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그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남다른 인연은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서울대 강사와 학생으로 처음 만나 학생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하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극적으로 우회전한 것. 두 사람이 한 자리에서 서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오른쪽).
김문수 지사는 서울대 경영학과 70학번이다. 신입생 김문수는 신입회원을 모집하러 다니는 심재권(전 국회의원)의 모습에 반해 ‘후진국사회연구연(이하 후사연)’에 가입한다. 당시 학내 서클들은 사회운동이론보다 인간적 유대를 중시하는 ‘행동적 민족주의’ 성격이 짙었는데, 후사연도 마찬가지였다. 후사연에는 법대, 상대 학생보다 문리대 학생들이 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으나 김문수는 상대생이면서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터라 안병직 교수도 그를 기억했다.
“당시 김근태를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이 유명했지요. 신입생 중에선 김문수가 눈에 띄었어요. 상대생이면서도 후사연에 열심이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맑고 순수한 학생이었죠.”
당시 젊은 강사이던 안 교수는 지하 서클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념적 리더였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내 서클들이 안 교수의 지도하에 마르크스, 엥겔스, 마오쩌둥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다. 안 교수는 학생들의 사회주의 운동과 진로에 대한 상담역으로도 분주했다.
대학생 김문수는 후사연 선배들과 용두동 판잣집에 살면서, 비로소 가난에 대한 열등감을 사회의식으로 승화시켰다. 교육공무원이던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선 뒤로 줄곧 경북 영천의 판잣집에서 밥상 하나를 놓고 7남매가 둘러앉아 공부해야 했던 그에게 판잣집은 그 자체로 열등감을 자극했다. 그런데 선배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있고, 사회운동으로 이 비참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 것. 그가 열성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내가 자네라면 노동운동 하겠네”
안 교수는 당시 노동운동을 가장 앞선 사회운동이라 여겼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노동현장에 뛰어들라고 권유했다. 1971년 여름방학 때 후사연은 상대생 4명을 뽑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시켰는데, 4명 중 한 명이 김문수였다. 그는 드레스 미싱공장(대우중공업 구로동 공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은 9월, 김문수는 장티푸스에 걸렸다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증상이 심해진 탓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대학에선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심해져, 정부가 위수령을 발동하고, 후사연을 비롯한 서클을 강제 해산했다. 그 와중에 전국 각 대학에서 100여 명이 제적됐는데, 김문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병이 낫자, 학교에 갈 수도 없는 처지라 4H활동과 야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하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올라갔다.
“스물한 살의 제가 봉건적인 고향에서 할 수 있는 큰 일이 뭐가 있겠어요. 공장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터라, 농민운동은 진도가 느리고 답답했어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 함께 제적된 경북고·서울대 동기 이영훈(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과 함께 안병직 교수님 댁을 찾아갔어요. 그 시절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 교수님 댁을 드나들었죠. 학교에서도 제적됐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여쭤보았죠. 교수님은, 학벌이 뭐 중요하냐, 공부말고도 할 일이 많다며 위로하셨어요. 그러면서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셨어요. ‘내가 자네들 같으면 노동운동을 하겠네’ 그러셨죠.”
그 뒤로 김문수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안 교수를 만났다.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삶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갑자기 복교조치가 내려졌다. 다시 ‘문중의 별’로 떠오른 그를 위해 어머니와 형이 고향에서 등록금을 마련해왔다. 그는 복학한 뒤에도 자동차 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1973년 겨울방학 동안, 대학생들은 1974년을 ‘민권쟁취·민주승리의 해’로 정하고, 학생운동을 질적으로 심화할 방법과 조직적인 운동을 모색했다. 그 결과가 1974년, 각 대학 및 고등학교의 성토대회, 수강 거부, 유인물 배포, 농성 등으로 나타났다.
“복학해서 유인태(현 열린우리당 의원) 선배와 지방 대학에 운동 조직을 만들러 다녔어요. 그러던 중 안 교수님을 뵈었는데, ‘네가 유인태와 지방에 학생 조직하러 다닌다던데, 그러다 잡혀가기 십상이다. 학생운동은 부르주아 운동이니 노동운동을 해라. 그것이 노동자 이익실현을 대변하는 길이다’라고 하시더군요.”
직선제로 탄생한 민주노조
안병직 교수는 김문수 지사와의 유대관계가 책임감이 아니라 인간적 매력으로 맺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1974년 4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에 의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여 명을 구속기소한 것. 그는 다시 제적되고, 수배자 신분으로 숨어 지냈다. 자연스레 안 교수와의 연락도 뜸해졌다.
창동에서 숨어 지낸 지 5개월여 만에 고향에 연락한 그는 어머니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는다.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 약초를 캐러 다니고 굼벵이를 잡아다 드렸지만, 어머니는 결국 몇 개월 만에 아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75년 초, 어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스물다섯 살의 김문수는 청계천으로 향했다. 신평화복장학원에서 재단을 배워 동문시장에 재단보조로 취직했다. 한 달 월급은 단돈 1만원. 그렇게 생활하던 중 서울대 선배인 임무현을 만난다. 일찍이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당시 종근당에 근무하고 있던 임무현으로부터 “앞으로는 산업사회가 발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그는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격증 취득에 열을 올렸다. 2년 동안 7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 사이 김문수는 도루코 면도날을 만드는 한일공업주식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월급 5만원의 보일러 조수. 그는 공무과 직원, 노조 교선부장을 거쳐 노조 분회장에 당선됐다. 단 2표를 제외한 700여 조합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탄생한 직선제 민주노조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사회는 급격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듬해 2월, 회사에서 청소를 하던 김문수는 사복형사에게 붙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죄목은 불온서적 소지와 이적단체 구성 등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그가 끌려간 곳엔 이미 임무현을 비롯한 서울대 출신 70여 명이 있었다. 안 교수는 학생운동의 이념적 리더이긴 했지만 교수 신분인데다, 학생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보고받는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았다. 김문수 지사는 당시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얼마나 맞았는지 49일이 지난 뒤에도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어요.”
다행히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풀려났다. 김 지사와 함께 구속됐던 임무현 현 대주전자 회장의 얘기다.
“그 사건 때 조사관들 사이에서 김문수에 대한 평이 좋았어요. 협조를 해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조사하다 보면 파악되는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죠. 호쾌하고 구김살 없으며, 통 큰 남자답다고요. 풀려난 후, 김문수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노동운동을 더 하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신분이 드러난 이상, 이제부턴 사업을 할 테니까 각자 알아서 잘 살자고 했죠.”
신군부에 짓밟힌 ‘서울의 봄’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정부가 발표한 전국의 정화대상자 190명 중에 김문수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노조 일에서 손떼지 않으면 삼청교육대로 끌고 간다고 해서 그는 사표를 내고 신림동에 대학서점을 열었다. 책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생활하던 그는 구로동 세진전자 노조분회장이던 설난영씨와 결혼에 골인한다. 청첩장을 돌리기는커녕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에서 드레스도 입지 않고 결혼식을 하니, 당국에서 위장결혼을 하는 줄 알고 전경 버스를 대기시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이 오십이 넘은 요즘에야 여자 심리를 조금 알 것 같아요. ‘가정을 책임질 수 없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40세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청혼을 했으니….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결혼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죠.”
19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에 짓밟혔다. 이에 격분한 지식인들이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5월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으로 전국 86명의 교수가 강단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안병직 교수도 시국선언에 참여했으나 가까스로 해직은 피했다.
한편 1984년 해고노동자들이 모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했는데, 김문수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듬해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의 지도위원이 된 그는 ‘서노련신문’을 통해 일간지에서 보도 통제된 ‘국방위 회식사건’과 ‘미군병사의 여교사 추행사건’ 등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1986년 군사독재반대투쟁을 서노련의 주요활동목표로 내걸고, 5·3 직선제 개헌투쟁을 도모했다.
결국 5·3 인천사태 주동자로 지목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당시 서노련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구속되고, 8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받았다가 1988년 10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노동운동 조직사건으로는 최초로 국가보안법과 소요죄를 적용한 서노련사건 재판 때 김문수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어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단결해 우리를 억누르는 권력과 금력에 대항해 싸워 나가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해방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서민대중과 억압하는 자들까지 인간성을 회복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노동운동에 힘써왔습니다. 법정이 사회정의와 진리를 밝히는 곳이라면 우리를 심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고 독재자들을 엄벌해야 마땅합니다’라는 항소이유서를 낭독했거든요. 대단한 용기였어요.”
‘연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
대학시절의 김문수 지사(맨 오른쪽),
안 교수는 1970년대 말, 한국의 자본주의가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경제지표가 점점 좋게 나타났다. 안 교수 자신을 비롯한 사회주의 학자들이 뭔가 잘못 인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일본으로 떠났다. 2년여 일본에서 머물며 러시아, 북한, 미국, 유럽의 여러 학자와 교류한 안 교수는 곧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대세일 거라고 생각을 바꾼다.
“현실을 원망할 게 아니라, 내 시각을 바꿔야 했어요. 특히 소련·중국·북한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사회주의는 전혀 전망이 없다’고 깨달았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니 20세기 후반은 자본주의의 세기였어요. 한국의 힘은 대단해요. 세계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국가 중에 새로이 부상하는 나라가 한국이었어요. 한국과 함께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 신흥공업국이 자본주의를 끌고 갈 국가인데, 이들은 선진국이 수세기에 걸쳐서 축적한 자본과 기술을 토대로 발전하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죠.”
이것이 안 교수가 귀국해서 주창한 ‘중진 자본주의론’의 요체다. 안 교수는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깊이 연구하는 한편, 그동안 잘못 인식한 사회주의에 대해 반성하며 제자들에게 바뀐 자신의 견해를 알렸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른바 ‘사상 전환’을 한 것이다. 안 교수는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예측으로 많은 학생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으로 이끈 것을 참회했다.
“지옥의 불길이 타는 연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을 맛봤어요. 저 혼자만의 잘못이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많은 사람을 잘못 지도했고 그를 바로잡아야 하니까요. 저는 죄인이에요. 좌파의 오류를 교정하고, 신자유주의사상을 수용하는 뉴라이트 운동에 동참한 것도 사상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안 교수는 김문수를 불렀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는,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조위원장까지 한 그가 신화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안 교수에게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제자였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제자
“가장 먼저 김문수를 불렀어요. 저뿐만 아니라, 집사람도 김문수를 아껴요. 성신여고 교사이던 집사람이 김문수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했죠. 막 교도소에서 나온 그에게 ‘한국 자본주의는 보통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창창하다. 우리는 1970년대 말에 자본주의가 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봐라. 점점 더 성장하고 있지 않으냐. 이제 사회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는 망했다. 앞으로 노동자들은 우리 지식인이 노동과 자본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을 이끌어가길 원치 않고, 그들 스스로 지위향상을 해서 독립할 것이다. 그러니 노동운동을 그만두라’고 했어요. 성품이 온순한 김문수는 그저 듣기만 하더니 매우 실망한 기색으로 ‘알겠다’며 갔어요.”
김문수는 안 교수의 사상 전환을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께서 그동안의 우리 시각이 틀렸다면서 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대세라는 거예요. 도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공부하셔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세계관(觀)을 정립하신 것 같았어요. 저같이 현장에서 운동하는 사람과 학자가 인식하는 건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교수님 말씀은 새겨들었죠.”
사실 5·3 인천사태로 2년 넘게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휴머니즘도 상당히 냉정을 찾았다. 사기꾼, 조폭, 살인자 등 웬만한 ‘간 큰 남자’는 다 만나면서, 순진한 생각만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기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안 교수의 사상 전환이 그에게 점점 더 와 닿고,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노동운동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학생운동 선배인 장기표와 함께 안 교수를 찾아갔다. 민중당 창당에 대해 자문하기 위해서였는데, 안 교수가 그에게 간곡하게 당부한 데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이 투쟁 일변도로 치우치지 않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1992년 총선에 민중당 전국구 후보로 출마한다. 하지만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그해 권인숙(현 명지대 교수)씨가 미국 유학을 떠나며 그에게 노동인권회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노동인권회관 소장을 하면서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입학, 마흔셋 늦깎이 대학생으로 바쁘게 지냈다.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
2004년 모습. 안 교수는 김 지사가 3선 의원을 지내는 내내 후원자이자 조언자였다.
“당시엔 김영삼씨가 가장 개혁적이었어요. 노동운동하던 사람을 여럿 불러 모았죠. 김문수에게 ‘앞으로 사회운동은 전망이 없다. 정치를 해라. 정치를 하려면 여당인 신한국당에 바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신한국당에는 서울대 선후배가 많았죠.”
노동운동가에서 제도권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세상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김문수 지사는 그 일을 회상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選) 개헌 반대로 무기정학을 받은 뒤로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하며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지만, 한 번도 제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적 없어요. 항상 고뇌하는 것은 내 육체적 고통이나 가정의 곤궁이 아니라, 저의 행위가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죠. 당선은 제쳐두고 일할 수 있는 제도권 속으로 들어간 것은, 변신이나 부끄러운 게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3선을 하는 동안, 안 교수는 줄곧 후원회에 참석해 힘을 실어줬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은 뒤로는 김 의원에게 “햇볕정책보다 북한 인권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김 지사가 의원 시절, 북한 인권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해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할 때도 그와 안 교수는 여러 차례 토론을 했다. 안 교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말만 갖고는 안 되고, 업적이 있어야 한다’며 출마를 적극 권했다. 안 교수가 넓은 시각과 통찰력으로 조언하면, 그는 더 많은 고민을 더해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목표를 세우고, 동물적 감각으로 돌진한다.
그런 김 지사에 대해 안 교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지사에겐 세 가지 덕목이 있어요. 첫째가 정직이에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둘째, 부지런해요. 어떠한 일이나 직책을 맡으면 한동안 그를 볼 수가 없어요. 잠도 몇 시간 자지 않고 새벽부터 뛰어다녀요. 도지사 취임 후 1년 동안 국내외 이동거리가 6만1598km라는데, 지구 한 바퀴 반을 돈 셈이죠. 셋째는 용기예요. 아무리 어려워도 꺾이지 않아요. 정치가로서,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본 자질이 탄탄한 사람이에요.”
정직, 부지런함, 용기
김 지사가 이런 극찬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안 교수님은 욕심이 없어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속물이 못 돼요. 경제학을 전공하셨기에 허황되지 않고, 거시적인 분석을 통해 정확한 통계를 내요. 늘 큰 틀을 보시고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시죠. 저같이 책 안 읽는 사람은 교수님을 뵙고 오면, 교수님이 던져주신 화두에 대해 고민하느라 밤을 새우죠. 특히 겸허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용기는 정말 훌륭해요. 젊은 날, 교수님이 노동운동을 하라고 조언하셨지만, 저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죠. 결국 각자의 책임이죠. 저도 죄가 많아요. 저 때문에 60여 명의 친구와 선후배가 운동하다 감옥에 가고, 다치고, 심지어 죽기도 했어요. 운동권 출신이 저처럼 성공한 예가 드물죠.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요.”
김문수 지사를 비롯한 여러 제자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노 교수의 인상은 맑았다.
“할 일이 많은데, 다 하지 못해서 한평생 부끄러운 오점이 많지만, 후회되는 것은 없어요. 옳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살았으니까요. 김 지사와는 참으로 끈질긴 유대를 갖고 살아왔어요.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닌, 서로에 대한 인간적 매력 때문이죠. 난 이제 70이 넘었으니 활동을 같이 할 순 없지만, 그의 성장을 계속 지켜볼 생각이에요. 김 지사에게 한 가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경륜인데, 도지사 4년이면 경륜도 구체화할 것이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