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호

교육학자의 체험적 ‘공부 잘하기’ 조언

목적 찾기, 스승 품기, 오거서(五車書), 그리고 여행

  • 백순근 서울대 교수·교육학 dr100@snu.ac.kr

    입력2007-08-08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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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지표가 있는 이들은 인생을 성실하게 꾸려 나간다.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주변 모든 것이 선생님이다. 목표와 호기심은 이렇듯 삶을 풍부하게 하는 소금이다. 공부도 인생과 다를 게 없다. 목표와 호기심이 있으면 공부가 즐거워진다.
    교육학자의 체험적 ‘공부 잘하기’ 조언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란 인생을 자유롭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사는 방법과 같다고 생각한다. ‘공부 잘하는 방법’이라는 원고 주제를 받아들고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독자가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해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지천으로 깔려 있어 이미 모든 이가 정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학과 공부 잘하는 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공부의 목적을 찾아라

    공부를 잘하려면 공부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보통 그 이유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삶의 의미를 찾는 범위로 확대된다. 학생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아마 “공부해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일해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내 고향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에 속하는 산업단지가 된 경상북도 달성군 낙동강변의 한적하고 조그마한 농촌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서 호롱불 신세를 면한 ‘깡촌’이었다. 우리집은 동네에서 부유한 편이었지만 농사일이 많아 나는 어린 나이에도 종종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특히 모내기나 추수철에는 학교에 가는 대신 농사일을 도와야 할 때도 많았다. 농번기에는 학교에서도 집안일을 도우라고 사나흘씩 공식적으로 휴교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은 농사일이었다. 특히 TV가 들어와 안락하고 화려한 도시 생활의 일면을 알게 된 뒤부터는 농사일이 더욱 싫어졌다. 그토록 싫은 농사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님은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특별히 바쁜 경우를 제외하고는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머슴이나 인부를 사서 일을 시키더라도 놀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게다가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올 때는 용돈을 두둑이 주시며 무슨 일을 하든 자유롭게 놔두셨다. 그야말로 공부만 잘하면 자유와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나에게 있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가장 싫은 농사일을 피할 수 있고 자유를 얻는 확실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내 가슴속에 품은 예쁜 영혼의 사진 두 장이 있다. 어린 시절 마음에 새긴 장면이지만 하도 예뻐 요즘에도 이따금 명상할 때 꺼내보는 소중한 사진이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평범했다. 봄에는 살구꽃이 피고, 여름에는 참외와 수박이 풍성하고, 가을에는 사과와 감이 영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그런 세상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형이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앞산 언덕에서 놀고 있던 나를 데리러 왔다. 귀가 길에 큰형이 서쪽 하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순근아, 저 노을이 어떻게 보이니?”라고 물었다. 항상 봐오던 저녁노을이지만 특별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냥 저녁노을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큰형이 “똑같은 저녁노을이지만 어떤 사람은 저 모습을 ‘장미꽃처럼 붉은 저녁노을’이라고 했단다”라고 했다. 그 순간 ‘모두가 보는 저녁노을이라도 다르게 보는 눈이 있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낙동강의 구불구불한 물줄기 너머 높게 솟은 가야산의 능선 뒤로 넘어가는 붉은 저녁해와 ‘장미꽃처럼 붉은 저녁노을’이 하늘에 수놓인 아름다운 장면을 영혼의 사진으로 간직하게 됐다.

    잠시 후 마을 한가운데 높이 솟은 교회의 종탑에서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큰형은 내게 다시 물었다. “순근아, 저 저녁 종소리는 어떻게 들리니?” 매일 듣던 저녁 종소리였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큰형은 그런 내게 “똑같은 저녁 종소리이지만 어떤 사람은 저 소리를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했단다”라고 했다.

    모두가 듣는 저녁 종소리라도 다르게 듣는 귀가 있었던 것이다. 교회 본당의 저녁노을이 붉게 비친 유리창과 높은 종탑, 그리고 하늘 높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엄한 장면은 내게 남겨진 또 다른 영혼의 사진이다.

    이 두 장면은 세상에는 나와 다른 눈과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그날 저녁 나는 큰형에게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책을 선물로 받았고, 어린 나이에도 몹시 재미있어서 밤을 꼬박 새워 다 읽었다.

    그 책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을 갖게 해줬다. 비록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만, 그때부터 나에게 공부는 자유와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 다양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방편,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가슴에 존경하는 스승을 품어라

    교육학자의 체험적 ‘공부 잘하기’ 조언

    스스로 문답을 기록한 나만의 노트는 훌륭한 참고서 구실을 한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다. 나를 이끌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속에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모시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인 김기만 선생님은 매우 좋은 분이셨다. 대구에서 출퇴근하던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이분은 시골 동네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가르치셨다. 저녁에는 중학교에 진학할 선배들을 위해 무료로 학습지도를 해주시곤 했다. 도회지 향기를 풍기던 그 선생님은 나에게 일종의 우상이자 꿈이었다.

    어느날, 부반장이던 나는 반장과 함께 2학기 교과서를 나눠주시는 선생님을 돕고 있었다. 아이들은 노끈으로 묶어 구겨진 맨 위의 책과 맨 아래의 책을 갖지 않으려고 떼를 썼다. 결국 구겨진 교과서는 모두 반장과 부반장의 차지가 됐다.

    나는 구겨진 책이라도 편평한 곳에 두고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으면 나중에 곧게 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교과서를 다 나눠준 뒤 선생님은 칠판에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이지”라고 크게 쓰셨다.

    그리고 학생들을 둘러보시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 싫어하는 구겨진 책을 반장과 부반장이 기꺼이 받아가는 태도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앞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바란다”고 하시면서 크게 칭찬하셨다. 기대하지 않았던 칭찬에 기분도 좋았지만 존경하던 선생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이다’라는 말은 내 삶의 지표가 됐다.

    요즘에도 나는 자제력과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그 구절을 자주 읊조린다. 그리고 살면서 자제력과 각성이 필요할 때면 비슷한 의미의 구절들을 만들어 조용히 읊조렸다. ‘남자면 다 남자냐, 남자다운 남자가 남자지’ ‘학생이면 다 학생이냐, 학생다운 학생이 학생이지’ ‘군인이면 다 군인이냐, 군인다운 군인이 군인이지’ ‘박사면 다 박사냐, 박사다운 박사가 박사지’ ‘연구원이면 다 연구원이냐, 연구원다운 연구원이 연구원이지’ ‘교수면 다 교수냐, 교수다운 교수가 교수지’ ‘한국인이면 다 한국인이냐, 한국인다운 한국인이 한국인이지’….

    고등학교 1학년 국어를 담당하신 강흥일 선생님은 첫 수업시간에 지나가는 말처럼 “다음 주 이 시간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모두 외워라. 숙제다”라고 하셨다. 아무도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 많은 시를 외우는 것도 힘든 일이거니와, 교과서의 시를 죄다 외우는 것이 특별히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곰곰이 생각했다. 처음에는 모든 시를 외우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필요 없는 일을 시킬 리 없다는 믿음에 필사적으로 시를 외웠다. 나를 위한 숙제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인지 며칠 만에 수십 편의 시를 다 욀 수 있었다. 선생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같다.

    1주일이 지나 돌아온 국어 수업시간. 강 선생님은 숙제검사를 하겠다며 학생 하나하나에게 시를 외웠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아예 한 편도 못 외웠고, 잘 하면 겨우 한 편 정도 외우는 수준이었다. 내가 교과서에 나오는 수십 편의 시를 모두 외자,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 자신도 매우 놀라시는 듯했다.

    강 선생님은 “다 외우는 학생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외우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낸 숙제였다”고 하셨다. 아울러 오랜 교사생활을 하면서 같은 숙제를 내줬지만 실제로 시를 다 외운 학생은 처음이라며 흐뭇해하셨다.

    그날 이후 국어에 대한 나의 흥미는 날로 커졌고, 스스로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자질을 갖췄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요즘에도 나는 가끔 시를 읽는다. 그리고 그 시절에 외웠던 시 대부분을 지금도 외고 있다. 밤하늘에 조각구름들이 밝은 달을 비켜 지나갈 때면, 박목월 시인의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읊조리고, 장마철에 어쩌다 파란 하늘이라도 보일 때면, 한용운 시인의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를 외며, 국화꽃 축제에 갈 때면 서정주 시인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를 읊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세계 속에서 함께 거닐고 있는 듯한 일체감을 느낀다.

    넓은 시야 갖기

    대학 시절 이영덕 선생님이 지도교수님이었다(훗날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분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 개인 면담을 신청한 적이 있다. 캠퍼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군사정권 반대 데모가 일어났다.

    그때 독일로 이민을 떠난 지인으로부터 독일 유학 제안을 받았다. 학비·생활비 등 경제적인 부담을 모두 책임지겠으니 와서 공부만 하라는, 당시로서는 환상적인 제안이었다. 대학 1학년 때 겪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서 독일 유학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연구실로 찾아간 나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한 뒤 선생님의 흔쾌한 허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이 교수님은 “독일 유학은 매우 좋은 기회다. 하지만 대학원 석사를 마친 뒤에 네가 원하면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때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사회적인 지도자가 되는 데 별문제가 없었지만, 너희 시대에는 우리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진 다음, 필요하다면 미국이나 유럽을 두루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 지향적인 유학이 돼야 한다는 것과,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셨다.

    교육학자의 체험적 ‘공부 잘하기’ 조언

    책을 많이 읽고 내용을 나름의 논리에 따라 정리하라.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독일 유학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육군 사병으로 최전방에서 군복무도 마쳤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석사학위를 마친 다음 미국 버클리대로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날 때 선생님은 내게 “항상 개방된 마음으로 전세계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큰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21세기를 흔히 세계화 시대라고 한다. 이미 20여 년 전 세계화 시대가 올 것을 인식한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나는 남보다 그만큼 앞서 세계화 시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

    다독(多讀) 앞에 장사 없다

    공부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는 한계가 있지만, 책을 통한 사회문화적 진화에는 한계가 없다. 책은 많이 읽을수록 유익할 뿐 아니라, 읽은 책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습관은 미래를 윤택하게 한다. 책은 청탁(淸濁)이 없다. 좋고 나쁜 것 혹은 유익하거나 무익한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 탓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시골에서 서울 신림동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됐다. 당시 교과서말고는 읽을거리가 없던 시골에서 상경한 내게 동네 골목길의 만화방은 낙원이었다. 어떤 때는 만화방끼리 경쟁하느라 ‘10원에 하루 종일’이라는 문구를 내걸기도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밥도 먹지 않고 만화 삼매경에 빠져 살았다. 몇 달에 걸쳐 주변 만화방에 있는 만화들을 모조리 섭렵했다. 중학교 2학년 말 즈음에는 만화책의 작가 이름이나 표지만 봐도 내용을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만화 도사가 됐다. 읽지 않은 만화가 거의 없게 되자 만화방에 갈 일이 줄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화방에 가서 신간 만화만 봤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신간 만화도 이야기의 전개나 내용이 나의 예측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만화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시들해졌다.

    중학교 3학년부터는 만화보다 책이 좋아졌다. 학교 도서실에는 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시립 도서관에 가서 흔히 이야기하는 양서(良書)를 읽기 시작했다. 유명한 책 대부분은 만화로 만들어져 있었던 데다, 만화방에서 줄거리를 이미 다 파악한 뒤라 책 내용을 모두 암기하다시피 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예비고사, 본고사 등 대입 준비를 하면서 대학입학시험과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지만,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교과서에 언급된 고전들을 읽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학부 시절에는 교재 이외의 책을 1년에 100권 읽자는 ‘100 독서회’를 만들어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한글로 된 것뿐만 아니라 영어로 된 책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시험 준비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됐다. 두보의 시에 나오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에 걸맞은 남자가 되기 위한 지침을 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요즘도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전공과 관련된 것은 물론 전공과 무관한 것도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하루에 한 쪽이라도 책을 읽지 않는 날은 상상할 수 없다.

    노트 정리의 기술

    책을 읽을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독서 노트를 정리하는 게 좋다. 책을 읽을 때는 오랫동안 그 내용을 기억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용은 물론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다.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들은 교육철학 수업과 관련된 일화다. 나는 교육철학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독서 노트에 정리하면서 읽었다. 열심히 읽고 메모하다 보니 교재의 전체 내용이 ‘교육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정리됐다. 몇몇 학생은 교재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보다는 교재에다 밑줄을 치면서 부분적인 내용을 암기했다.

    그때 몇 사람과 내기를 했다. 나는 시험문제로 논술형 한 문제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고, 어떤 학생들은 단답형을 포함해서 여러 문제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시험시간이 됐다. 교수님은 시험지를 2장씩 나눠주면서 필요하다면 앞뒤로 작성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시험지는 그냥 백지였다. 교수님이 칠판에 쓰신 문제는 ‘교육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라’였다. 나는 내기에서 이긴 것은 물론 가장 우수한 답안을 제출한 학생이 됐다.

    학창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에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학생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나 내용이 있으면, 잘 정리해뒀다가 수업시간이나 개인 면담 시간에 일러주곤 한다. 책을 읽고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하려면 간단하게라도 나름의 논리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제목과 저자와 목차는 반드시 기록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도 함께 정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그대로 옮겨 적어두는 것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책을 무작정 많이 읽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트에 독창적으로 정리할 때 비로소 마음의 양식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여행의 힘

    공부를 잘하려면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스스로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자유로운 여행은 새로운 사람과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자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다.

    교육학자의 체험적 ‘공부 잘하기’ 조언

    여행에서 경험한 일들은 때로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도 공부다.

    나무는 여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전적인 특성과 주어진 환경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다. 하지만 사람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 처음으로 서울로 수학여행을 왔다. 시청 앞에는 수도권 전철 1호선 공사가 한창이었고, 처음 보는 높은 빌딩과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도 이곳에서 나의 꿈을 펼쳐야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게 됐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완행 기차와 버스를 타고 가는 데만 12시간이 걸리는 고향을 혼자 다녀왔다. 그때부터 혼자서도 여행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때는 부산과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해운대 백사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콜럼버스를 떠올리기도 했고, 거대한 무덤과 불국사를 바라보며 정치와 종교와 역사를 생각하기도 했다.

    대학교 때는 기차와 고속버스와 여객선이 다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전국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는 물론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주요 산과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홍도 같은 섬을 두루 다녔다. 휴전선 가까이에 있는 민간인 통제구역 외에는 거의 다 가봤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대학 졸업 후 육군 사병으로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바람에 민간인 통제구역까지 이곳저곳 누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외국 여행을 계획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40여 개 주 구석구석과 주요 대학, 국립공원들을 찾아다녔다. 유학을 마친 뒤에는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호주 등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있다.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주어진 여건과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계기였다. 현재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혁신하는 것이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여행이야말로 자기 혁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즐겁게 공부하라

    사람들은 살면서 몇 차례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보통 직업이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가 이 순간에 해당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운명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우연’이 ‘운명’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노력에 따라 운명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운명이 될 만한 우연을 창출하는 대표적인 방편이다. 여행을 하는 도중 운명이 될 만한 우연이 자주 일어난다.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면 그것이 운명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학교 1학년 때 충무에서 부산까지 가는 느린 여객선을 탄 적이 있다. 혼자 오른 여행길이라 조종실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배가 넓은 바다로 나가자 키를 잡고 조종하는 분은 별 움직임 없이 오랫동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내가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직업이니까”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나중에 나는 그 순간이 나의 운명이었음을 알았다. 공부를 직업으로 하려면 적어도 공부가 지루하지 않아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나는 공부하는 것에 관한 한 지루해하지 않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생각하면서 오늘도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

    1990년 여름, 미국 유학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첫날 저녁 나는 리치먼드에 있는 한인교회 청년부 모임에 나갔다. 첫날이라 기숙사에서 쉴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쉬기를 마다하고 교회에 간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한 여학생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오셨어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예, 처음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육학자의 체험적 ‘공부 잘하기’ 조언
    백순근

    1961년 대구 출생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미국 버클리대 박사(교육학)

    버클리대 특별연구원,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

    現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혁신위원회 전문위원

    저서 : ‘수행평가의 이론과 실제’ ‘수행평가의 원리’ ‘학위논문 작성을 위한 교육연구 및 통계분석’ ‘일제강점기의 교육평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주 우연한 만남이 우리에겐 운명이 됐다. 그날의 인연으로 우리는 결혼하게 됐고, 그것을 우리 부부의 운명으로 여기면서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떤 만남이 운명이 될지 미리 알지 못한다. 다만 수많은 우연 중에서 하나가 운명이 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여행은 새로운 사람과 자연과의 우연한 만남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그 많은 우연 중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을 운명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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