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초의 국내파 의사인 세브란스의전 교수의 고명딸과 종로 큰 서점의 딸로 태어나 부호의 아들에게 시집간 여인. 20대의 아름다운 두 여성이 영등포역 인근 기찻길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단순 사고사로 치부될 뻔했던 사건의 뒤에는 당대 조선 가족제도의 치명적 결함이 숨어 있었다. 부족할 것도, 원통할 것도 없어 보이는 두 여인은 어떻게 사랑했고, 괴로워했고, 끝내 죽음을 택했나.
‘동아일보’ 1931년 4월 10일자에 실린 홍옥임, 김용주 동성애 정사 관련기사와 홍옥임의 사진
“얘, 인천 방향이 어디니?”
키가 조금 큰 여인이 지나가는 꼬마에게 10전짜리 백동전을 쥐어주며 물었다. 꼬마는 난데없는 횡재에 얼떨떨해서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두 여인은 꼬마가 가리킨 방향으로 철길을 따라 걸었다. 지난밤 때늦은 봄눈이 내려, 철로 양편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나리와 진달래 꽃잎 위에는 눈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 두 여인은 이채로운 봄 정취에 취해 두 손을 꼭 잡고 마냥 즐거워하며 걸었다.
40분 남짓 걸었을 때,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열차가 보였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며 생끗 웃었다. 열차는 점점 다가왔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그냥 걸었다.
오후 4시45분,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질주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날렸고, 인천발 서울행 제428호 열차는 영등포역을 2km 남겨두고 급제동을 걸었다. 열차가 내뿜는 굉음에 묻혀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여인의 몸은 쇳덩이에 부딪혀 갈가리 찢겨 나갔지만,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꼭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의문의 철도 자살
제428호 열차 승무원을 통해 급보를 접한 영등포경찰서 경관은 시흥군 북면사무소 직원과 함께 즉각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두 여인의 시신에서는 신분증이나 유서 같은 신원을 알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호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두 여인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해줄 따름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상당한 집안 여성임에 분명했다. 경관은 두 여인의 시신을 북면사무소 직원에게 인계해 가매장하도록 지시하고 곧장 신원조사에 착수했다.
보도할 만한 사건이 터지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였던 신문기자들도 오랜만에 터진 ‘사건다운 사건’ 덕분에 활기를 되찾았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면 편집자였던 김을한은 훗날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오늘은 또 무엇으로 지면을 채우나’ 하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외근 나갔던 기자들이 주워 가지고 온 기사는 역시 몇 건의 교통사고와 조그마한 화재(火災)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좀 싱겁기는 하지만 창경원 벚꽃놀이 사진을 커다랗게 내걸고 상춘객을 중심으로 지면을 꾸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영등포경찰서에 다녀온 기자가 내어놓은 짤막한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영등포역과 오류동역 사이 철도선로에서 묘령의 두 여성이 기차에 치여 죽은 사건이었다. 편집 상식으로 보면 잘해야 일호(一號) 활자로 2단짜리 기사밖에는 안 되는 사건이었지만, 간단하게 처리하기에는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옷도 잘 입었다는 꽃다운 두 여성이 함께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연히 발생한 교통사고 같지는 않았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필시 정사(情死)일 것이며, 정사의 이면에는 반드시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외근기자들에게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서 최근 집을 나간 젊은 여성의 실종신고가 있거든 모조리 적어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김을한, ‘사건과 기자(1960)’ 중에서) |
사건 발생 당일 밤, 종로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에 각각 딸과 며느리를 찾아달라는 실종신고 두 건이 접수됐다. 창성동에 사는 스물한 살 된 여학생 홍옥임은 그날 오후 집으로 찾아온 친구와 함께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끊겼고, 동막(마포구 대흥동)에 사는 열아홉 살 된 주부 김용주는 그날 오전 병원 간다고 집을 나간 후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홍옥임의 집에서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남긴 유서까지 발견됐다.
사건 발생 당일 밤, 종로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에 각각 딸과 며느리를 찾아달라는 실종신고 두 건이 접수됐다. 창성동에 사는 스물한 살 된 여학생 홍옥임은 그날 오후 집으로 찾아온 친구와 함께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끊겼고, 동막(마포구 대흥동)에 사는 열아홉 살 된 주부 김용주는 그날 오전 병원 간다고 집을 나간 후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홍옥임의 집에서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남긴 유서까지 발견됐다.
홍옥임과 김용주는 동덕여고보를 함께 다닌 절친한 친구였다. 실종 당일 홍옥임의 집에서 함께 나간 친구가 바로 김용주였다. 이튿날 오전, 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두 여인의 시신이 안치된 북면사무소로 달려갔다.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 면사무소에는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의사와 경찰, 기자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뤘다. 가족들이 확인한 결과 두 여인은 예상대로 홍옥임과 김용주였다.
두 동무가 자살하던 날 오전 11시 김용주는 시가에 병원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홍옥임의 집에 찾아왔다. 무슨 은밀한 약속이 있었던지 홍옥임은 찾아온 김용주와 함께 놀러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갔다. 두 동무는 그 길로 경성역에서 인천행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다. 홍옥임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을 확인한 후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제 김용주가 찾아왔기에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했더니 내 딸과 용주는 용주네 집에 놀러간다고 하며 나갔습니다. 그 후로 아무 소식이 없더니 어제 오후 8시경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애들이 나갈 때 벙글벙글 웃어서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청춘 양(兩)여성 철도 정사’, ‘동아일보’ 1931년 4월10일자) |
‘삼천리’ 1931년 5월호에 실린 홍옥임, 김용주 동성애 정사 관련 기사.
그러나 남들 보기에 화려했을 뿐 두 여인의 가슴은 상처투성이였다.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던 두 여인은 급기야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강제 결혼이 앗아간 소녀의 꿈
1929년 열일곱 살 소녀 김용주는 동덕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용주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얌전해 동급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홍옥임 역시 김용주를 흠모하던 동급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김용주는 다른 일에는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김용주의 아버지 김동진은 그런 딸의 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딸에겐 늘 ‘모름지기 여자란 좋은 집에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남편 받들며 사는 게 제일’이라고 가르쳤다. 일찌감치 동막 부호 심정택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하고, 딸이 여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시집보낼 계획이었다. 김용주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지나가는 말로 듣기는 했지만, 졸업하려면 아직 학교를 1년은 더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심정택은 ‘신랑의 할머니가 하루바삐 손자며느리를 보고 싶어 한다’며 서둘러 혼례를 치를 것을 청했다. 딸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동진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동진은 허겁지겁 혼인 날짜를 잡고, 동덕여고보를 찾아가 딸을 억지로 자퇴시켰다. 김용주는 시집가기가 싫다고 아버지에게 애원도 해보았고, 시집가더라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에 호소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안 된다’는 매정한 답변뿐이었다. 김용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심종익에게 시집갔다. 당시 심종익은 휘문고보 1학년에 재학 중인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부잣집 맏딸로 태어나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자라난 김용주에게 시집살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공부하느라 살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부잣집 큰살림을 떠안고 보니 하루라도 실수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눈치 보는 것으로 모자라 시할머니 눈치까지 보며 살려니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린 신랑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종익은 휘문고보를 자퇴하고 비행학교를 다니겠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호랑이 같은 시집 식구들 사이에 혼자 남겨진 김용주는 더 한층 큰 적막과 고독에 잠겨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이듬해 봄, 김용주는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시부모에게 학교에 다시 다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시부모는 어린 며느리를 바깥으로 내돌리는 게 꺼림칙했지만,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사는 며느리를 마냥 집안에만 붙잡아둘 수도 없어 마지못해 승낙했다. 방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뜀뛰었다. 살림할 때 입던 치마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교복을 꺼내 입었다. 설레는 가슴을 애써 쓸어 내리며 하인을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김용주는 다시 살아날 희망에 부풀어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햇볕을 찾은 듯한 기쁨을 안고 총총이 교문을 두드렸다. 옛날 담임선생님과 동무들은 모두 그녀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인정을 초월한 반석과 같이 차고 엄격한 학칙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혼자는 입학을 불허함’ 새로운 희망에 빛나던 교문은 금단의 동산을 지키고 서 있는 시꺼먼 무쇠대문처럼 그녀 앞에서 굳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김용주는 이제 달건 쓰건 돌아오는 운명을 아무 반항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깨끗하게 단념하고 다시 규방으로 돌아갔다. (‘철로의 이슬 된 이륜의 물망초 3’, ‘조선일보’ 1931년 4월13일자) |
기혼자라는 이유로 복학을 거부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일본에 간 남편이 하루바삐 비행술 공부를 끝내고 은빛 날개 번쩍이는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비행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았다. 방탕한 기질은 심씨 집안의 내력이었다.
시아버지 심정택은 돈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향락했다. 심종익은 심정택의 ‘세컨드’ 소생이다. 또 남편 심종익 역시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데다가 경제적 혜택까지 누려 부친 이상으로 방탕한 향락을 추구했다. 김용주는 총명한 여자였다. 여러 번 남편에게 더 이상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심종익은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는 더 큰 자극을 찾아 홍등가를 헤맸다. (‘그녀들은 왜 철도 자살을 하였나?’, ‘별건곤’ 1931년 5월호) |
홍옥임의 부친인 세브란스의전 교수 홍석후. 국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한 최초의 인물로 작곡가 홍난파가 그의 동생이다. 왼쪽은 홍옥임이 삼촌 홍난파에게 보낸 유서.
‘모던 가정’에 몰아친 풍파
홍옥임의 아버지 홍석후는 1908년 동급생 6명과 함께 제중원의학과 제1기로 졸업한 조선 최초의 국내파 의사였다. 제중원의학과는 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듬해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홍석후는 1921년부터 2년간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졸업 후 줄곧 모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의사인 자신과 음악가인 동생 홍난파의 영향으로 홍석후의 자녀와 조카는 모두 의사 아니면 음악가였다. 홍석후의 가정은 지극히 명랑하고 쾌활한 미국식 ‘모던 가정’이었다.
홍석후는 아들은 여럿 두었으나 딸은 홍옥임 하나뿐이었다. 홍옥임은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홍석후는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홍옥임의 말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홍옥임은 피아노까지 갖춘 자신의 서재가 따로 있었고, 언제나 미스코시백화점이나 조지아백화점에서 사온 최신 유행 옷을 입고 다녔다. 당시 피아노는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호가했다. 일본 잡지를 보다가 사진 속의 할리우드 여배우가 찬 시계가 마음에 들기라도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은 딸의 정서에 도리어 악영향을 끼쳤다. 홍옥임은 원하는 것을 갖는다고 행복해하지 않았고, 반대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렸다. 친구를 사귀면 며칠이 못 돼 싸우고 갈라서기 일쑤였고, 학업 성적은 매번 끄트머리부터 세어 올라가는 것이 빨랐다.
김용주가 동덕여고보를 자퇴하고 시집간 후 홍옥임은 이화여고보로 전학했다. 1930년 이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중앙보육학교에 들어갔으나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뒀다. 여학생 시절 홍옥임은 ‘이상한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홍옥임은 어디서고 어여쁜 소녀를 보면 당장 금반지 한 개를 사서 선물하고 연서(戀書)를 써 보냈다. 요즘 여학생들 사이에서 동성끼리의 연애는 대개 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홍옥임에게는 동성 애인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도 나이가 차감에 따라 동성 애인만으로는 관능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녀들은 왜 철도 자살을 하였나?’, ‘별건곤’ 1931년 5월호) |
19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동성연애가 유행이었다. ‘여성’ 1937년 7월호에 실린 ‘여학생 스케치’.
“나는 세브란스가 제일 좋아. 앞으로 나는 의사하고 결혼할 테야.”
홍옥임은 만나는 친구들에게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한테 시집갈 것이라 장담했다. 아버지가 세브란스의전 교수였고 오빠는 그 학교 학생이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홍옥임이 의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집안사람이 죄다 달려들어 신랑감을 물색했다. 얼마 후 홍옥임은 오빠의 소개로 세브란스의전 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홍옥임이 이성 애인과 사랑을 키워갈 때 그의 가정에 뜻밖의 우환이 생겼다.
홍옥임의 가정은 오래전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홍석후는 교회의 장로였지만, 근래에 와서는 ××××게 되고 ××까지 있어 ○○○까지 꾸몄다. 쾌활하던 집안에 먹구름이 끼고 찬바람이 몰아쳤다. (‘그녀들은 왜 철도 자살을 하였나?’, ‘별건곤’ 1931년 5월호) |
당시 신문·잡지는 홍옥임이 아버지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보도했지만, 복자(伏字)로 처리해서 홍석후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일반인이 알 도리가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면 편집자였던 김을한은 홍옥임 집안의 우환이 무엇이었는지 30년 후에야 밝혔다.
모(某) 의사는 미국에 유학까지 한 대학교수로서 사회의 명망이 높은 인격자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노(老) 박사에게는 최근에 갑자기 애인이 생겨서 그처럼 행복하고 단란하던 가정에도 점차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구나 박사의 애인이라는 여성은 ‘원동 재킷’이라는 유명한 ‘모던 걸’로서 박사에게는 마치 딸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눈치를 챈 박사의 막내따님은 처녀의 결벽성에서 환멸을 느끼고 불결한 세상을 하직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김을한, ‘사건과 기자(1960)’ 중에서) |
‘조광’ 1937년 3월호에 실린 동성연애 관련기사.
홍옥임은 존경하는 아버지가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인 ‘원동 재킷’과 연애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안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홍옥임의 애인마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애인에게 연이어 배신당한 홍옥임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해맑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고, ‘삶이 허무하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방안에 틀어박혀 일본 연애소설만 줄기차게 읽어댔다. 김용주는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갈등하던 홍옥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동정에서 비롯된 사랑
남자에게 배신당한 홍옥임과 김용주는 서로 깊이 동정하며 서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과 아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홍옥임은 수시로 김용주의 집을 찾았다. 두 여인의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했다.
원동에 사는 김화동은 늘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녀 ‘원동 재킷’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1921년 김화동은 일본 유학을 보내줄 남자를 찾다가 유부남 박석규에게 속아 정조를 유린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언니 김후동은 미두왕 반복창과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려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신동아’ 2007년 1월호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 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참조).홍옥임은 존경하는 아버지가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인 ‘원동 재킷’과 연애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안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홍옥임의 애인마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애인에게 연이어 배신당한 홍옥임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해맑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고, ‘삶이 허무하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방안에 틀어박혀 일본 연애소설만 줄기차게 읽어댔다. 김용주는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갈등하던 홍옥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동정에서 비롯된 사랑남자에게 배신당한 홍옥임과 김용주는 서로 깊이 동정하며 서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과 아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홍옥임은 수시로 김용주의 집을 찾았다. 두 여인의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추악한 현실과 허무한 인생에 대한 절망은 커져만 갔다. 홍옥임은 친구들에게 “차마 죽어버리려 해도 아버지의 명예와 나밖에는 동정해줄 사람이 없는 김용주가 가여워서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도원에 들어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개신교를 믿는 집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1년 3월, 홍옥임과 김용주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 마지막 전차를 타고 한강으로 향했다. 전차에서 내린 두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강변으로 내려갔다. 모래 위에 옷을 벗어놓고 물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두 여인은 괴로운 세상에서 벗어날 유일한 도피처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초봄 차가운 물살이 두 여인의 목 밑까지 차올랐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덧없는 이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 강변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두 여인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누군가 급하게 노를 저어온 것이었다. 구조를 받은 두 여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자살 시도에 실패한 두 여인은 사월 안으로는 죽어버리기로 결심하고 남은 한 달 동안 원 없이 놀아볼 생각으로 밤낮없이 공원으로 극장으로 돌아다녔다. 3월 말 드디어 죽음을 결심하고 애선사진관에서 최후의 촬영을 마치고 동무들에게 사진을 일일이 나눠주었다. 같은 날 홍옥임은 일본에 유학 간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세상에 대한 저주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 가득 차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살할 것으로 생각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4월1일 홍옥임은 이화여전 음악과에 입학했다. 새 출발하는 날 일기장에는 의외로 ‘세상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쓴 천사다. 나는 학교도 세상도 다 싫다’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철로의 이슬 된 이륜의 물망초 5’, ‘조선일보’ 1931년 4월17일자) |
1931년 4월8일, 이화여전 음악과 신입생 홍옥임은 그날 따라 무척 행복해 보였다. 수요일이었음에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침부터 몸단장을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스물한 살 탄력 있고 발그스름한 두 뺨에 미스코시백화점에서 사온 ‘코티(Coty) 분’까지 바르고 나니 웬만한 여배우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미모가 빛났다.
‘별건곤 1930년 11월호에 실린 ’여류명사의 동성연애기‘
“오늘은 수업 없어요.”
홍옥임은 어머니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옷장에서 옷이란 옷은 죄다 꺼내 옷맵시를 맞춰보았다. 걸쳤다 벗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조지아백화점에서 새로 산 실크 양장을 골라 입었다. 얼마 후 김용주가 집으로 찾아왔다. 김용주는 시집간 지 3년이 지난 주부였지만, 그날따라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이었다.
“엄마, 우리 놀러 나가요.”
“아니 점심때 다 됐는데 밥이나 먹고 가야지.”
“나가서 먹을 게요. 우리 바빠요.”
오전 11시, 홍옥임은 김용주와 함께 허겁지겁 대문을 나섰다. 5시간 후 두 여인은 영등포역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서 갈가리 찢겨 나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여학생 동성애
1920~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 동성애는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성애와 관련된 이야기도 금기시 되지 않았다.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은 ‘중외일보’ 기자 황신덕, 이광수의 아내이자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 기독교 여성운동가 이덕요 등 쟁쟁한 여류명사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취재한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황신덕은 자신의 동성연애 경험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여학생시대에 동성연애를 안 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경험해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도 더러 있지요. 숭의여학교 다닐 때 태천에서 온 동무하고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동무는 부모도 없는 퍽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동정에서부터 사랑이 싹튼 것 같습니다. 집에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기숙사에 있는 그 동무를 데려다가 같이 먹어야 마음이 편하고,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그 동무의 얼굴 볼 것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빨라지며 마음이 설습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돼 동무가 고향으로 가게 되었을 때 2주밖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건만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정거장에서 막 붙잡고 둘이서 울었지요. 목소리가 높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한참 울고 나니까 구경꾼이 쭉 둘러섰겠지요. 동무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로는 빠지지 않고 다니던 예배당에 혼자 가기가 너무 서운해서 몇 번이나 빠졌답니다. 이것이 나의 최초의 동성연애인가 봅니다. 그 후로도 많은 동무와 친했지만 그때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류명사의 동성연애기’, ‘별건곤’ 1930년 11월호) |
허영숙은 김경희, 배영순 등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과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열네다섯 살 때 진명여학교를 다니면서 동성연애를 많이 했습니다.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았을걸요. 지금 중앙고보 선생의 부인인 김경희가 배화여고보에 다닐 때 재미있게 지냈지요. 그이는 기숙사에 있었고 나는 집에서 다녔습니다. 학교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1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가서 만나 보는데 7일이 어찌나 길던지요. 기다리고 기다려서 만나면 너무 반가워서 껴안고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요. 그리고 헤어질 때에는 반드시 다만 손수건 한 개라도 주고야 왔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같은 진명여학교의 상급생이었는데 지금 신의주에 있는 배영순입니다. 배영순은 무척이나 나를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그는 기숙사에 있고 나는 집에서 통학했는데 그 언니의 곁을 너무 떠나기가 싫어서 기숙사에 넣어 달라고 부모님께 막 떼를 썼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래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기숙사에서며칠씩 머물면서 다리가 아파서 못 간다고 집에다 핑계를 댔습니다.하루는 그렇게 사랑하던 언니가 다른 사람과 사랑한다는 말이 들리겠지요. 너무 성이 나서 나는 그 언니를 붙잡고 한껏 울고는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한 일이 있었지요. 좌우간 내가 질투심이 컸던 모양입니다. 그 언니가 시집갈 때는 너무 섭섭해서 엉엉 울었답니다.” (‘여류명사의 동성연애기’, ‘별건곤’ 1930년 11월호) |
배영순을 그처럼 사랑했던 허영숙은 졸업 후 이광수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당시 여학생 사이에 만연한 동성연애는 성적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동성애에는 상대에 대한 깊은 ‘동정(同情)’이 자리하고 있었다. 십대 초반의 소녀가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여간 외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외로움을 동정하고 감싸주는 친구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교제를 가로막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기성세대는 되도록 남학생과 여학생을 갈라놓으려고 노력했다. 여성들끼리 모여 있으니 여성들끼리 사랑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같은 맥락에서 남학생들 사이의 동성연애도 드물지 않았다.
“내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열네 살 먹은 한 남학생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퍽 귀엽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그도 나를 무척 따랐습니다. 그는 운동도 잘하고 성적도 나보다 훨씬 우수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우정은 날로 깊어져 갔고, 학교가 끝난 후에는 집에 와서 늘 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나를 마치 여성처럼 받아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손을 만지고 껴안고 뺨을 대고 키스를 해도 다 가만히 받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둘 다 남성이면서도 꿀 같은 연애생활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김여제, ‘동성연애’, ‘조광’ 1937년 3월호) |
여학생들이 동성애에 빠져든 근본 원인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있었다. 자유연애가 도입된 지 한참이 지났어도, 남성은 여전히 여성이 ‘순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정(童貞)이니 순결이니 하는 말은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성은 ‘가볍게’ 연애를 걸었지만 여성은 ‘심각하게’ 연애를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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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감언이설로 사랑을 구걸하다가도 일단 구애에 성공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게 당대의 조선 남성이었다. 그 때문에 생리적으로는 남성에 끌리더라도 남성을 믿지 못해 동성을 사랑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결국 여학생이 동성에게 끌린 것은 남성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렇게 보면 꽃다운 두 여인이 철길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 비운의 사건 역시 당대 남자들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