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인권운동 37년 외길 윤현 아시아인권센터 이사장

“역사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돈다 그러나 누군가 굴려야 돈다”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7-11-06 16: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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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국내 양심수 구명운동을 시작으로 북한과 아시아 인권운동에 37년을 헌신한 아시아인권센터 윤현 이사장.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식지 않은 열정으로 ‘인권’을 부르짖는다. 인권운동의 탈(脫)이데올로기 원칙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 고단한 투쟁의 세월을 살았지만 그에게 후회란 없다.
    인권운동 37년 외길 윤현 아시아인권센터 이사장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인종과 성, 언어와 종교에 상관없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1948년 유엔총회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해 인간의 천부적, 기본적 권리를 존중하고 준수한다고 결의했다. 국가와 정치, 이데올로기를 떠나 세계 보편의 가치를 지닌 인권은 그 나라 민주화를 재는 척도가 되고 있다.

    지금은 ‘인권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빠른 속도로 인권이 신장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한때 암울한 ‘인권 말살’ 시기를 거쳤다. 인권에 대한 개념과 인식조차 없던 1970년대, 인권운동의 허허벌판에 홀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아시아인권센터 윤현(尹玄·79) 이사장이 바로 그다. 그는 숱한 역경을 거치며 지난 37년간 인권신장을 위해 열정적으로 매진했다. 1972년 국제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이하 한국지부)를 설립하며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정치범과 양심수를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당시 국내 유일의 인권단체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였기 때문에 보람이 매우 컸다”고 뿌듯해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연합신학학원(연세대)을 거쳐 목사로 활동하다 인권운동가로 인생행로를 바꾼 윤 이사장은 1996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설립하고 10년 뒤인 2006년 1월 아시아인권센터를 설립해 현재 두 곳의 대표를 맡고 있다. 아시아인권센터는 아시아인권포럼과 청년인권활동가워크숍을 개최하는가 하면 고려대 국제대학원과 연계해 인권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내와 북한인권 운동을 넘어 아시아로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힌 윤 이사장은 최근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의 폭력적 시위탄압 사태에 대해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인권과 자유가 우선 보장돼야 민주화가 가능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사회 인권운동 역사의 산증인이자 여전히 현역 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는 “인권운동은 내 인생의 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인권운동은 김지하 시인의 시에서 비롯됐다.

    인권운동 불 댕긴 ‘五賊’



    “1970년 봄에 월간지 ‘사상계’를 사려고 서울 종로의 한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없었습니다. 주인 말이 ‘그저께 잡지를 싹 걷어갔다’고 해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지요. 어렵게 잡지를 구해서 봤더니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실려 있었죠. 그것 때문에 김지하씨를 비롯해 관련자 4명이 구속됐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재벌과 국회의원, 장성을 풍자한 시를 썼다고 책을 수거하고 사람을 잡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분노했습니다.”

    ▼ 그때 목사이셨으니 분노가 인다고 바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듯한데요.

    “마침 국제펜클럽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외국 대표들이 충무로 대연각호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급히 ‘시인 김지하를 구하자’라는 제목의 영문 전단지를 만들어 청년 몇 명과 함께 호텔 방마다 노크하며 외국 대표들에게 배포했지요. 그 과정에서 당시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있던 독일인 브라이덴슈타인과 세브란스병원 행정관이던 캐나다인 선교사 베이리스를 만났는데 그게 내 생애 행로를 바꾸게 한 인연이 됐습니다.”

    ▼ 목사에서 인권운동으로 방향을 튼 것이군요.

    “브라이덴슈타인이 런던에 본부가 있는 국제앰네스티 멤버였어요. 그가 ‘우리 힘만으로는 약하니까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지부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됐지요.”

    김지하 시인 구속사건은 일명 ‘오적 필화사건’으로 불리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중앙정보부가 ‘사상계’를 모두 회수하고 ‘다시 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러나 한 달 뒤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이 시가 실리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 부완혁 대표와 김승균 편집장,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인권운동 37년 외길 윤현 아시아인권센터 이사장

    아시아인권센터 윤현 이사장이 자신의 37년 인권운동 일생을 사진으로 설명하고 있다.

    ▼ 정치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목사가 됐습니까.

    “20대 초반에 6·25전쟁을 겪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좌익과 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북새통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 신의 섭리이자 신이 내게 뭔가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게 됐죠. 그전에는 기독교인도 아니었어요.”

    양심수의 빛, 메리놀 커넥션

    ▼ 인권운동에 뛰어들 때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앰네스티 한국지부 창립준비를 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하는데, 당시 재직하던 교회가 전남 순천에 있었어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서울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아내가 순천에서 양장점을 해서 돈을 제법 잘 벌던 때라 생활비를 책임지라고 하고 아이들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다행히 집사람이 ‘당신은 하고 싶은 일 하라’고 이해해줘서 고마웠습니다.”

    ▼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장준하씨와 백기완씨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종교인과 대학생들이 속속 구속됐습니다. 같은 해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대학생이던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이부영 전 국회의원, 이강철씨 등이 구속됐지요. 앰네스티 각국 지부 회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정치범과 양심수들 영치금을 넣어주고 변호사비와 가족 생활비를 대줬습니다. 이른바 386세대 이전 세대들이 민주화 투쟁할 때 뒷바라지를 한 것이지요. 또 국제앰네스티를 통해 전세계에 그들의 구속 부당성을 알려 공론화했습니다.”

    ▼ 군부독재 시절이라 어려움이 컸겠군요.

    “앰네스티 한국지부 활동이 본격화한 1974년부터 한국지부 해산을 결의한 1985년 사이 중정(중앙정보부)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 불려간 것만 일곱 번입니다. 국제앰네스티라는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 두들겨 맞지는 않았는데 대신 며칠이고 잠을 안 재워서 애를 먹었죠. 안기부에 불려간 건 ‘메리놀 커넥션’을 통해 국내 양심수, 정치범과 관련된 공소장 같은 자료를 해외에 보냈기 때문인데 그들은 ‘당신이 아니면 이런 자료가 외국으로 나갈 턱이 없다’며 괴롭혔습니다.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이 공소장을 들고 주영 한국대사를 만나 국제인권조약에 위배된다며 따지기도 했어요.”

    ▼ 메리놀 커넥션이 무엇입니까.

    “국제앰네스티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 등 국내 정치범을 도우려면 우선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공소장,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 사진입니다. 그땐 팩시밀리가 없어 자료를 해외로 보내려면 국제우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국내에 들어와 있는 천주교 메리놀수도회 미국인 신부들이 미국 군사우편(APO)을 이용해 자료를 캘리포니아 주의 맥노튼 주교(당시 천주교인천교구장) 집으로 보내면 주교의 모친이 다시 국제앰네스티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런 전달 루트를 가리켜 메리놀 커넥션이라고 했죠.”

    메리놀 커넥션과 관련해 윤 이사장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 김상헌씨다. 기독교인으로 UNDP(국제연합개발계획) 직원이던 김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윤 이사장의 일을 도왔다. 휴무일인 토요일이면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들러 공소장이나 가족들 탄원서를 일일이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윤 이사장은 “김씨는 오래전 UNDP를 그만뒀는데, 그 후 북한인권시민연합 창립멤버로 나와 30년 인연을 이어온 친구다. 몇 년 전 ‘타임’에 ‘아시아 영웅 100인’으로 뽑히기도 했다”고 말을 이었다.

    윤 이사장은 앰네스티 한국지부를 설립 15년 만인 1985년 자진 해산하고 손을 뗐다.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를 해석하는 시각이 구성원 간에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인데도 “내부적으로 노선갈등이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 갈등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1980년 5월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등 전두환 정권 시절은 우리 활동에 제약이 많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일부에서 해외활동을 접고 국내 민주화운동에만 집중하자며 사무실을 대학생 농성장으로 내주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갈등이 있었지요. 나를 포함한 일부의 견해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일절 배제하고 인권에만 집중하는 국제앰네스티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런 갈등 때문에 1985년 임시총회를 소집해 한국지부 자진해산을 결의하고 물러난 겁니다.”

    그렇게 앰네스티를 떠난 윤 이사장은 1996년 5월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설립하기까지 10년 동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와 인권에 대해 연구하면서 책을 내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주로 북한인권 문제를 다루는 국제네트워크 구축 방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가 북한인권시민연합과 아시아인권센터(www.achumanrights.org) 설립이다.

    지역인권 사각지대, 아시아

    2006년 1월 설립한 아시아인권센터는 아시아인권포럼과 청년인권활동가워크숍을 개최하고 고려대 국제대학원과 연계해 연 2회 인권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인권전문가와 활동가들을 모아 아시아지역 인권상황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모임을 갖고 국·영문 정기소식지를 발간하는 것도 이곳이 하는 큰 활동 중 하나.

    ▼ 아시아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지역인권 보호 메커니즘이 있는데 아시아에만 없습니다. 지역인권 보호운동은 먼저 유럽에서 시작됐죠. 유럽인권조약이 만들어지면서 그 조약에 근거해 유럽인권위원회와 유럽인권재판소가 설치됐습니다. 두 기구가 조약의 이행을 감시하고 이를 어겼을 경우 제재를 가해 시정조치를 하게 합니다. 인권재판소 판결은 실제로 구속력을 갖습니다. 1970년대 북아일랜드 독립운동 당시 영국 진압군이 반란자들을 검거해 머리에 고음파 헬멧을 씌우고 고문을 했는데, 피해자 9명이 유럽인권위원회에 이를 고발했죠. 이에 유럽인권재판소는 영국 정부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세계를 상대로 재발방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인권조약이나 인권헌장, 인권위원회와 인권재판소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미주지역과 아프리카에도 있는데 유일하게 아시아에만 없습니다. 향후 인권운동의 목표를 여기에 두고 아시아인권센터를 설립한 것입니다.”

    ▼ 아시아인권센터 활동이 아동 인권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근래 우리 피부에 와 닿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동남아 일대에서 아동 인신매매와 성매매 사건에 한국 남성이 가해자로 걸려드는 사례가 자주 발생해요. 또 한국 남성과 동남아 여성의 결혼으로 태어난 2세 교육 문제, 외국인 노동자 자녀 문제도 심각합니다. 약자인 아동과 여성인권 문제에 대해 세계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관련 활동에 대해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또 북한인권 개선운동을 반북(反北)활동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도 있지요.”

    북한인권운동과 직결된 탈북자 문제는 우리나라와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 아시아 전체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서 탈북자 400여 명이 단식농성을 벌여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사건이 그 예다. 윤 이사장은 “아시아 지역내 교류가 확산됐기 때문에 아시아 전체 인권 문제에 북한인권을 포함해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인권만 자꾸 얘기하니까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는데, 아시아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반발도 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권에 좌우가 무슨 상관?”

    ▼ 얼마 전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간 고교생들의 성매매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던졌습니다. 청소년 대상 인권교육도 시급한 것 같습니다.

    “올해 우리 센터에서 개최한 아시아인권포럼에 청소년들을 참가시켜 이들을 대상으로 참관기 콘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아카데미 교육에도 고교생들을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조만간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한 고교에서 아동 성 착취와 관련한 교육을 2시간 동안 실시할 예정입니다. 이걸 계기로 시내 각 고등학교로 인권교육을 확산할 생각입니다. 유네스코에서 발간한 ‘인권 100문답’을 번역해 곧 내놓을 예정인데 이걸 교재로 쓰는 등 다각도로 고민 중입니다.”

    ▼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등 2차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인권 문제를 두고 말이 많습니다.

    “미송환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는 우리나라 국민의 인권 문제입니다. 당연히 문제가 제기됐어야 하는데 그간 말을 못했어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 문제에 포함시키는 건 너무 궁색한 모양새입니다.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라도 인권 문제가 거론됐어야 하는데 전혀 언급이 없었던 건 우리도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지난해 유엔총회에서 대북인권 결의안이 상정됐을 때 그동안 불참하거나 기권했던 우리 정부가 찬성표를 던졌다. 윤 이사장은 “언젠가는 정부도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기대 섞인 희망을 나타냈다.

    ▼ 일각에선 북한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이라며 외면합니다.

    “요즘 북한인권 문제를 다루면 흔히 보수우익으로 낙인찍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활동해온 인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잣대로 남쪽도 재고 북쪽도 재자는 것입니다. 인류 보편의 인권은 보수나 우익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나라의 주권자는 국민 또는 시민입니다. 남과 북의 인권개선을 위해 시민인 우리가 주권자로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권운동은 시민운동이고 평화운동이자 국제운동이지, 북한정권을 타도하려는 정치적 운동이나 내정간섭이 아닙니다.”

    윤 이사장은 “시민이나 국민의 인권을 침해한 나라는 이웃나라도 쉽게 침략한 것이 세계 역사”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인권이 악화되면 될수록 남침 우려가 커진다. 북한이 평화국가가 되려면 인권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국내 진보 진영의 최근 변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한때는 통일을 앞세우다 요즘은 자꾸 평화운동을 내세우는데, 평화에 앞서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화를 이룩해야 평화도 지킬 수 있죠. 인권을 제쳐놓고 평화를 주장하는 걸 보면 뭔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요즘은 ‘인권 과잉’이라는 말도 나오는데요.

    “불법폭력시위를 벌여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내 인권이 중요하면 남의 인권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1970, 80년대엔 정치탄압에 항거해 인권을 내세웠고, 1990년대엔 시민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인권에서 정치성이 많이 빠졌습니다. 요즘은 과잉 얘기가 나올 만큼 인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한때 너무 오래 인권이 억압되다 보니 반동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에서 몇 백년 걸려 이룩된 인권신장이 우리나라에선 불과 몇 십년 사이에 실현됐으니 오용 혹은 과잉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과도기적인 현상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봐야지요.”

    후회도, 바라는 것도 없다

    윤 이사장은 2002년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2003년 미국 국립민주주의 재단이 주는 ‘민주주의상’을 수상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인권침해 국가에 정중히 편지를 보내 사례를 지적하는 등 평화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데모하고 악쓰는 것보다 약할 것 같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 결국 인권이 개선되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나이 먹고 경험이 쌓이니까 큰 틀에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데, 자유와 인권은 언젠가는 결국 신장되고 회복됩니다. 세계 인권의 역사는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다는 거죠. 인권운동은 내 인생의 꽃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 신경정신과 교수였던 빅터 프랭클은 나치 시절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모면했다. 그 후 수용소 경험을 담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윤 이사장은 이 책 끝 부분에 적힌 ‘역사의 수레바퀴는 느리게 돈다. 그러나 끊임없이 돈다’는 구절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세계 역사를 살펴봐도 맞는 말이죠. 인권운동을 하면서 하나 더 터득한 게 있는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자동장치가 아니라 누군가가 끊임없이 돌려야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37년에 걸쳐 인권운동을 하며 제가 얻은 결론입니다.”

    ▼ 인권운동을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얼마 전 인혁당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이 확정됐는데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물론 인권운동을 하면서 괴로워한 적도 있고 시달리기도 했지만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1970, 80년대 시대상황을 모른 척하면 내 마음이 괴로우니까 뛰어들었고, 일선에 나서 직접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뒷바라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권운동 초창기 시절 도움을 준 사람들 중 많은 이가 현 정부와 정치권에 있어요. 그중에는 지금껏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고 모른 척 외면하는 사람도 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어차피 뭔가를 바라고 일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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