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시절 손학규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덩치 큰 친구들과 종종 싸웠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는 “나이 많은 아이들이 뒤늦게 학교에 다니며 횡포를 부리곤 했는데, 학규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그들과 자주 싸움을 벌였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끝까지 싸웠다”고 기억했다.
그는 모범생이지만 샌님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다가 연극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밴드부 선배들에게 흠씬 얻어맞고 나서야 연극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기고 동창인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는 “학규는 모범생이면서 놀기도 잘해 동창들 사이에서 늘 리더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손학규를 ‘잘 노는 모범생’이라고 부른다. 고교 후배인 탤런트 한진희는 ‘손학규가 샌님이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학규 형이 샌님처럼 보이긴 하죠. 그런데 절대 아니거든요. 평소 성격도 호탕하고, 악수를 해보면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아플 지경이에요. 연극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대단하죠.”
고교 2학년 때 손학규는 한 달에 한 번 북악산에 올랐다. 손학규는 그 시절의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손에는 소주 한 병이 들려 있고 주머니에는 ‘라면땅’ 한 봉지가 들어 있다. 고지식한 눈으로 본다면 꼭 탈선한 불량학생이다. 북악산 중턱에 올라가면 숭례문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울이 다 보였다.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소주를 천천히 한 잔씩 들이켠다. ‘이게 바로 내 세상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가슴은 한껏 부풀어 있고 마음은 엄숙하다. 열일곱 살 소년의 눈은 부릅떠 있고 얼굴은 한참 긴장했다.”
내향적 직관형은 독립심이 강해 확고한 신념과 뚜렷한 원리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손학규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줬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던 그가 1993년 초 경기도 광명 보궐선거 출마 결심을 밝히자 학교측과 동료 교수들은 혹시 낙선할지도 모르니 휴직계를 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손학규는 ‘정치 입문을 결심한 이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마지막 수업시간에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지켜봐달라”는 말로 섭섭해하는 제자들을 위로했다.
199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 자신의 지역구이던 광명시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광명시의 현역 국회의원은 여당의 총재권한대행이던 조세형이었다. 지역구에 호남 출신 유권자 비율이 40%에 달하고, 충청도 출신까지 합산하면 70%였다.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참모들은 이번 선거에서마저 낙선할 경우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다며 광명시 출마를 말렸다. 대신 전국구 공천을 신청하거나 일산 등 한나라당 후보에게 유리한 지역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