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단어는 의미가 무척 풍부하다. 다인(茶人)들은 찻잎을 덖어서 잎의 푸른 기운을 뽑아내는 작업을 일컬을 때 쓰기도 한다. 푸른빛을 빼내는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젊은이들도 방자한 그 푸른빛을 뽑아내야 어른이 되고, 청바지도 색이 좀 바래야 더 멋이 난다. 우리 일상에도 살청은 군데군데 숨어 있다. 여름의 녹엽도 언젠가는 태양빛에 살청되어 아름다운 탈색의 과정을 밟는다. 그때 찬란한 단풍빛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살청은 예사로운 말이 아닌 것 같다.
뭔가를 써서 기록하는 것도 살청이다. 종이에 글을 쓰기 이전에 대나무를 잘라 거기에 글을 남겼는데, 그때 대나무의 푸른 기운을 죽이는 것도 살청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것도 일종의 살청 같다. 그런데 이 푸른 기운이 유독 남아도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성석제(成碩濟·47)다. 그의 글이 덖지 않은 찻잎처럼 떫다는 게 아니다. 아주 잘 덖어 좋은 차를 우려내는 데도, 사람만은 푸르고 싱싱하다는 이야기다. 살아서 꿈틀거려 분명 깊은 살청의 세계를 거쳤을 그의 글들은 푸르게 빛나고 있다.
“매이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해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주앉은 자리에서 어린 시절의 성석제를 상상했다. 그는 무척 개구쟁이였을 것이다. 똑똑했을 것이다. 그리고 잘 웃었을 것이다.
그는 커피를 주문하고, 휴대전화로 뭔가를 똑딱거리면서 “야 세상 참 좋아졌네” 라는 말을 한다. 신기한 세상, 놀라운 세상이라는 말을 하면서 오늘 처음 휴대전화로 송금을 했다고 했다. 2007년 6월26일 오후 4시경, 그는 휴대전화로 처음 송금했다는 것이다. 모바일폰 뒤에 칩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운로드해서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다가 문득 “왜 작가생활을 하느냐”고 물었다. 뭐든 하나만 물어보면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모바일폰과 노트북의 뚜껑을 닫고서는 말했다. 예상대로 나는 줄곧 듣기만 했고, 그는 재미나게 이야기했다.
“체질적으로 매이는 걸 싫어해요.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우리들은 보통 성장기에 꽁꽁 묶여 있잖아요. 그걸 벗어나고 싶어 방황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다 자라서도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은 자유로우니까.”
그는 소위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되는 게 두려워 직장을 나온 사람이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정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두렵다니, 그것은 편안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탐험가처럼 세상이라는 거친 산정을 향해 암벽 등반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직장을 관두는 데도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 사표를 내자 동료들이 한번 다시 생각하라면서 술을 사주는 것이었다. 재미있게 술을 마시고 다시 근무하다 또 사표를 내니까 또 술을 사줬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근무하다 또 사표를 내니까 그때는 모두들 그만두라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그가 해준 이야기다.
굳이 작가가 되려고 사표를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단 퇴직금으로 1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다음 문제는 그때 생각하자는 식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내와 약속한 월급 수준의 돈은 매달 통장에 입금했다. 아니, 직급이 올라가듯이 그 액수도 조금씩 많아졌으니 금상첨화다. 생활이 곤궁하게 되어 누추해졌다면 아마 다른 일을 재미있게 했을 것이다.
성석제는 1986년 문학사상에 시 ‘유리 닦는 사람’이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처구니가 산다’라는 책을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현재까지 그는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노래’, 장편소설 ‘아름다운 날들’ ‘순정’ ‘인간의 힘’, 산문집 ‘소풍’ 등 다수의 책으로 확실한 고정 독자를 확보한 전업 작가다. 그가 최근에 낸 책은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라는 산문집이다.
이 책을 편집한 편집자는 소설가로서 성석제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짧은 글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성석제 소설의 흐름은 지루하지 않다. 우선 자신이 재미없는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의 장편소설 역시 자잘한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줄기를 이루는 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홍명희의 ‘임꺽정’식이랄까, 처음부터 거대한 흐름의 지도를 그리는 대작과는 거리가 먼 작법이다. 톨스토이의 소설이랄지, 채만식의 ‘삼대’처럼 오래 묵어 깊은 작품이 주는 어떤 의미의 ‘지루함’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