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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6

홍옥임·김용주 동성애 정사(情死) 사건

철길 위에서 갈가리 찢겨 나간 ‘금지된 사랑’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홍옥임·김용주 동성애 정사(情死)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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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무가 자살하던 날 오전 11시 김용주는 시가에 병원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홍옥임의 집에 찾아왔다. 무슨 은밀한 약속이 있었던지 홍옥임은 찾아온 김용주와 함께 놀러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갔다. 두 동무는 그 길로 경성역에서 인천행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다. 홍옥임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을 확인한 후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제 김용주가 찾아왔기에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했더니 내 딸과 용주는 용주네 집에 놀러간다고 하며 나갔습니다. 그 후로 아무 소식이 없더니 어제 오후 8시경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애들이 나갈 때 벙글벙글 웃어서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청춘 양(兩)여성 철도 정사’, ‘동아일보’ 1931년 4월10일자)


홍옥임·김용주 동성애 정사(情死) 사건

‘삼천리’ 1931년 5월호에 실린 홍옥임, 김용주 동성애 정사 관련 기사.

겉보기에 홍옥임과 김용주는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홍옥임은 저명한 안과의사이자 세브란스의전 교수인 홍석후의 고명딸로 태어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쉬울 것 없이 자랐다. 자살하기 불과 일주일 전 이화여전 음악과에 입학한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도였다. 홍옥임의 삼촌 홍영후는 ‘난파’란 호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음악가였다. 김용주는 종로에서 덕흥서림이라는 큰 서점을 경영하는 김동진의 장녀로 태어나 3년 전 동덕여고보를 중퇴하고 동막 부호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출가한 주부였다.

그러나 남들 보기에 화려했을 뿐 두 여인의 가슴은 상처투성이였다.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던 두 여인은 급기야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강제 결혼이 앗아간 소녀의 꿈



1929년 열일곱 살 소녀 김용주는 동덕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용주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얌전해 동급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홍옥임 역시 김용주를 흠모하던 동급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김용주는 다른 일에는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김용주의 아버지 김동진은 그런 딸의 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딸에겐 늘 ‘모름지기 여자란 좋은 집에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남편 받들며 사는 게 제일’이라고 가르쳤다. 일찌감치 동막 부호 심정택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하고, 딸이 여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시집보낼 계획이었다. 김용주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지나가는 말로 듣기는 했지만, 졸업하려면 아직 학교를 1년은 더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심정택은 ‘신랑의 할머니가 하루바삐 손자며느리를 보고 싶어 한다’며 서둘러 혼례를 치를 것을 청했다. 딸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동진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동진은 허겁지겁 혼인 날짜를 잡고, 동덕여고보를 찾아가 딸을 억지로 자퇴시켰다. 김용주는 시집가기가 싫다고 아버지에게 애원도 해보았고, 시집가더라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에 호소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안 된다’는 매정한 답변뿐이었다. 김용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심종익에게 시집갔다. 당시 심종익은 휘문고보 1학년에 재학 중인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부잣집 맏딸로 태어나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자라난 김용주에게 시집살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공부하느라 살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부잣집 큰살림을 떠안고 보니 하루라도 실수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눈치 보는 것으로 모자라 시할머니 눈치까지 보며 살려니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린 신랑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종익은 휘문고보를 자퇴하고 비행학교를 다니겠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호랑이 같은 시집 식구들 사이에 혼자 남겨진 김용주는 더 한층 큰 적막과 고독에 잠겨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이듬해 봄, 김용주는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시부모에게 학교에 다시 다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시부모는 어린 며느리를 바깥으로 내돌리는 게 꺼림칙했지만,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사는 며느리를 마냥 집안에만 붙잡아둘 수도 없어 마지못해 승낙했다. 방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뜀뛰었다. 살림할 때 입던 치마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교복을 꺼내 입었다. 설레는 가슴을 애써 쓸어 내리며 하인을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김용주는 다시 살아날 희망에 부풀어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햇볕을 찾은 듯한 기쁨을 안고 총총이 교문을 두드렸다. 옛날 담임선생님과 동무들은 모두 그녀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인정을 초월한 반석과 같이 차고 엄격한 학칙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혼자는 입학을 불허함’

새로운 희망에 빛나던 교문은 금단의 동산을 지키고 서 있는 시꺼먼 무쇠대문처럼 그녀 앞에서 굳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김용주는 이제 달건 쓰건 돌아오는 운명을 아무 반항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깨끗하게 단념하고 다시 규방으로 돌아갔다. (‘철로의 이슬 된 이륜의 물망초 3’, ‘조선일보’ 1931년 4월13일자)


기혼자라는 이유로 복학을 거부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일본에 간 남편이 하루바삐 비행술 공부를 끝내고 은빛 날개 번쩍이는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비행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았다. 방탕한 기질은 심씨 집안의 내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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