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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 서영호 / 일러스트·박진영

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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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 갚는 데 10년?

이 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조급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자신을 발견하곤 흠칫 놀란다. 사무실에 출근해 통화하는 전화의 대부분이 상대방에게 돈 갚으라는 독촉전화이기 때문에 마음은 늘 공격과 방어 자세를 취하느라 긴장되어 있다.

지난해 가장 인상 깊은 채무자는 P부인이다. 50세를 갓 넘긴 그는 나의 독촉전화에 한번도 싫은 기색 없이 온순하게 응대하며 미안해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늘 탁하게 잠겨 있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지치고 힘든 표정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무슨 질병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체가 불편한 사람이 아닐까 상상도 해보았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23세 된 딸의 이름을 빌려 신용금고에서 200만원을 대출받았다. 그러나 이자를 갚지 못하자 신용정보사로 채권이 넘어왔고, 원리금의 합계가 500만원을 넘어섰다. 이 액수는 P부인에게 일생을 가도 만져보기 힘든 거액이다. 다른 채무자라면 변제를 거절하고 ‘법대로 하라’고 하면서 추심원을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달 5만원을 꼬박꼬박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날짜에 송금하면서도 액수가 적어 미안하다고 부끄러워한다. 무슨 일을 해서 5만원을 입금하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어쩌다가 날짜를 건너뛰는 것을 보면 생계유지 자체가 힘든 것 같다. 5만원씩 500만원을 다 갚으려면 10년 가까이 걸리겠지만 남의 돈은 꼭 갚겠다는 정신이 앞서 있기 때문에 언젠가 빚을 다 갚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추심원에게 이런 채무자는 사실 달갑지 않다. 5만원이 회수되면 추심원에게 떨어지는 돈은 고작 5000원이다. 이 때문에 추심원은 되도록 고액의 채권회수에 매달린다. 올해는 P부인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겨 몸도 건강해지고 돈도 많이 벌기를 기원한다.

▼ 2005년 1월 ○일

채무자 장씨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동안 몇 번 전화로만 상담하다가 오늘은 꼭 나를 만나겠다고 해서 그를 기다렸다. 장씨는 처음에 나의 채무변제 독촉을 받고 변제 여력이 없다고 하면서 채무변제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채무에 연대보증을 서준 그의 장인이 내가 보낸 최고장을 받고 노발대발하면서 사위에게 찾아가 당장 해결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실로 찾아와 대책을 상의하기로 했다.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수인사가 끝나자 대뜸 섭섭하다며 항의했다.

“제발 장인은 건드리지 마시오!”

“장인에게는 독촉하지 않기로 해놓고는 왜 독촉장을 보냈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습니까? 장 사장께서 확실한 대책을 주기 전까지 최고장은 계속 발송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습니다. 오늘 이후로 장인에게는 최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렇다면 확실한 대책을 내놓으십시오. 난들 장 사장의 장인을 괴롭히고 싶겠습니까.”

내가 강하게 나가자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있다가 채무자가 된 사연과 그동안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했다.

그는 3000만원이 넘는 빚을 졌다. 그도 외환위기를 맞아 사업체가 부도나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로 나왔다. 사업이 잘될 때 여기저기 연대보증을 서준 처가식구도 함께 재산을 처분당해 집안은 몰락했다. 그의 장인은 그때부터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장인은 장씨의 아내인 딸마저 보기 싫다며 자신의 집 출입을 금지했다.

이런 와중에 최고장을 받은 그의 장인은 술이 만취한 상태에서 흉기를 들고 사위가 살고 있는 단칸방으로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 사실 장씨는 외환위기 후 대부분의 채권자가 빚 받는 것을 포기해 더 이상 채무로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내가 보낸 최고장은 그에게 날벼락이었다.

그는 사업체가 쓰러진 후 절망적인 삶을 살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함께 열심히 일했으며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도 학교가 끝나면 포장마차로 달려와 부모를 도울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상당수의 채무자가 이혼 등으로 가정이 파탄난 경우가 많았지만 그의 가족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쳤다.

연대보증을 선 장씨의 본가와 처가가 동시에 재산을 날렸고, 그 결과 장씨는 양가의 부모뿐 아니라 형제들에게조차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특히 그의 처남은 집안의 몰락이 분별 없는 매형 때문이라고 원망하면서 노골적으로 장씨를 핍박했다.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그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한숨 돌리던 차에 나를 만난 것이다. 장씨의 채권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추심원으로서 그와 연대보증인 그의 장인에게 최고장을 발송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이 연대보증만 서지 않았다면 ‘맘대로 하라’며 배짱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그는 장인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이도저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추심원인 내가 그의 장인에게 최고장을 발송하지 않고 추심행위를 중지한다면 사태는 잠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채권추심을 수임한 처지에서는 아무리 변제능력이 없다고 해도 채무변제 독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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