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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최대한의 민주주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사상하는 세계’를…

  • 김영천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kaone@kaone.co.kr

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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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단주 유림. 독립운동가, 사상가, 임시정부 국무위원, 반독재 민주화 투사….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이름은 많지만,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명칭은 전 인류의 자유와 평등, 정의를 꿈꾼 ‘실천적 아나키스트’다. 국수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함께 배격하고 진정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던 실천적 지식인으로, 국내 최초의 전국 아나키즘 조직과 세계 최초의 합법적 아나키즘 정당인 ‘독립노농당’을 만든 그의 거대했으나 고독했던 생애를 조명했다.
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1945년 11월23일 서울에 모인 임정 요인들. 원 안이 유림 선생이다.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君在大韓重)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君去大韓空).”

1961년 4월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거행된 단주(旦洲) 유림(柳林·1898~1961) 선생 사회장 당시,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이자 성균관 초대관장인 심산 김창숙이 한 추도사 중 일부다. 시인 구상은 유림 선생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적광(寂光)의 진혼(鎭魂)’이란 글을 써 애도했다.

‘북극성과도 같은 고절(高節)이었다. 단주, 당신이 지녔던 그 인류적 이상이나 민족적인 소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류해방을 향한 열정이요, 의지요,
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혼신이었다. 이러한 고매 정신에 뒤따르는 인격적 결백이 오늘까지의 당신의 생애를 신산으로써 결정지었고, 이제 우리에게도 비통과 억울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세계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단주 유림. 독립운동가, 사상가,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반독재 민주화 투사였던 그의 사상에 대한 학술 연구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1993년 독립기념관에 유림의 어록비가 제막된 데 이어 2001년 4월에 국가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유림을 선정했고, 2001년 4월과 2005년 11월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에 대한 아나키즘 학술대회가 열렸다.

2006년 8월 독립기념관이 주최한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특별기획전’에선 유림의 유품 전시회가 있기도 했다. 오는 9월14일에는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대회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의 공동 주최로 열리며 유림의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왜 유림이고, 아나키즘인가

아나키즘은 식민지시대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상적 조류였으나 민족주의, 공산주의에 비해 오랫동안 잊혀왔던 정치사상이다. 그러나 이제 지역분쟁, 환경파괴 등에 대한 전 지구 단위의 공동 대처가 절실하고 이를 재해석해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이념이 필요하게 됐다. 공산권의 붕괴와 더불어 정보의 공유와 개방, 전자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 등은 아나키즘이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아나키즘이 제시하는 자율질서와 자치, 공동연대, 상호부조, 자유연합, 인본적 가치 추구 등은 인류가 품어야 할 이상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있어왔다. 국가의 강제 권력과 각 개인의 자주성이 부딪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의 지배로부터 각 개인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또 한반도의 현실에서 실천적인 모습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유림은 이런 물음에 대한 치열하고 진지한 고민을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 가능한 이상이자 대안으로 파악하고, 그 방법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로 인해 아나키즘은 현실에서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아나키즘의 각기 다른 물줄기들이 경남 안의에 모아졌다. 그간에 쌓아왔던 한국 아나키즘의 역량이 모두 결집된 것이다. 당시 언론은 1946년 4월20일부터 23일까지 있었던 전국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에 대해 ‘해외와 38선 이북에서 온 이들을 포함해 600여 명 이상의 아나키스트 참가가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이 대회는 유림이 주도한 명실상부한 아나키스트들의 전국 모임이었다. 이 대회의 결과물로, 1946년 7월7일 서울시내 연무관에서 1000여 명의 당원이 참가한 가운데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유림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아나키즘 정당 ‘독립노농당’이 창당됐다.

공개된 합법적 대중공간에서 세계 아나키즘 역사상 최초의 아나키즘 이념정당이 탄생한 것. 유림이 전체 아나키즘 세력을 결집해 창당한 독립노농당은 1961년 4월1일 유림의 사망과 곧이어 일어난 5·16군사정변으로 강제해산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나키즘의 이름을 가진 여러 물줄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인 곳이 유림과 독립노농당이라는 호수였다. 그러나 그 호수는 유림의 사망과 함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다.

이후 1990년 4월6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독립노농당의 재건’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독립노농당 강제해산 당시 핵심 간부들이었던 하기락, 정인식, 유영봉, 주경희 등이 백발이 성성한 채 ‘사회당’을 창당 발기했다. 사회당은 하기락이 위원장이었고 정인식과 유영봉이 조직과 당무를 맡았으며, 유림 사후에 태어나 새롭게 아나키즘의 싹을 틔우던 일군의 20대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현재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와 한국자주인연맹, 한국정치사상연구소에서 아나키즘 운동의 실천과 이론 연구를 하며 한국아나키즘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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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천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kaone@kao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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