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연 회장 한국 떠난 직후 사건 이첩”
- “경찰수뇌부, 사건 이첩 전 피해자 진술조서 확인”
- “광수대 오모 경위, 사건 뺏긴 것 분해 남대문서와 갈등”
- “조폭 결혼식에서 맘보파 두목 오모씨 처음 만나”
- “부장검사 출신 한화 법무실장이 ‘평생 보장’제안”
- 김 회장 “제 아들 해병대 보내면 사람 되겠습니까?”
서울중앙지검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대한 은폐 의혹’ 수사 결과를 발표한 7월13일 오후. 서울 용산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강대원(姜大元·56) 전 서울남대문경찰서 수사과장을 만났다.
“한 기자, 인터뷰합시다!”
강 전 과장은 이 사건을 지척에서 지켜본 실무자로, 사건의 전말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한화에서 ‘평생 먹여살리겠다’는 회유성 제안을 했다” “윗선에서 외압이 들어왔다”는 발언을 했다가 번복해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기도 했다. 강 전 과장은 이번 사건과 관계된 조직폭력배 오모씨와 세 차례 만난 사실이 드러나 대기발령 조치된 뒤 5월 말 사표를 내는 아픔을 겪었다.
7월13일 검찰은 강 전 과장을 직무유기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첩보를 받은 3월부터 4월말 보도가 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사건과 직접 관련된 조직폭력배들을 만나 향응을 제공받고 한화 쪽 회유를 받아들여 사건 수사를 지연시켰다는 혐의다. 검찰은 그가 받은 향응 금액을 ‘125만원’이라고 명시했다. 검찰은 또 강 전 과장이 “퇴직 뒤 평생 부장급 대우를 해주고 둘째아들을 계열사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한화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한화 고문으로 장희곤 전 남대문서장과 홍영기 전 서울청장, 김학배 전 서울청 수사부장 등에게 사건을 잘 처리해달라고 외압을 넣은 최기문 전 경찰청장은 형법상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택순 경찰청장은 사건 발생 이후 유기왕 한화증권 고문과 골프를 친 사실이 확인됐지만 청탁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강 전 과장은 검찰의 이 같은 수사결과를 접하고 펄쩍 뛰었다. 그는 “가해 당사자인 김 회장이 외국에 있었던 상황에서 무슨 조사를 했겠냐”는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지연시켰다”고 한 기간(3월12~4월24일)은 김 회장이 한국에 없었던 시기(3월22일~4월22일)와 거의 일치한다.
강 전 과장은 최근 회고록 ‘형사 25시’를 집필했다. 3년 전 자기 손으로 해결한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을 소설 형식으로 기술했다. 그는 보복폭행 사건 수사 도중 직위해제를 당하고 사표를 쓰는 등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곧 빛을 보게 될 회고록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추슬러 왔다고 한다.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조직폭력배와의 부적절한 만남으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려면 우선 검찰 수사에서 ‘완벽한 무죄’가 나와야 했다.
“청탁을 받은 적도 없고 단돈 10원도 로비를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검찰 수사만 잘 끝나면 복직해서 화성경찰서에 지원해 미제 사건이 된 여성 연쇄살인사건을 맡아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다 물 건너갔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거대한 힘이 이번 사건에 개입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사표를 낼 때 경찰조직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상부의 외압과 한화의 회유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마녀사냥 식으로 나온 마당에 국민에게 수사과정의 전말을 알리고 싶어 인터뷰를 자청했다”고 했다. 강 전 반장과의 인터뷰는 5시간 넘게 진행됐다.
“이 청장이 정말 몰랐다면 직무유기”
▼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고 보는 근거는.
“김 회장이 한국을 떠난 다음날 사건이 이첩됐다. 게다가 첩보보고서는 닷새가 지난 3월28일에야 내 손에 들어왔다. 김 회장 출국 하루 전인 21일에는 서울청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홍영기 전 서울청장, 수사부장, 형사과장 등이 모여 이 사건을 남대문서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의 계획대로 사건이 진행됐다고밖에 볼 수 없다. 검찰은 왜 이런 부분을 수사하지 않는가.”
그는 수사팀에 첩보가 전해지기 전에 모든 내사 보고가 경찰 수뇌부로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강 전 과장은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의 실무자로 사건의 전말을 아는 몇 안되는 이다.
그는 이택순 경찰청장이 “언론보도 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보고받은 바 없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정말 몰랐다면 심각한 직무유기 아닌가”라고 쏘아붙였다.
검찰은 강 전 과장이 수사 도중 보복폭행 관련자 오씨를 수차례 만난 것에 주목한다. 로비와 청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오씨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처음 만난 건 4월5일이다. 그날 오후 4시 서울 로얄호텔에서 삼선교 건달 박모(40)씨의 결혼식이 있었다. 전국에서 500여 명의 조폭이 모인다는 첩보였다. 거기에서 명동파 홍모씨로부터 오씨를 소개받았다. 그날 저녁 홍씨의 주선으로 명동 유네스코회관 뒤편에서 보신탕을 먹었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 오씨가 한화측과 가깝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언제인가.
“바로 그날이다. 식사를 끝내고 남대문서로 돌아가는데, 운전을 하던 남대문서 강력2팀장이 ‘오씨가 김 회장의 집사 같은 사람이고 이번 사건도 잘 안다는데 한번 따로 만나보실래요?’라고 말을 꺼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해서 4월9일 내 방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오씨는 내게 ‘김 회장과도 바로 연결이 가능하다’고 했다. 대화 도중 오씨 입에서 폭행현장에 있었던 한화건설 소속 경호과장 진모씨와 경호업체 직원 5명의 이름이 나왔다. 오씨는 ‘보안유지를 부탁한다. 김 회장이 들어오면 내가 힘 많이 썼다고 말이라도 좀 해달라’고 했고, 나는 ‘절대 로비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때까지도 오씨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들 취직 회유에 호통쳤다”
▼ 오씨를 몇 번이나 만났나.
“4월5일과 9일에 만났고, 11일에도 약속이 잡혔다. 4월5일 만났을 때 홍씨가 밥을 산 게 마음에 걸려 내가 밥을 살 생각이었다. 장소는 강남 프리마호텔 부근에 있는 S고깃집이었다. 그런데 오씨는 ‘바쁘다’며 밥만 먹고 자리를 떴다. 2차로 홍씨, 이 팀장(강력2팀장)을 데리고 리치몬드 호텔에 있는 주점으로 갔다. 그날 술값 200만원을 내가 냈다. 이 주점은 용산 초등학생 사건 때 문제가 됐던 바로 그 업소다(그는 용산 초등학생 성추행 살해사건을 해결한 뒤 이 업소에서 자축연을 열었는데, 그날이 사망한 초등학생의 장례식 전날인 것으로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 오씨의 로비가 있었나.
“내 아들 얘기가 오간 것은 내가 휴가를 다녀온 다음날인 4월19일이다. 그날 이 팀장이 오씨를 내 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씨가 ‘삼성 용역업체에 다니는 아들 있다면서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당신 내 뒷조사하는 거냐. 누가 말해줬냐’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사건이 종결되면 아들 취직은 걱정하지 마라. 반장님도 한화에 부장급으로 초빙해 모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내가 유영철 잡은 사람이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잘되면 내가 에쿠스 타고 다닐 텐데, 그때는 내가 당신을 도와주마. 다시 한번 그런 소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검찰은 30년을 경찰로 산 내 말은 안 믿고 조폭 말만 믿고 있다.”
검찰은 남대문서 수사팀이 6개의 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혹은 보고서 작성 지연)했다고 발표했다. 더욱이 검찰은 “남대문서 수사팀은 한화측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김승연 회장이 관련 없는 것처럼 비서실 직원을 조사하고 관련 수사보고서를 작성하여 김 회장이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사실관계를 왜곡하려고 한 사실이 확인되어…”라고 밝혔다. 강 전 과장은 이를 강하게 반박했다.
“내가 휴가를 간 사이 이 팀장이 한화 경호과장 진모씨를 조사했다. 그래서 ‘왜 피해자들을 먼저 조사하지 않았냐’고 이 팀장을 질타했다. 이 팀장은 ‘우선 어떻게 얘기하는지 들어보려고 1차 조사를 했다. 그리고 이미 광수대에서 피해자 조서를 받았으니 그걸 받아오면 된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고 봤다. 게다가 당시는 광수대 오 경위가 피해자들의 입을 다 막은 상황이라 피해자 조사가 될 수도 없었다. 변명 같지만 수사가 진행되다 보면 보고서 작성에는 사실 좀 소홀해진다. 검찰은 그런 걸 가지고 ‘수사 축소’라고 주장한다.”
강 전 과장은 4월19일 오후 남대문서 수사팀 김모 형사를 오 경위에게 보내 피해자 진술서를 받아오라고 지시했으나 오 경위가 진술조서를 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오 경위는 사건 직후 피해자들을 북창동의 한 안마시술소에 감금한 채 수사해 진술서를 받아냈다. 그렇게 고생해서 풀어가던 사건이 남대문서로 넘어가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에게 남대문서에 협조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북창동 업소 대부라는 S클럽 사장(변모씨)한테까지 찾아가 ‘오 경위를 좀 설득해달라’고 했겠나.”
강 전 과장은 “최기문 전 청장이 그 사건을 몰랐다면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강 전 반장은 김승연 회장 사건의 수사 책임자로 수사-로비-청탁의 중심에 있었다.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했음에도 사건의 실체가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라 사건의 중심인물인 그의 얘기를 더 들어봤다. 물론 그의 주장이 100%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해봤다.
남대문서장 “기자들은 알아서 하겠다”
보복폭행이 있은 지 4일 후인 3월12일 오전, 강 과장은 평소처럼 오전 6시30분쯤 남대문서에 출근했다.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7시20분부터 휘하 16개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9시쯤 “명동에서 지난 밤에만 사무실이 세 군데가 털렸다”는 강력3팀의 사건 현장으로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섯다.
10시40분경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발신번호를 보니 서울경찰청 수사과장실 전화였다. “혹시 한화 김승연 회장 폭행사건 알고 계세요?” 그는 처음 듣는 얘기라 재차 물었다. 확인한 뒤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은 그는 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S클럽으로 가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11시30분쯤 장희곤 남대문서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혹시 한화그룹 비서실로 형사 보냈어요? 빨리 철수하라고 하세요.”
이 팀장에게 철수를 지시한 후 12시30분경 남대문서로 돌아온 즉시 서장을 만났다. 장 서장은 대뜸 “최기문 전 경찰청장이 (한화) 고문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또 “고소장도 없는 사건인데 뭘 조사를 하느냐. 고소장 들어오면 그때 가서 알아보든지 해라”고 했다.
북창동을 다녀온 이 팀장이 2시경 “김승연 회장이 사람을 좀 때렸는데, 같이 폭탄주 마시고 술값 100만원 내고 해결이 됐다고 하네요”라고 보고했다. S클럽 사장 김모씨의 얘기였다. 그 얘기를 그대로 장 서장에게 전했더니 “알고 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강 과장은 뭔가 좀 찜찜했다. 무엇보다 기자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기자가 전화까지 해서 물어본 사건인데….’ 다시 한번 장 서장을 찾아갔다. 장 서장은 “기자들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3월23일. 한기민 서울청 형사과장이 강 과장에게 전화를 했다. 한 과장은 16일에도 서울청장의 지시라며 수사 상황을 묻는 전화를 한 적이 있다. 한 과장은 “위의 지시로 (김승연 보복폭행) 사건을 남대문서로 내립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라고 전했다.
강 과장은 기분이 좋았다. 대기업 총수와 관련된 사건이라면 잘 해결할 경우 진급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장 서장에게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서장은 펄쩍 뛰었다. “절대로 (그 사건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3월28일 오전 한 과장이 또 전화를 했다. “오늘 오후에 첩보 내려갑니다.” 즉시 장 서장에게 보고했다. 장 서장은 이미 알고 있는 듯 “수사 기한은 5월28일까지 두 달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조사해보세요”라고 했다.
광수대와 남대문서의 갈등
곧바로 이 팀장에게 “한화측과 피해자들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29일, 이 팀장이 “김 회장이 22일 한국을 떠났다”고 보고했다. ‘날 골탕 먹이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핵심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는 진척되지 못했다. 김 회장과 직접 연락이 가능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김 회장의 비서실장에게도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와병 중’이라며 조사를 거부했다. 다시 한화그룹 성모 부회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수차례의 참고인 조사요구 끝에 성 부회장은 “4월2일 7시쯤 시내 호텔에서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그러나 강 과장은 경찰서를 고집했다. 대신 기자들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한화그룹 인사로는 처음 남대문서에 나온 성 부회장은 이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강 과장은 “김 회장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 들어오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성 부회장은 “나는 그런 말 못한다”며 꼬리를 내렸다. 다만 4월 하순에는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4월24일, 사건이 보도되자 남대문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조용한 수사’는 물 건너갔다. 강 과장은 내사 단계에서 인적사항이 확인된 16명을 한꺼번에 소환했다. 보도가 나간 지 사흘째인 4월27일에는 남대문서에서 수사대책회의도 열렸다. 수사팀 전면 확대 회의였다.
그런데 한기민 서울청 형사과장 주재로 열린 이 회의에 낯선 인물이 들어왔다. 남모 광수대장이었다. 그는 휘하 2개 수사팀을 남대문서에 파견한 상태였다. 그는 회의 내내 “최초 첩보를 올린 광수대가 이 사건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책임자인 한 과장의 태도가 이상했다. 상부의 지시로 결정된 사항에 공식적인 반기를 든 남 대장에게 한 과장은 아무 말도 못했다. 화가 치민 강 과장은 “과장님이 남 대장 부하입니까, 왜 아무 말도 못하세요!”
강 전 과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광수대가 맡았어야 할 사건이 한화측(최기문 전 청장)의 외압으로 남대문서로 넘어온 거죠. 최 전 청장 처지에서는 서장이 자기 고등학교 후배에다 개인적인 친분도 있는 남대문서가 통제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했겠죠. 남 대장의 행동도 이해는 갑니다. 그래도 수사 진행 중에 그러면 안 되죠. 한 과장도 자기가 잘못한 게 있으니 아무 말도 못한 것 아닙니까.”
모든 게 해결됐다고 생각한 것일까. 3월22일 몰래 출국했던 김승연 회장은 4월22일 귀국했다. 김 회장의 소환이 시급했다. 4월27일 강 과장은 한화그룹 법무실에 전화를 걸어 “28일 11시까지 들어오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한화측은 “못한다. 연기해달라”고 사정했다. 기다리다 지친 강 과장은 28일 직접 한화그룹 본사로 찾아가 “오늘 오후 4시까지 남대문서로 출두하지 않으면 긴급체포할 수 있다”고 했다. 한화 법무실 관계자들은 깜짝 놀라며 “그게 가능하냐”고 되물었고, 이에 강 과장은 “불법체포든, 직권남용이든 내가 다 책임진다. 정말 긴급체포할 테니 그렇게들 알라”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김 회장은 다음날 소환에 응했다.
4월29일 오후 4시경 남대문서로 출두한 김승연 회장에 대한 수사는 1층에 있는 진술녹화실에서 이뤄졌다. 김 회장은 간단히 적은 진술서를 한 장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 진술서에는 북창동 폭행에 대한 부분만 있을 뿐 첩보와 피해자 진술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청계산 폭행 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김 회장 아들 출국 놓친 건 실수”
김 회장이 소환되자 광수대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자신들이 수사를 맡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강 과장과 광수대측 간에 합의가 이뤄졌다. 강 과장측이 먼저 조사하되 청계산 폭행 부분에 대해 김 회장의 시인을 받지 못하면 그때는 광역수사대에 수사를 넘긴다는 것이었다. 강 과장은 김 회장을 수사하면서 “청계산 부분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면 광수대에서 수사를 맡게 됩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가 힘들어집니다”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청계산 폭행사건을 인정하지 않았고, 수사는 저녁 무렵 광수대로 넘어갔다.
처음 첩보를 올린 광수대 오 경위의 수사 방식은 강 과장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 경위는 “똑바로 앉으세요. 왜 먼 산만 쳐다봅니까”와 같은 다소 강압적인 말을 서슴없이 해 김 회장을 괴롭혔다. 그러나 새벽 4시까지 계속된 조사에도 청계산 사건에 대한 진술은 받지 못했다.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는 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 회장 아들 친구의 신원 파악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사건 초기 수사팀은 김 회장 아들 동원씨를 ‘절반의 피해자’로 여겨 그의 행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4월25일 동원씨가 중국으로 출국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강 과장은 “이 부분은 명백히 수사팀의 실수였다”고 털어놨다. 동원씨가 출국한 이후 강 과장은 수차례에 걸쳐 한화측에 동원씨의 귀국을 종용했다.
사건이 있었던 강남구 주점, 청계산, 북창동 등 모든 곳에는 동원씨의 친구 한 명이 동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때까지 수사팀은 그의 인적사항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 과장은 4월30일 동원씨의 귀국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수사팀을 급파해 “(친구의 연락처가 있을) 휴대전화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귀국한 동원씨에게 휴대전화가 있을 리 없었다. 그날 밤 11시 남대문서에 들어온 그는 “북창동에는 갔지만 청계산에는 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해서든 친구의 인적사항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변호사 입회하에 진행되는 조사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강 과장이 기지를 발휘했다.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너 눈 찢어진 날 청담동에 친구랑 있었잖아. 걔 친한 친구냐? 초등학교 친구? 아니면 고등학교 친구?”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동원씨의 입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 나왔다.
“압구정초등학교 친구요. OO이, 성은 이씨고요.”
수사는 여기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직 부장검사의 ‘평생 보장’ 제안
청계산 폭행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김 회장의 7개 혐의 중 가장 무거운 납치, 감금, 폭행이 모두 청계산에서 벌어졌다. 북창동에서도 폭행은 있었지만 화해하고 술을 같이 마신 정황이 있어 큰 죄가 될 것은 아니었다. 김 회장과 한화그룹측은 이것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강 과장이 한화측으로부터 ‘평생 보장’ 제안을 받은 것은 이때였다. 동원씨의 입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친구의 이름이 나온 직후 한화측 관계자가 조용히 김 회장과 통화를 시도했다. 그러고는 곧장 강 과장에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수사과장님의 평생을 보장할 테니 이번 사건이 잘 좀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랍니다.”
기가 막혔다. 한참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 그것도 경찰서 조사실 앞에서 이런 제안을 받다니. 게다가 강 전 반장에게 제안해온 사람은 부장검사 출신의 한화그룹 법무실장이었다.
“부장검사 출신의 법조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검사 출신이시라 제가 참는 겁니다.”
5월2일에는 관련자들의 통화 내역을 확인하던 중 조폭 오씨가 사건 현장에 있었음이 확인됐다. 김모 감사의 통화기록에서 이들의 통화 내역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강 과장은 고민 끝에 장 서장에게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보고를 받은 장 서장은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됩니까. 우리만 떳떳하면 되죠”라고 말해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5월11일 자정 무렵 김 회장은 남대문서 유치장에 갇혔다. 그는 가족들과의 면회도 거부했다. “이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 과장은 이튿날 유치장으로 가 김 회장을 만났다. “화상면회라도 하세요. 가족들이 걱정합니다”라고 달랬다. 그런데 김 회장 자택엔 화상카메라가 달린 컴퓨터가 없었다. 강 과장은 비서실로 연락해 카메라 설치를 ‘지시’했다.
“김 회장이 가족들과 대화하면서 울먹울먹하는데 나도 가슴이 찡했다. ‘이 사건으로 회장님은 많은 걸 잃었지만 하나는 분명히 얻었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고생하는 걸 봤을 테니 아들은 앞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것이다’라고 했더니 김 회장이 불쑥 ‘군대 어디 갔다 오셨냐’고 물었다. 그래서 ‘해병대 갔다 왔다’고 하니 ‘제 아들도 해병대 보낼까요? 그러면 사람 되겠습니까’라고 묻더라.”
사건의 최초 첩보보고서에 등장한 조폭 25명은 사실과 달랐다고 한다. 강 과장은 “조폭다운 조폭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경찰에서 관리할 정도로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조폭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검찰에서는 무슨 맘보파니, 로얄박스파니, 고흥파니 하는 건달들이 이번 사건에 투입됐다고 하는데, 다 실체가 없는 애들이다. 고향이 고흥이라 고흥파라고 했다는데, 로얄박스파는 뭔지도 모르겠다. 한화측 관련자를 제외하면 동원된 인원은 PC방 종업원을 포함해 10명 정도밖에 안 됐다.”
강 과장은 인터뷰 내내 이번 사건에 관한 한 경찰, 검찰, 언론이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경찰의 수사보다 언론 취재가 더 빨랐던 것(강 전 반장과 오씨의 술자리 보도 등)도 분명 누군가가 계속 첩보를 흘렸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는 외압의 실체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검찰 수사에 줄곧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최근 탈고한 회고록 ‘형사 25시’에는 원래 유영철 사건만 담을 예정이었으나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보복폭행 사건 수사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을 회고록에 담을 작정이다. 올여름이 가기 전 세상에 내놓을 회고록이 ‘30년 경찰’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