명 중 4명이 혐의가 인정돼 처형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1647년에서 1663년까지 뉴잉글랜드에서 모두 79명이 마녀 혐의로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33명 중 15명이 처형됐다. 17세기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마녀재판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영국 쪽으로 돌리면 희생자는 더욱 엄청나다. 청교도 혁명 전야인 1645년에서 1647년 사이의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백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주지하듯 마녀재판은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500년부터 종교적 관용이 정착되기 시작한 1660년까지 유럽에서 대략 5만~8만명이 마녀재판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어닥친 피바람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시작된 것은 6월 초순이다. 당시 뉴잉글랜드에는 총독의 부재 탓에 합법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행부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지도층은 1688년 명예혁명과 더불어 제임스 2세가 임명한 에드먼드 앤드로스 총독을 몰아낸 후 일종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해 식민지 행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본국의 정권이 안정된 1692년 5월 중순, 윌리엄과 메리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하고 심리에 착수하도록 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이었다.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이틀 뒤인 6월10일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고,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됐다.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하고 말았다.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기념해 댄버스에 세운 희생자 추모비(1992).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면서 재판관직을 사임했다.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의 경우는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됐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했다.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이 속개됐으나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났다. 5월에 이르러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했다.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했다.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과 댄버스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세일럼 제1교회 또한 1992년 9월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명이 나왔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이다.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보았다.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린다.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된다.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는 이와 다른 진단을 한다.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하다.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해 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됐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다. 그러기에 아서 밀러는 이를 소재로 한 연극 ‘시련’에서 존 프록터로 하여금 “복수가 곧 법이 되었다”고 부르짖게 했다.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호손 문학의 산실인 세일럼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 동상과 호손이 3년간 징세관으로 근무했던 세일럼의 세관.

    한편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한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 신분별, 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하면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하고 독신이고 행실이 불량하고 자식이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해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마녀재판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박물관을 나서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다. 이방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 끔찍한 악몽에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부지 소녀의 말 한마디에 졸지에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막다른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심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압살당하는 길을 택했겠는가.

    무거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화사한 호손 가로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호손의 고향답게 처처에 호손의 흔적이 배어 있다. 호손 호텔과 너새니얼 식당도 있다. 조금 더 걸으니 모자를 손에 든 커다란 호손의 동상이 앞을 가로막는다. 동상 앞에는 누군가가 바친 꽃다발이 놓여 있다. 나는 문득 호손이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쓴 것을 기억해냈다. 이를 상투적 수사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이다.

    칼슨의 지적대로 마녀사냥이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른바 서구 근대성의 한 음화일진대, 서구 근대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유길준 선생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서유견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보스턴이 미국 정신문화의 중심지라는 것과, 이곳 출신 아이들이 언행이 분명하고 학식이 많아서 어디에 내놓더라도 행동과 말씨로 곧장 그 출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언급이 보일 뿐이다.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서 왼쪽 더비 가로로 들어섰다. 이내 바다로 길게 뻗은 더비 부두가 보이고, 이어 세일럼 항의 파란 물결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와 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을 펼쳤다.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이름 높았다.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1812년 영국과 벌인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인근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호손이 ‘주홍글자’의 첫 장인 ‘세관’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인근 지역에서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한산한 항구로 몰락해버렸다. 1938년, 한때 뉴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이던 세일럼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세일럼 항구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고, 그 결과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는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현실과 상상 어우러진 거장의 고향

    호손은 1804년 7월4일, 세일럼 유니언 가 27번지에서 태어났다. 네 살 나던 해, 선장이던 아버지가 남미의 수리남에서 황열병으로 사망한 후 두 누이와 함께 외가에 의지해 성장했다. 그를 평생 따라다닌 가난, 고독, 뿌리뽑힌 실향민 의식은 이렇듯 불우한 환경의 소산일 것이다. 열두 살 때 메인 주 레이먼드에 있는 외가 소유의 시골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후 호손은 부른스빅의 보든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다시 고향 세일럼으로 돌아왔다.

    그후 1842년 결혼해 콩코드로 이주할 때까지 호손은 허버트 가 12번지의 외가 골방에 칩거하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독서와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역사와 그 일부를 이루는 가문의 과거사를 깊이 탐구하고, 폭력과 죄로 얼룩진 그 부끄러운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썼다.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호손의 동명 소설로 유명해진 일곱 박공의 집.

    세일럼은 실로 두 가지 의미에서 호손 문학의 산실이다. 그 굴곡의 역사가 그의 소설의 주 소재라는 점과, 그런 ‘흐릿한 소재’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의 터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이 두 세일럼, 곧 그가 살던 19세기의 세일럼과 17세기 청교도 시대의 세일럼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주홍글자’의 머리글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한다면,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어우러진 세계인 것이다.

    세일럼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먼저 세관 건물을 찾았다. ‘주홍글자’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세관 건물과 날개 편 독수리상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세일럼 하면 늘 이 대목을 떠올리곤 했더랬다. 책을 통해 친숙해진, 주황색 벽돌로 된 세관 건물이 이내 눈에 띄었다. 3층 건물은 고즈넉하면서도 옛 영화를 상기시키기에 족한 당당한 모습으로 항구를 내려다보며 해안가에 서 있다. 정부기관을 표상하는 날개 편 독수리상도, 줄무늬를 세로로 늘어뜨린 공화국의 국기도, 현관의 주랑도, 화강암 돌계단도 ‘주홍글자’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호손은 세일럼 세관에서 1846년부터 1849년까지 3년간 수입세 징세관으로 일했다. 결혼 전인 1839년 1년여 동안 보스턴 세관에서 검사관으로 일한 뒤 두 번째로 맡은 공직이었다. 1837년에 작품집 ‘옛이야기’를, 1841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뉴잉글랜드 역사 이야기 ‘할아버지의 의자’를, 1846년에는 ‘목사관의 이끼’를 출간하고,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글을 기고했지만, 인세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고정 수입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마다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사이 첫딸 우나와 아들 줄리안이 태어나 식구도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세관 일은 무미건조한 것이고 더러 시간이 나더라도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아 호손은 내심 초조했다. 그는 감수성이 무뎌지고, ‘상상력의 거울이 흐려지고’, 얼마 되지 않는 재능마저 ‘에테르처럼’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애증의 세일럼

    그를 구해준 것은 정권교체였다. 1848년 선거에서 휘그당 출신의 재커리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 계열이던 그는 ‘목이 잘렸다.’ 호손은 정치세계의 비정함을 원망하면서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찾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세관에서 실직한 뒤 두 달도 안 돼, 그의 심리적 지주였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호손은 이중의 상실감에서 ‘주홍글자’ 집필에 매달렸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탈고했다.

    결코 속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대단한 속도였다. 게다가 첫 장편이었다. ‘주홍글자’의 강렬함은 이처럼 작가로서의 위기감, 상실감, 소외감,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1850년 3월, ‘주홍글자’의 출판과 더불어 그는 세일럼을 떴고, 그 후로 몇 차례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호손의 이력을 헤아려보는 사이 내 발걸음은 어느새 세관을 뒤로하고 몇 블록 떨어진 ‘일곱 박공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세일럼, 터너 가 54번지. 호손의 동명 작품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래서 더 한층 검은빛을 띤 채, 마치 웅크린 동물처럼, 소로의 한 블록을 점령하고 서 있었다. 집 옆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거대한 느릅나무는 소설에서 핀천 느릅나무로 명명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이 느릅나무와 사면으로 튀어나온 가파른 박공(?퉌·합각머리나 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入’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또는 벽)이 하늘을 시원스레 분할하고 있지 않았다면 집은 더 음침한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물론 나의 이런 인상은 탐욕으로 인해 저주받은 한 가문의 몰락과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소설의 내용에 의해 굴절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소설의 모델이 된 실제의 집이 이런 내력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원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터너-잉거솔 가라고도 하는 이 집은 카리브해 무역으로 갑부가 된 존 터너가 1668년에 지은 것이다. 3대째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 터너 가문은 이 집을 호손과 인척 관계인 잉거솔 가에 팔았다. 사촌인 수전 잉거솔을 찾아 이 집을 자주 방문한 호손은 집의 독특한 외관에 영감을 받아 이를 때마침 자신이 구상하던 소설의 제명으로 삼은 것이다. 호손 당시에 이 집의 박공은 4~5개만 남아 있었던 듯한데, 집주인으로부터 원래 박공이 일곱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곱 박공의 집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8년 집의 소유권은 다시 캐롤라인 에머튼에게 넘어갔는데, 에머튼은 집을 매입한 뒤 곧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전문가에게 의뢰해 소설에 묘사된 대로 일곱 박공의 집으로 복원했다. 삶이 예술을 모방한 것이다. 일곱 박공의 집은 17세기 목조 주택으로서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문학적으로는 물론 건축학적 의미가 큰 건물이기도 하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꽃이 화사하게 핀 정원으로 인도된다. 정원이 바다에 면해 있어 세일럼의 내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중충한 집의 외관과는 판이하게 화사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 좀 의외라는 느낌이 든다. 정원 쪽에서 집을 바라보면 거리에 면한 입구 쪽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박공이 사면으로 돌출해 있어 집은 방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정경을 연출해낸다. 따라서 집의 전모를 한눈에 보기 어렵다. 전체상을 허용하지 않는 집의 이 다면성! 호손이 왜 이 집에 끌렸는지 이해된다. 이런 독특한 외관이 다원성의 미학을 추구한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리라. 아닌게아니라 주변 건물의 대다수는 장방형의 이른바 ‘연방 스타일(Federal style)’이다. 오직 이 일곱 박공의 집만 사면으로 뻗은 입체적 양식이다.

    ‘원죄’ 반성하는 ‘일곱 박공의 집’

    ‘일곱 박공의 집’은 퇴락해가는 집에 얽힌 삶의 영고성쇠의 이야기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주홍글자’의 연장선상에 있다. 호손은 ‘주홍글자’에 이어 다시 한 번 고문서지기를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케케묵은 옛 문서를 뒤적여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문화의 고고학으로서의 소설 쓰기. ‘옛이야기’에서 ‘일곱 박공의 집’에 이르는 호손의 문학적 여정은 이렇게 요약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소설은 일곱 박공의 집을 지은 핀천 가의 5대에 걸친 변전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집은 가족 혹은 가문의 표상이다. 다시 말해 ‘일곱 박공의 집’은 박경리의 ‘토지’처럼 집을 통해 가문의 내력을 더듬는 가족사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친근한 모티프를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고 있는 점에 이 소설의 특이함이 있다.

    세일럼에 마녀사냥이 한창일 무렵, 마을 외진 곳에서 가난하게 사는 매튜 몰의 오두막 집 터를 오랫동안 탐내왔던 지방 유지 핀천 대령은, 몰을 마귀로 몰아 그를 처형하는 데 앞장선다. 몰은 처형당하면서 핀천 대령을 향해 하나님의 징벌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한다. 핀천 대령은 몰의 집터에 일곱 박공의 집을 짓고 집의 완공을 축하하는 모임을 연 날 저녁, 하객들을 기다리다가 뇌출혈로 급사한다. 그후로 핀천가의 후손들은 점점 쇠락해 급기야 5대째에 이르러서는 구멍가게를 내야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몰락한다. 소설의 이런 줄거리만으로도 호손이 조상의 원죄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천가의 몰락은 신앙을 명분으로 사사로운 탐욕을 채운 죄업의 결과다. 죄업이라고 했지만 징벌이 억울하게 죽은 몰의 후손들에 의해서 직접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원죄를 초래한 탐욕과 오만이 대대로 세습되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결과다. 물론 몰의 후손들은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기회가 주어지면 은밀하게 복수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핀천의 후손들 자신이다. 마녀사냥은 따라서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 일곱 박공의 집이 마녀사냥의 원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뉴잉글랜드 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춤추는 녹색 놀이터

    집의 내부는 안내를 받아서만 구경할 수 있다. 집안은 집 주인이 동방 무역을 하면서 수집한 귀한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인은 관광객의 관심을 미로처럼 복잡한 집의 구조로 돌리는 데 더 열중이다. 그는 방과 방 사이를 잇는 비밀의 계단을 보여주면서 호손이 소설에서 이를 활용하지 않았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는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호손의 문학세계를 가로지르는 어둠의 미로는 고딕적 상상력의 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내인의 설명은 일곱 박공의 집 내부에 이어 원래의 장소에서 바로 옆자리에 옮겨다 놓은 호손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났다. 일곱 박공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진홍색으로 채색된 호손의 생가는 무성하게 늘어진 나뭇가지에 감싸여 있었다.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자연은 인간이 만드는 어둠의 역사와 상관없이 늘 스스로 충만한 것인가. 정원에 핀 색색의 장미도, 푸르른 잔디도, 느릅나무 잎새도 7월의 햇살 아래 참으로 눈부셨다. 150년 전, 근엄한 청교도의 후손인 소설가의 눈에도 자연의 향연은 마찬가지로 찬란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퇴락해가는 집에 딸린 이 정원을 “반짝이는 빛이 춤추는 녹색의 놀이터”로 찬탄하는 화려한 수사가 이 어두운 소설의 언어 속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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