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대입 시장’ 뺨치는 신림동 고시학원가

연 20억 버는 족집게 강사… 현직 변호사도 줄줄이 ‘과외교사’로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6-11-08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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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시 준비생 대다수가 ‘과외 세대’…“학원은 선택 아닌 필수”
    • ‘스터디 매니저’ 포함 5∼10명 팀 이룬 ‘귀족과외’
    • 법대 교수 강의, ‘수험 적합성’에서 전문강사에 완패
    • ‘합격 못 시키는 강사’ 찍히면 바로 퇴출
    • 독서실에서 볼펜 소리 내면 ‘경고장’…살벌해진 수험 분위기
    ‘대입 시장’ 뺨치는 신림동 고시학원가
    ‘고시 특구’로 불리는 서울 관악구 신림9동의 시계는 고시 준비생을 중심으로 돈다. 아니, 과거에는 그랬다. 요즘 고시촌 24시는 학원 강의시간을 축으로 숨가쁘게 돌아간다. 야행성 체질의 고시생들로 새벽까지 떠들썩하던 고시촌 풍경은 자취를 감췄다. 요즘은 밤 12시만 되면 거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빽빽한 강의를 좇아가려면 일상의 모든 활동을 강의 일정에 맞출 수밖에 없다.

    특유의 문화가 또 있다. 이곳은 입소문과 정보전, ‘보이지 않는 룰’이라는 독특한 생존방식에 지배된다. 학원과 강사 선택에서부터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모든 생활 기반에 대한 정보가 유통되고 입소문을 통해 퍼지면서 업소와 학원, 강사의 흥망을 좌우한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5년차 고시생으로 2차 시험 발표를 기다리는 추모(31)씨는 “서점도 경쟁력이 있으면 커지고, 그렇지 못하면 폐업하거나 인터넷으로 터전을 옮겨야 한다. 경쟁력은 주인에 달렸다. 친절한지, 책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 초보 고시생에게 책 내용에 대해 코치해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작정하고 서점들을 순례하며 주인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고시생도 있다. 잘못 걸려들면 금방 소문나서 발길이 끊긴다. 식권이나 강의 테이프도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매물로 나온다”고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그 어느 곳보다 경쟁이 치열해진 곳은 학원가다. 학원 대 학원, 강사 대 강사가 피 튀기는 생존경쟁을 벌여 승자만이 살아남는다. 한국사이버대 법학과 교수이자 신림동 학원에서 13년째 형법 강사로 활동 중인 신호진씨는 “2만명에 가까운 고시생은 줄지 않았는데 학원 수는 크게 줄면서 학원과 강사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됐다. 이곳엔 2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1등과 꼴찌가 존재할 뿐이다. 100점짜리 강사와 99점짜리 강사가 있다면 수강생은 모두 100점짜리 강사에게 몰린다”며 살벌한 분위기를 전했다.

    학원 관계자에 따르면 1995년 이후 해마다 사시 합격자가 수백명씩 늘면서 이른바 ‘독학 장수생’이 많이 빠져나가고 대신 그 자리를 20대 젊은 고시생이 메웠다. 학원마다 이들을 잡기 위한 경쟁이 불붙었다. 고시촌에 진출한 20대는 유아기 때부터 대학 입시까지 각종 과외에 길든 세대다. 따라서 고시공부도 학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훌륭한 강사와 커리큘럼을 한눈에 알아보는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과거와 다른 까다로운 수강생을 맞으면서 학원들은 경쟁적으로 프로그램을 과학화하고 수험 적성에 맞춘 강의 중심으로 시스템을 재정비했고, 그 결과 더욱 많은 고시생을 끌어들였다.

    부익부 빈익빈

    몇 년 전만 해도 6개에 달하던 신림동 고시촌 사시학원은 현재 2개만 남았다. 신림로를 사이에 둔 신림2동의 ‘베리타스’와 신림9동의 ‘한림법학원’이다. 신림9동의 또 다른 한국법학원은 올해 초 베리타스에 통합됐다. 대형 학원이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으면서 학원간 인기강사 스카우트 바람은 잠잠해졌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강사 스카우트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당시 고시생이던 C씨는 “헌법·형법·민법 세 가지 기본과목은 보통 과목당 한두 달씩 강의를 듣는다. 수강생은 각 과목 인기강사에 따라 학원을 옮겨다니는데, 세 군데 학원만 남게 되자 서로 수강생을 뺏기지 않으려고 난리였다. 모 학원은 과목마다 개강날짜를 다른 학원과 어긋나게 만들어 수강생들이 다른 학원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했다. 수강기간이 맞지 않으니까 별수 없이 같은 학원에서 계속 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부 인기강사들이 학원측에 반발하면서 타 학원으로 무더기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인기강사는 수백, 수천명의 수강생을 몰고 다니기 때문에 학원간 강사 스카우트 전쟁이 도를 넘어 소송으로 번질 때도 있다. 학원은 강사를 상대로 1년에서 5년까지 계약을 맺는데, 이때 드는 스카우트비는 강사의 인기도에 따라 몇백만원에서 1억원대에 이른다.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른 학원으로 스카우트 되어 옮겨가면 소송이 벌어지는데, 위약금 등 소송에 따른 모든 비용은 강사를 영입한 학원측에서 부담하는 게 관행이라고 한다.

    강사 스카우트 전쟁이 가장 극심했던 것은 4년 전 사법연수생의 학원 강의가 금지되면서 법대 교수와 더불어 학원가에 포진했던 연수원생들이 빠져나간 직후였다. 이 시기 소수에 불과하던 학원 강의 전문강사의 몸값이 치솟으면서 스카우트 전쟁이 본격화했다. 영세 학원들이 차례로 문을 닫게 된 것도 스카우트비를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다. 2004년에는 로스쿨 도입이 결정되면서 사법시험 폐지를 앞두고 미래가 불투명한 중소규모 학원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고시촌의 변화와 함께 사법연수생이 빠져나간 자리는 전문강사로 채워졌고 이들의 등장과 함께 현직 교수들의 강의도 퇴조했다. 전직 인기강사 S씨의 설명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유명 법대 교수가 학원에서 특강을 하면 수강생이 수천명씩 몰렸다. 그런데 전문강사 시대가 되면서 강의에만 온 힘을 쏟는 전문강사들이 시험에 맞는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등 수험 적합성에서 앞서갔다. 사법시험은 법학자를 뽑는 게 아니라 법조인을 배출하는 것 아닌가. 요즘은 교수가 학문적 강의를 통해 법학자를 길러내는 시스템과 고시 강의를 통해 법조인을 길러내는 시스템이 완전히 분화됐다. 사법시험 내용도 법조 실무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해갔다.”

    ‘대강사’와 ‘소강사’

    학원가에서 유명 대학교수나 외국 대학 법학박사 출신, 사시 통과 명함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하던 시대는 갔다. 대신 얼마나 사법시험에 적합하게 가르치느냐, 예상문제를 족집게처럼 집어내느냐는, 오로지 실전 능력을 따진다. 과거에 잘나가던 교수의 강의가 수강생 20명을 못 채워 폐강된 사례도 있다. 인기강사의 경우 기본과목 강의에 400~500명이 몰리고 특강이 있으면 수천명씩 몰린다. 학원 수익을 올리는 데 강사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기본 강의료 외에 비공식적 보수를 따로 챙겨준다.

    학원 관계자에 따르면 양대 학원에서 사법시험에만 대략 50명의 강사가 있다. 이중 인기강사는 15명 정도. 학원가에서는 보통 기본강의 수강생 100명을 기준으로 ‘대강사’와 ‘소강사’로 분류한다. 대강사는 연 수입이 1억원 이상이다. 반면 소강사는 수강생이 100명 이하로 대기업 직장인 수준의 연소득을 올린다. 소강사 중에는 “학원까지 택시비를 대기도 빠듯한 수준”의 수입을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 극소수지만 대강사 가운데는 연 2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대강사 중에서도 특A급에 속한다. A급 대강사는 연수익 3억~4억원으로 10명 안쪽이다.

    사시 강사 보수체계는 철저한 능력제다. 인기도에 따라 강사와 학원이 수강료 수익을 보통 5대 5로 나눈다. ‘걸어다니는 기업’으로 불리는 특A급 강사는 6대 4로 강사의 수익 비율이 높다. 학원 근처 대형 서점 주인은 “강사 세계도 약육강식이다. 특A급 강사는 학원장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일반 강사의 경우 교재선택권이 학원에 있지만 특A급 강사는 교재선택권을 쥐고 있다. 학원 처지에선 강사가 수강생을 몰아주기 때문에 실적에 따른 보너스를 약속하며 붙잡아둘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강사 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수강료. 기본과목 강의는 과목당 10회 강의를 기준으로 수강료가 월 10만~18만원이다. 회당 수강생이 100명만 돼도 학원과 5대 5로 나눌 경우 500만~900만원의 수입이 강사에게 돌아간다. 연간 수십회에서 100회에 달하는 기본강의 수강생 400~500명의 수강료, 1000~3000명이 몰리는 수차례의 특강 수입까지 포함하면 수강료 수익은 수직 상승한다.

    ‘대입 시장’ 뺨치는 신림동 고시학원가

    신림동 고시학원가. 마치 대학입시처럼, 학원 수강을 하지 않고는 고시에 합격하는 사례도 드물어졌다.

    또한 교재 저작권료와 인지대, 대학 초빙 특강까지 포함하면 실력 있는 강사 수익은 더욱 올라간다. 이들 가운데 학원 지분을 가진 강사도 있다. 교재가 인기를 끌자 직접 출판사를 차린 강사도 생겨났다. 고시생 B씨는 “기본강의는 1년 내내 있고 회당 1만1000원이다. 비디오테이프로 학원 강의실에서 보는 영상강의가 8000원, 강의 테이프 대여료가 3000원이다. 회당 6000원인 인터넷 동영상 강의도 있다. 인기가 많을수록 다양한 방법으로 수강료 수익이 올라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수익의 이면에는 ‘양극화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강사들의 피 튀기는 전쟁이 있다. 한두 해 반짝 떴다 사라지는 강사도 숱하다. 인기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고시촌 수강생들은 강의시간에 예리하고 집요한 질문을 퍼붓는다. 이때 실수라도 한 번 하면 강사 수명이 끝나기도 한다.

    몇 년 전 모 인기강사가 1차 사법시험 직후 학원을 그만둔 적이 있다. 모의고사 문제풀이 강의를 하다 착각해서 잘못 가르쳐준 문제가 사법시험에 그대로 출제되어 수강생 전부가 틀린 답을 써냈기 때문이다. 수강생들은 늘 비판적 시각으로 강의에 임하기에 수업시간이면 강사와 수강생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돈다. 수시간씩 매일 반복되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학원을 그만두는 인기강사도 있다.

    한국사이버대 신호진 교수의 형법 판례집은 고시생들 사이에 ‘바이블’로 통한다. 그는 몇 차례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로 뛰어들었다. 그가 학원가에서 성공한 비결은 수험에 적합하게 커리큘럼을 짜고 같은 강의라도 수강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수시로 내용을 바꾸는 데 있다. 이렇듯 철저한 강의 및 교재 준비, 노력과 성실이 그를 특급강사 반열에 오르게 했다. 다음은 신 교수의 말.

    소문난 특급강사들

    “수강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강의하고 모의고사 출제 문제의 적중률이 높아야 버틸 수 있다. 웬만해서 수강생들에게 인정받기 어렵다. 대입 재수학원은 1년에 한 번씩 수강생이 바뀐다. 그에 비해 사시는 몇 년씩 공부하는 게 기본이라 수강생들의 ‘물갈이’가 잘 안 된다. 수강생은 똑같은 강의를 듣기 싫어하므로 1년 내내 강의내용이 같으면 도태된다. 그래서 강의 내용을 자주 바꾸거나 아니면 3~4년 주기로 강사들을 물갈이해야 학원과 강사가 도태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강사로 오래 버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의가 없는 날 하루 10시간씩 강의준비를 하고 문제집을 만들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특급강사는 고시촌뿐 아니라 대학가에서도 명성이 높다. 방학이면 전국 대학에서 특강 요청이 쇄도한다. 이들은 법대생 사이에 인기를 누리는 반면 사법시험 출제위원인 대학교수에겐 요주의 인물이다. 사법시험 문제 적중률이 높은 ‘족집게 강사’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법시험에서 판례 중심의 문제 비중이 높아지면서 출제위원들은 소문난 강사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피해서 문제를 내려고 애를 쓴다. 자칫 특정 강사의 강의를 듣지 않은 고시생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젊은 고시생들은 ‘속전속결’을 목표로 고시촌에 뛰어든다. 학원 시스템이 자리잡으면서 체계적·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통계로 보면 사시공부 3년차에서 합격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다. 합격률이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승부를 건다. 고시공부를 시작하는 시기도 과거보다 빨라졌다.

    과거 법대생은 2학년까지 놀고 3학년부터 고시준비를 시작해 졸업 후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반면 지금은 1학년 말부터 시작해 졸업 전에 고시 합격을 목표로 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대학입시에 합격해놓고 입학하기도 전에 사시학원 강의를 들으러 오는 예비 법대생도 있다. 학원 수강생 가운데 대학 재학생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이유다.

    신호진 교수는 “예전에는 고시 합격이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라 사명을 갖고 죽기살기로 공부했지만 요즘은 10년씩 고시에 매달리지 않는다. 직업선택 차원에서 3~4년 투자하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과감히 털고 고시촌을 뜨는 추세”라고 했다. 여기에 2009년경부터로 예상되는 로스쿨 제도 도입 때문에 사법시험이 폐지되기 전 결판을 내야 한다는 불안심리도 고시생의 속전속결 의지를 부추긴다. 장수 고시생들은 ‘▲술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부탁하면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몸에 아픈 데가 있다 ▲운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정신력이 강한 편이 아니다’ 가운데 세 가지 이상에 해당되면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충고한다.

    계획표 짜주는 매니저도 등장

    단기 승부를 목표로 하면서 ‘사시과외’도 성행하고 있다. 공부방법과 요령을 몰라 1~2년 동안 시간만 허비하는 고시생이 적지 않다. 일명 ‘스터디 매니저’라 불리는 과외 강사들은 방대한 분량의 7개 법학 과목 중 중요한 부분을 체크해 내용을 요약해주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주며, 공부하는 요령과 계획표 짜는 것까지 조언한다. 사시과외는 여러 명이 수강하는 학원과 달리 소수 인원이어서 강사에게 밀착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스터디 매니저는 고시공부를 오래해 공부 요령과 문제 해설에 대한 노하우가 있는 사람이나 사법연수원 휴학생이 많다. 10명 이내로 구성되는 팀당 보수는 월 50만~100만원.

    인터넷 고시생 커뮤니티 게시판에 사시과외 일자리를 찾는다는 글을 올린 김모씨는 “나처럼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시과외 일자리 구하는 글을 올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보통은 친구나 선배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강사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과외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과외 강사에 대한 정보와 믿음이 있어야 맡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직 법조인이 1대 1로 해주는 사시과외는 일명 ‘귀족과외’로 불린다. 명문 법대를 졸업한 고시생 윤모씨는 “현직 검사 중에 사시과외 강사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경우 부유층 자제를 상대로 1대 1 과외를 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외국 대학에서 MBA 과정을 마치려면 1년에 1억~2억원이 든다. 이에 비해 사시공부는 1년에 1200만~1500만원이 드니까 매우 싼 편이다. 머리는 좋고 유학 가기는 부담스러운 대학생 중에 단기 투자로 고시공부에 뛰어든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학생도 1대 1 사시과외를 받는다”고 덧붙였다. 고시촌에서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귀족고시생’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 사회에서 고시생은 권력·출세지상주의자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신호진 교수는 이를 ‘편견’이라고 비판했다.

    “어느 분야에서나 성격과 성향, 학벌, 배경, 생활환경에 따라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런데 유독 고시생에겐 이런 시각이 허용되지 않는다. 고시생은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 몇년씩 젊음을 저당잡히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며 매일 피나는 노력을 쏟고 있다.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면 눈물겹고 존경스럽다. 우리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100% 실력만 갖고선 안 된다. 인간관계, 상하관계, 처세술 등을 고루 갖춰야 한다. 그런데 고시생은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법조인이 된다.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뇌물도 아부도 통하지 않는다. 법조인이 되고 나서 변질되는 게 문제이지, 고시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풍토는 없어져야 한다.”

    신 교수는 기억에 남는 수강생 얘기를 들려줬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3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 8명이 그를 찾아왔다. 이들은 금융권 명예퇴직 바람이 불 때 함께 직장을 그만둔 명문대 출신의 동기들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에서 밀려난 이들은 “고시에 도전해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겠다”며 독한 마음으로 사시공부를 시작했다. 8명이 같은 고시원에 묵으면서 서로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고 채찍질했다. 그 결과 몇 년 시차를 두고 8명이 모두 사시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다.

    ‘3力(재력, 체력, 노력)’ 없으면 포기하라

    고시생은 과목별 기본강의, 모의고사 강의, 판례 강의, 최종정리 강의 외에 추석과 설 등 각종 명절 단기특강을 수강하며 숨차게 진도를 따라가야 한다. 강의마다 진도표를 받고 수업 범위 안에서 매일 시험을 치른다. 시험은 곧장 컴퓨터로 채점된다. 매일 강의-시험-복습-예습으로 이어지는 반복된 생활을 몇 년씩 버텨내려면 보통 의지력으로는 어렵다. 그러니 만성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도피처를 찾다 게임이나 오락에 빠져드는 이른바 ‘고시 폐인’들도 나온다.

    인터넷 고시생 커뮤니티를 매일 들락거리며 글을 올리는 ‘게시판 죽돌이’ 가운데도 고시 폐인이 적지 않다. 이들은 시시콜콜 논쟁을 촉발하는데, 여기에 잘못 걸려들면 일파만파로 퍼지는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엉뚱한 책을 좋다고 소개하거나 내용이 부실한 강의를 추천하는 등 경쟁자를 ‘낚기’ 위한 허위 정보가 유포되는 곳도 게시판이다. 고시생 L씨는 “학원 관계자나 강사끼리 경쟁이 붙어 ‘작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경쟁자를 떨어뜨리기 위해 유포하는 허위 정보 때문에 초보 고시생들이 낭패를 볼 때가 있다. 나도 멋모르던 초보 시절 잘못 낚여 시간과 수강료를 날린 적이 있다”며 씁쓸해했다.

    고시촌에서 학원과 강사 못지않게 경쟁에 시달리는 사람이 바로 고시생이다. 날마다 부딪치는 수많은 고시생 전부가 경쟁자이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유대를 느끼는 한편으로 서로 견제하는 심리가 팽팽하다. 심지어 학원에서 장학금을 줄 경우 “내가 낸 수강료로 경쟁자를 도와준다”며 달가워하지 않는다.

    ‘대입 시장’ 뺨치는 신림동 고시학원가

    신림동 학원가에는 독서실부터 PC방, 만화방, 24시간 음식점 등 온갖 ‘수험생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재력, 체력, 노력의 ‘3력(力)’이 없으면 고시 공부하기도 힘들다는 요즘 고시촌에선 고시생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진다. 신림9동에서 10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은 일명 ‘9.5동’으로 불린다. 이곳은 오랫동안 고시촌을 벗어나지 못해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노장층 고시생이 상대적으로 많은 곳이다. 반면 큰길가나 학원 주변은 경제적 부담이 덜한 20대 초·중반이 많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길가에서 언덕으로 점점 후퇴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고시촌 특유의 풍경이 있다. 고시원 문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딱 한 곳뿐인 공원을 제외하면 마땅히 쉴 데조차 없는 게 고시촌이다.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하고 주머니 사정도 어려운 고시 폐인이 고시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고시촌을 중심으로 혼자서 놀 수 있는 공간인 오락실, 만화방, 비디오방, PC방 등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인용 비디오방에선 500~1000원이면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고, 24시간 만화방은 5000원이면 하루가 해결된다.

    얼마 전 고시촌을 떠난 이모씨는 “1차 시험 즈음해서는 거리가 썰렁하다. 다들 공부하느라 학원이나 독서실, 고시원에 틀어박혀 있다. 그런데 시험 바로 전날은 PC방에 빈 자리가 없다. 자기 실력을 잘 알기 때문에 1차 시험을 포기한 학생들이 PC방으로 몰려든다. 가족에게도 말 못하고 괴롭고 외로우니까 도피처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고시촌 문화와 풍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일산 연수원에 들어간 뒤에도 고시촌을 쉽게 뜨지 못하고 먼 거리를 출퇴근한다. 이렇듯 짐을 싸서 들어오는 것은 물론, 내 발로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곳이 고시촌이다.

    ‘보이지 않는 룰’이 작용하는 이곳 독서실 풍경은 생경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내도 바로 경고장이 날아든다. 모두 예민하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기 때문에 서로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신문이나 책장을 넘기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면 안 되고 코를 풀어서도 안 된다.

    볼펜을 책상에 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볼펜용 깔개도 갖춰야 한다. 카세트테이프로 강의를 들을 때는 수건으로 카세트 몸체를 싸서 듣는다.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를 막기 위해서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통하는 규칙을 어기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여러 장의 포스트잇이 책상에 붙어 있다. 포스트잇은 고시생들에겐 공포의 쪽지다.

    몸조심, 입조심하는 강사들

    이곳 강사들에게 적용되는 룰도 있다. 몸조심, 입조심이 그것. 전직 강사 L씨에 따르면 고시생은 몇 년씩 고시촌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시야가 좁아진다. 대하는 사람들도 같은 고시생 아니면 학원 강사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고 특히 학원 강사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그는 “인기 강사에게 사인을 해달라며 연예인처럼 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차 판·검사가 될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 강사를 급이 다른 부류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관심이 큰 만큼 사소한 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모 강사는 강의시간에 무심코 “여자는 다 그래”라고 했다가 인터넷에 여자를 비하했다는 글이 올라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전방부대를 방문했던 강사 A씨는 그곳에서 사법시험에 실패한 학원 제자 두 명을 만났다. 강의 도중 그 얘기를 꺼내면서 가슴 아파했다. 그러자 곧바로 학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여성 수강생의 글이 올랐다. “내 남자친구도 사시 떨어지고 군대 갔는데 왜 그들을 비하하느냐”는 항의였다.

    과거와 달리 사법시험에서 판례 비중이 높아지면서 학원 강의도 이를 중심으로 강화됐다. 이 때문에 강의실에선 황당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B강사는 강의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 판례에 등장한 범인을 희화해 “이런 범인도 있다, 별 희한한 놈 다 본다”고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강의가 끝나자 한 고시생이 화난 얼굴로 그를 찾아와 “당신이 얘기한 별 희한한 범인이 우리 아버지”라며 따지고 든 것. 판례 강의를 하는 강사들 사이에는 유사한 경험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의료 과실을 다루면 의사가 전화를 걸어와 “의사들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든다. 의사 얘기 그만하라”며 못마땅해한다.

    C강사는 수강생과 되도록 거리를 두고 행동 조심, 말조심을 한다. 그에 따르면 사법시험에 합격한 여강사는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다 비난을 듣기도 했다. 자동차 마니아인 한 강사는 외제차를 새로 뽑았다가 며칠 만에 국산차로 바꿔야 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수강생들이 여기저기 긁어놨기 때문이다. 그는 한동안 “수험생 고혈을 빨아 사치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학원과 강사들이 수익을 불문율에 부치는 이유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차 시험이 끝나면 인기강사 순위에 변화가 일어난다. 문제 적중률이 낮거나 강의 내용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강사는 금세 소문이 퍼져 수강생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모의고사 문제풀이에서 실수로 수강생들에게 답을 잘못 알려준 문제가 공교롭게 출제되어 수강생이 전부 답을 틀리게 쓴 상황을 초래한 유명 강사는 곧바로 퇴출됐다. 인기강사가 되기도 힘들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는 더 어려운 곳이 바로 고시촌이다. 대한민국에서 똑똑한 사람, 따지기 좋아하는 예비 법조인이 모인 고시촌에서 갈수록 강의하기가 쉽지 않다고 강사들은 입을 모았다.

    “변호사보다 강사가 좋아”

    고시촌으로 유입되는 강사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받고 뛰어든 전문 강사, 사법시험에 합격한 현직 변호사, 시험은 실패했지만 수년간 공부한 실력파. 전문강사가 차지하던 자리를 최근에는 현직 변호사가 채우고 있다. 해마다 사시합격자 수가 많아지면서 과거에 비해 변호사 수가 가파르게 증가해 업계 경쟁이 치열해진 것도 한 이유다.

    현직 변호사가 강사로 뛰어드는 사연은 저마다 다르다. 사법연수생 시절 아르바이트로 고시촌에서 잠깐 강사를 한 추억을 못 잊어 1년에 몇 번 특강만 맡는 경우도 있다. 헌법을 강의하는 현직 변호사 K씨는 2차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아르바이트 삼아 강사를 하다가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강의할 때 수강생이던 여학생과 눈이 맞아 결혼한 그는 고시촌에 대한 좋은 기억과 이곳에서 느낀 보람 때문에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인기 교재의 저자가 수강생의 요청으로 강사로 나서기도 한다. 사법연수원을 2등으로 졸업한 N강사는 현재 군법무관으로 복무 중인데 그의 민법 교재와 강의가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명절 연휴 때 특강을 실시한다. ‘보강 20회’로 유명한 스타강사 K씨는 기본강의 기간 내 제때 진도를 마치지 못하면 쉬는 날마다 보강을 한다. 무리한 보강으로 디스크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자 학원가가 발칵 뒤집혀 고시생이 병원으로 달려가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I씨는 거대 로펌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뛰어난 변호사로 1년에 딱 한 차례 상법 기본강의를 맡고 있다. 강의 때면 수강생이 500명씩 몰린다. 자신의 교재로 공부하는 수강생을 위해 강의에 나서는데, 강의기간 중 주말마다 호프집을 통째로 빌려 수강생에게 맥주파티를 열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행정고시 출신의 공정거래위원회 사무관 P씨는 사시 선택과목 중 경제법을 강의하는데, 역시 명절 특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명절에도 고시촌을 떠나지 않는 고시생이 많다.

    신호진 교수는 몇 년 전 국내 대형 로펌 변호사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A씨의 방문을 받았다. A씨는 “판사를 하다 변호사를 하려니까 ‘정말 나쁜 놈들’을 위해 변론한다는 게 참을 수 없다. 그러니 법정에서 입이 안 떨어져 변호사 노릇이 고역”이라고 털어놓으며 강사직에 대해 문의했다. 법원에 드나들며 사람 상대하고 법 따지는 변호사보다 강사가 적성에 맞고 편하다는 이유로 학원가에 들어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교수 전 단계로 강사를 거치는 변호사도 적지 않다. 외국 유명 대학의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A씨는 국내 대학에 연줄이 없어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고 강사가 됐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밖에도 독특한 경력의 강사가 많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E강사는 사시 2차 시험에서 평균점수로는 수석을 하고도 한 과목이 과락되어 고시 패스에 실패했다. 헌법을 강의하는 H씨는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나와 외무고시에 수석 합격한 이력을 지녔다. 그를 잘 아는 지인은 “외무부 사무관으로 재직하다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학원 강사로 돌아섰다. 워낙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강사가 잘 맞는 것 같다. 실력 있는 강사로 유명하다”고 귀띔했다. 동국대 겸임교수인 H씨는 방학 때마다 대학 초빙 특강으로 바쁘다.

    학원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신규 강사 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다. 최소 2~3년간 열심히 강의해도 인기강사가 될까 말까 할 만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년간 노하우를 축적한 전문강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쉬울 리 없다. 집안이 어려워 사시공부를 하다 포기하고 스터디 매니저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최근 실력을 인정받아 학원에 정식 강사로 영입된 H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의 강점은 30대 초반의 젊은 감각으로 신세대 수강생과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

    향후 5년 내에 사시학원 강사가 대부분 변호사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당장은 인기를 누리는 강사들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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