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女, 娼妓, 藝者…
기생의 역사에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국학자 이능화가 저술한 풍속에 관한 서적으로, 기생을 종합적으로 다룬 첫 역사서이다. 이방인이 기생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여성 학자 빈센차 두르소는 1997년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조선기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02년 일본 학자 ‘가와무라 미나토’도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해어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 취급을 받은 기생에 관한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는 물론 야사나 각종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 책은 기생의 기원과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뤘으며 각종 일화와 시조, 시가도 소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기생은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생 중에는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다.
기생을 가리키는 명칭 중에 ‘해어화’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시대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 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 또는 ‘기녀’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 했으나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뉘었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기 위해 그들은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는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으며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입술을 아주 빨갛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게이샤 활동 금지령이 내려진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샤의 수는 크게 늘어나 지방도시로까지 퍼지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妓生, a gisaeng(-girl) ;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생의 ‘기’를 ‘妓’외에 ‘伎’로도 표기했다. ‘妓’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기(伎)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 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무대인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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