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호

北 김정남은 ‘노아웃’

“노동당 해외정보·자금 배후 총괄” 김옥·장성택과 ‘反김정철’ 연합?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7-08-09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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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계구도에서 탈락해 전세계를 떠도는 낭인이 됐다.” 2001년 일본 나리타 공항 밀입국 해프닝 이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36)은 그렇게 각국 언론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이복동생인 정철(26), 정운(24)이 후계자 수업을 받는 동안 해외에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러나 최근 들어 확인되는 그의 행보는 이러한 ‘정설’을 뒤집기에 충분하다. 5월 김 위원장의 심혈관 수술 당시 의료진과 동행입국, 이후 2개월 남짓 평양에 머물며 노동당 39호실 업무를 맡고 있다는 소식, 극적으로 권력핵심에 복귀한 장성택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나 김 위원장의 새 부인 김옥과의 오랜 인연…. 김 위원장의 세 번째 부인 고영희 사망 이후 차츰 수위가 높아진 후계구도 세력다툼이 최근 들어 마침내 팽팽한 접전 국면에 이르렀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확인된다.


    # 장면 1

    北 김정남은 ‘노아웃’

    2001년 5월 일본 나리타 공항으로 불법 입국하다 적발돼 언론에 노출된 김정남. 당시 30세였다.

    2003년 6월 초 평양 대동강변 의암동의 주택가 은덕촌. 김정일 위원장의 핵심 측근들이 모여 사는 이 최고급 빌라촌에서 한 고위장성의 생일맞이 저녁파티가 열렸다. 모여든 이들은 은덕촌에 함께 사는 군부 실력자들. 이들은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나지막이 “대장님 선물은 받았나?”라고 챙겨 물었다. 현장에 있었던 한 탈북 인사의 회고다.

    “선물은 얼린 노루와 산삼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장군님’으로 불리므로 ‘대장님’은 분명 다른 사람일 터였다. 누구를 말하는지 궁금해 그중 친분이 있던 이에게 조용히 물으니 김정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5월10일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군부 인사들에게 선물을 보낸 것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이들끼리 서로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언뜻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 회고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 시점 때문이다. 2003년 6월은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다 적발된 2001년 5월로부터 2년여가 지난 때로, 대부분의 내외신과 전문가들은 그가 ‘낭인 아닌 낭인이 되어 해외를 떠돈다’고 단정하던 시기다. 더욱이 이른바 ‘고영희 숭배’ 문건이 확인돼 ‘김정남은 후계구도에서 탈락했고, 후계자는 정철 아니면 정운’이라는 정설이 확고해진 후의 일이다.

    # 장면 2

    2005년 말, 북한을 담당하는 한 정보기관은 김정남에 대한 정밀분석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그간 주로 해외에 머무르던 그에 대한 각종 언론보도와 첩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보고서였다. 결론은 ‘김정남은 후계구도에서 탈락했다고 볼 수 없으며, 향후 그를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 이는 이전에 또 다른 정보기관이 청와대와 국회에 보고한 북한 후계구도 동향, 즉 “김정남은 완전히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과 전혀 달랐다.

    의견이 엇갈렸지만 조정은 이뤄지지 않았고, 기관 간의 견해차이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종합된 결론’을 주문해도 소용 없었다는 게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 앞서의 정보기관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김정남에 관한 정밀 관찰 필요’를 주장하는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 장면 3

    2001년 5월 김정남이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체포되어 전세계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은 직후, 각국 정보당국에서는 그가 대학 졸업 이후 국가안전보위부 간부를 역임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반당(反黨), 반체제 사건을 감시, 색출하는 사회통제기구로 주로 정치 사찰을 담당하는 일종의 비밀경찰. 2002년 6월 ‘오마이뉴스’는 국정원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남의 직함은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라고 보도했다. 탈북 관료들에 따르면 김정남이 이 자리에 임명된 것은 1999년으로, 2001년 이후 해외에 주로 머물면서도 이 직함은 계속 유지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부서의 최고책임자인 부장과 차선임인 제1부부장이 불명확하다는 사실. 1987년 당시 부장이던 이진수가 사망한 이래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김영룡 제1부부장 중심으로 운영됐으나 그 역시 1998년 4월 숙청됐다. 근래 들어 부장은 계속 공석인 채 부부장 가운데 한 사람이 제1부부장으로 승진됐다고 전해지지만, 국가정보원은 그간의 관례와는 달리 신임 제1부부장이 누구인지에 대해 엄밀한 보안을 걸어두고 있다. 2006년 가을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타진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측 ‘비선(秘線)’ 인사들과 접촉한 리호남 북한측 참사의 뒤에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급 인사가 있다는 설이 파다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 장면 4

    ‘신동아’ 7월호는 지난 5월 중순 김정일 위원장의 심혈관 치료를 위해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입국하던 독일 의료진과 김정남이 동승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국정원 첩보보고를 보도한 바 있다. 이후 김정남이 계속 평양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6월 하순 입북한 EU(유럽연합) 의회 대표단 인사들을 통해 다시 확인됐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북한 전문가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전한다.

    “당시 김정남의 평양행은 단순히 김 위원장의 안부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예 평양에 정착하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최근 그가 북한 노동당의 자금문제를 총괄하는 중앙당 39호실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해외생활을 정리했다는 것, 중앙당에서 업무를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후계구도에서 탈락했다는 그간의 추측을 뒤집기에 충분하다.”

    김평일의 선례

    北 김정남은 ‘노아웃’
    북한의 후계구도를 예측하는 일은 뒤엉킨 온갖 첩보와 설을 풀어가는 혼란스러운 작업이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명확한 정보공개와 사실확인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 그러나 2001년 이후 장남인 김정남은 후계구도에서 탈락했다는 분석이 굳어졌고, 이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국내외 전문가들과 언론, 각국 정보당국의 공식 브리핑 역시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확인되는 몇 가지 징후들은 이러한 ‘정설’에 의문을 품기에 충분해 보인다. 후계자가 결정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김정남은 탈락했다’는 전제하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 김 위원장의 아내이자 차남 정철, 3남 정운의 생모인 고영희가 살아 있을 때는 김정남의 위치가 극히 불안정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2004년 고영희가 사망한 후 상황이 달라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유력하게 대두되는 것. 쉽게 말해 김정남과 동생들 사이 혹은 그들을 등에 업은 세력 간에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는 일련의 징후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5월 김 위원장의 수술 당시 김정남이 평양에 들어갔다는 사실부터 살펴보자. 독일 의료진이 직접 진찰하기 전까지는 어떤 수술이 될지 확인하기 어려운 만큼, 이때는 권력구도가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충분한 매우 민감한 시점이었다. 이 시기에 김정남이 평양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평양에서 배척당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근거를 제공한다. 김정철의 후견세력이 민감한 시기에 장남이 돌아오는 것을 좌시할 리 없는 까닭이다.

    김정남이 2003년에도 군부 고위층에게 ‘대장님’으로 불리며 선물을 돌릴 만한 위치였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1980년대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가 공고해지던 무렵, 후계구도에서 탈락한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은 ‘곁가지’로 불리며 사실상 연금상태에 처해졌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등 동구권에 대사로 나가 거의 평양에 들어가지 못했고 대사관 직원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차단당했다. 하물며 평양의 인사들에게 선물을 돌리는 일은 상상조차 어렵다는 게 김평일과 함께 근무했던 전직 북한 외교관의 말이고 보면, 2003년에도 김정남이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루아침의 전락

    김정남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애정 역시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러시아로 망명한 김정남의 이모 성혜랑이나 김정남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외사촌 이한영의 수기, 탈북 고위관료들의 회고 등을 종합하면, 김정일은 ‘남의 아내를 빼앗아 얻은’ 첫아들을 공개적으로 키울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파 유년시절 내내 애정을 쏟았다는 것이다(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은 1960년대 북한 최고의 여배우로 이미 결혼한 몸이었지만, 김 위원장은 이혼을 시키고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서너 살 먹은 아들이 밤중에 소변을 보려 하면 김정일이 내의 바람으로 직접 우유병을 들고 오줌을 받아냈다거나, 1980년 아홉 살의 김정남이 스위스 유학을 떠나게 되자 술을 마시며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처럼 울었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외와 북한 내부를 막론하고 김정남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전부터 컴퓨터를 비롯한 IT산업과 통신사업의 막후 조정역을 맡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던 그는, 2001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상하이 방문 당시 동행하며 중국 내 IT업계 인사들을 접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對)중동 미사일 수출에 관여해 자금 수령 과정에 직접 관여했다는 첩보도 있었다. 그의 생모 성혜림이 러시아로 떠난 후에는 관련 사실을 접한 모스크바의 북한 유학생들을 일일이 소환해 입단속을 시키는 등 ‘황태자’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북한 당국의 노력도 확인됐다.

    그러나 2001년 5월 일본 나리타 공항에 가족과 함께 도미니카공화국 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적발돼 신분이 노출된 일을 계기로 상황은 하루아침에 180도 변했다.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다는 분석이 봇물을 이룬 것. ‘국제적인 망신’에 대로(大怒)한 김 위원장이 그를 아예 외국에 머물게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이후 중국 베이징과 마카오,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확인된 그의 행적은 실제로 외국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분석을 확인해주는 듯했다.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2002년 8월 조선인민군출판사가 만들어 배포한 ‘학습제강’ 내용이었다. 김 위원장을 향한 ‘존경하는 어머님’의 한없는 충성심을 강조하는 학습제강의 배포는 고영희를 우상화함으로써 김 위원장과 고영희 사이의 아들인 정철이나 정운을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직 정보당국 최고위관계자는 “문제의 제강은 실제로 2003~04년에 인민군 전방부대에 대대적으로 배포돼 강연자료로 활용됐다”고 말했다.

    “한국에도 연계고리 있다”

    김정남이 장남이기는 하지만, ‘월북자 출신의 이혼녀로 서방에 망명 시도까지 한 생모’라는 배경은, 정철과 정운의 생모가 이 무렵 김 위원장의 공식 부인과 다름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2001년 이후 그가 해외로 떠돌게 된 것은 사실상 고영희의 작품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2001년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희의 동생 고영숙도 미국 정보당국에 같은 내용으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한 정보당국자의 말이다.

    “사실 일본에서의 해프닝은 그리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김정남이 책임져야 할 사안도 아니었다. 일본 법무성 조사 당시 그는 ‘디즈니랜드 관광을 위해 입국했다’고 진술했지만, 그 말을 믿는 정보당국자는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명의의 여권을 사용한 것이 ‘불법 입국’의 핵심인데, 그 여권은 위조여권도 아니고 차명(借名) 여권이었다.

    北 김정남은 ‘노아웃’
    전세계 어느 나라든 정보요원들은 모두 차명 여권을 사용하고, 우호국 정보기관에 협조를 요청해 여권을 빌리기도 한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그 정도 사건으로 장남을 완전히 내치겠는가. 오히려 그 전에도 외국을 수없이 드나들었던 그가 그 시점에 적발된 이유가 무엇인지, 일본 당국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여권을 사용한 그를 사전에 기다리다가 제지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이후 최근까지는 정철 혹은 정운으로의 세습 징후가 두드러진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두 사람이 김 위원장의 군부대 시찰 등에 자주 동행한다는 소식이나, 정철이 2001년부터 2006년 4월까지, 정운이 2002년부터 올해 4월까지 군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주체의 영군술’ 등 군사학을 극비리에 공부했다는 정보 등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학계에서든 정보당국 내부에서든, 관련 논의는 오히려 두 살 터울인 정철과 정운 가운데 누가 후계자로 지목될 것인지에 초점이 모아지는 분위기였다.

    이 시기 김정남은 중국과 마카오에 주로 머물면서 유럽 등지를 빈번하게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입국 시도 당시 함께 카메라 세례를 받았던 부인 신정희와 ‘김남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열세 살짜리 아들은 주로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들은 한국 교민 자녀들도 많이 다니는 국제학교에 재학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정보당국자는 “김정남 본인이 제주도 등 한국에 다녀갔다는 설은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한국에도 연계고리가 있다는 징후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특히 2004년 5월 고영희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일각에서는 사고사를 가장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사안의 특성상 확인은 불가능하다) 김정남의 활동공간은 점차 넓어졌다. 당초 알려진 것처럼 평양 출입이 완전히 금지된 것도 아닐뿐더러,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노동당 35호실(옛 대외정보조사부) 업무에 관여하며 주변국에 공작원을 둘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4년 12월에는 김정남과 베이징 공항에서 만나 명함을 주고받은 일본 기자들에게 그를 자처하는 야후코리아 계정의 e메일이 발송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보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 그는 주변국 관련 부처에 정보원을 둘 수 있을 만큼 대외정보 분야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중요사항의 경우 자신이 보고받은 내용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보고할 정도로 김 위원장과의 관계도 밀접하게 유지돼온 정황이 노출되기도 했다는 것. 2006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베이징에 머물던 그가 아버지와 동행하며 주요 인사들을 접견한 것 같다는 외신보도가 나온 바 있다.

    출입국 기록의 ‘조광무역 책임자’

    올해 들어 김정남의 행보는 더욱 거침없다. 2월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남은 일본 후지TV와 짧은 인터뷰를 갖고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가끔씩 아버지를 만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그가 마카오에서 베이징행 비행기를 타면서 자신의 신분을 ‘조광무역 총책임자’로 적었다는 사실. 이 때문에 베이징 공항에는 비상이 걸렸고, 이 소식이 기자들에게 전해져 그의 베이징 도착 순간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조광무역은 노동당 39호실 산하 회사로 마카오에 설립돼 대외자금 결제와 무역에 관여해왔으며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여 있던 북한 예금 2500만달러의 상당부분을 관리해온 기관이다.

    그가 베이징에 도착한 때는 공교롭게도 BDA 자금 문제 해결을 논의하기 위한 6자회담이 열리던 와중이었다. 또한 조광무역의 신임 총지배인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도된 이름과 김정남이 베이징에서 사용한 여권의 가명이 ‘김철’로 동일하다는 점도 의구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정황을 들어 일본 언론에서는 그가 BDA 자금에 상당부분 관여해왔고 앞으로도 북한 국제금융 결제를 일정부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술과 여자만 밝히는 방탕아’라는 이미지 역시 상당부분 과장됐다고 전현직 대북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스위스에서 국제학교와 제네바종합대학을 다니며 엘리트 교육코스를 거친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공항 등에서 마주친 기자들과도 영어로 자유롭게 인터뷰했다. 젊은 시절부터 대외경제업무에 종사해 국제금융과 무역에도 밝을 뿐 아니라 장기간의 외국생활로 개방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국 고위층과도 두터운 친분을 쌓아 적잖은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 앞서의 전직 최고위 정보당국자는 “아버지를 닮아 유흥을 즐기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허술하거나 만만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 탈북관료들 사이에는 그가 북한 경제가 한창 최악으로 치닫던 1990년대 후반 경제실무를 익히며 김 위원장에게 “중국식 개혁·개방노선으로 가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노동당과 인민군의 주요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김 위원장의 뜻과 맞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이 누적되면서 부자 사이가 점차 멀어졌다는 것이다. 정보당국자들 역시 ‘노선 갈등설’이 충분히 개연성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의 해외 체류는 역시 고영희 때문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아내의 등쌀에 시달린 김 위원장이 “바깥세상을 좀더 경험하며 내 눈이 돼달라”는 명목으로 그를 내보냈으리라는 것이다.

    2006년 1월의 공교로움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지난해 김 위원장의 네 번째 부인이라고 보도된 김옥 역시 고영희의 ‘견제’를 받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상당기간을 마카오 등 해외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김옥과 김정남의 마카오 체류 기간은 수년이 겹친다. 김정남이 김옥의 마카오 생활을 돌봐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옥은 고영희 사망 이후 김정일의 첫 해외방문인 2006년 1월 방중(訪中) 때 국방위원회 과장 자격으로 동행해 중국측으로부터 퍼스트레이디 대접을 받았다. 김정남이 아버지와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가 나온 바로 그 해외 방문길이었다.

    北 김정남은 ‘노아웃’

    2004년 실각했다가 2년 뒤 복귀한 장성택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 2002년 서울 방문 당시 촬영된 사진이다.

    공교로운 대목은 또 있다. 2004년 봄, 북한의 제2권력자로 불리던 김 위원장의 매제 장성택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실각해 공개 무대에서 사라진 바 있다. 장성택은 2002년 서울을 방문해 남측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정도로 대표적인 ‘친중파(親中派) 테크노크라트’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실각 직후 김정남은 프랑스에 머물던 장금송 등 장성택의 가족에게 위로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여러 도움을 줬다는 정황이 확인됐다(장성택은 김정남의 고모부이고 장금송은 김정남의 고종사촌이다).

    정보당국은 장성택의 실각 이후 후임으로 임명된 리제강 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자타가 공인하는 친(親)김정철파의 리더로 분류한다. 장성택의 좌천 이후 그의 측근인 최춘황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과 리광근 무역상 등을 제거하는 데 리제강 부부장이 주요 임무를 담당했다는 것. 장성택 부부장이 리제강, 리용철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장 등 친김정철파에 의해 축출당한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 배경이었다.

    “후궁과 외척의 암투”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장성택은 2006년 1월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갑작스레 재기에 성공한다. 그의 세력확대를 우려해 실각시킨 김 위원장이, 이번에는 리제강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해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묘하게도 장성택의 복귀 사실 공개는 앞서 설명한 김정일의 중국 방문과 겹치는 시기였다. 이 때의 중국 방문은 국정원 대북파트가 청와대에 “가능성이 없다”고 사전 보고했다가 ‘망신’을 샀을 만큼 뜻밖의 전격 방문이었다.

    한편 최근 김정남의 평양 복귀와 관련해, 대북 소식통들 사이에서는 김옥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철이나 정운이 후계자가 될 경우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옥이 김정남을 불러들여 견제구도를 형성하려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김 위원장에게 그의 복귀를 간청했고, 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해 수교국과의 대외무역 및 자금운용을 담당하는 39호실 업무를 맡겼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아직까지는 권력구도로 짜맞춘 ‘추측’에 가깝다.

    그러나 평양 내부에 후계구도를 둘러싼 세력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정보당국자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2004년 12월 ‘연합뉴스’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남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던 중 암살 위기에 처했다가 오스트리아 내무부 반테러국의 도움으로 모면했다”고 보도하며 “정철과 정운의 주변세력이 후계자 경쟁상대인 그를 제거하려 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장성택과 김정남, 여기에 김옥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그룹은 중국과의 오랜 친분과 개혁·개방 성향이라는 무시하지 못할 공통점이 있다. 장성택과 리제강의 대립구도나 리제강이 김정철 후견그룹의 리더라는 정보당국의 분석을 감안하면, 고영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게임이 되지 않던’ 양측의 세력 차이가 2004년 그의 사망 이후 점차 감소해 2006년 1월을 기점으로 팽팽한 ‘접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다음은 한 정보당국자의 말이다.

    가능한 준비

    “북한의 후계구도를 예측하는 데는 여러 가지 척도가 있겠지만, 왕조시대 세자책봉을 둘러싼 후궁과 외척들 사이의 암투를 대입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본다. 김 위원장으로서도 조기에 후계자를 구체화하기보다는, 가급적 아들들이 경쟁하게 함으로써 능력을 키우도록 유도하고 자신의 권력이 조기에 흔들리는 것을 막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김정철과 정운은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하다. 그보다 열 살 이상 많은 노련한 김정남이 훨씬 유리할 것임은 불문가지다. 특히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북한에서 장남이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메리트다. 김정남의 후계구도 배제를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최근 수년간 북한은 인민급 장령급(장성급) 인사를 통해 꾸준히 주요 지휘관들의 연령과 계급을 낮추고 있다. 60~70대가 주류를 이루던 연령이 대폭 낮아져 심지어 40대 지휘관도 생겨났다는 것. 차수, 대장, 상장 등을 남발하던 ‘계급장 인플레이션’도 많이 줄어 전반적으로 한국군과 흡사한 계급구조를 갖춰 나가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정보당국자는 “젊은 후계자와의 연령차를 최소화해 ‘코드’를 맞추고 반감을 줄이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볼 수 있다. 후계자 옹립이 멀지 않다는 징후 가운데 하나”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간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력을 세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 위원장은 1970~80년대에 삼촌 김영주, 이복동생 김평일 및 그 후견세력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며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후계자 지위를 ‘쟁취’했다. 그런 그가 어느 아들을 일찌감치 정해서 고스란히 권력을 물려줄 리 없지 않을까.

    북한의 후계구도가 조만간 가시화된다면, 특히 개방파로 알려진 김정남이 실권자가 된다면 최소한 남북관계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 (우리 처지에서) 가능한 준비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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