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인권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빠른 속도로 인권이 신장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한때 암울한 ‘인권 말살’ 시기를 거쳤다. 인권에 대한 개념과 인식조차 없던 1970년대, 인권운동의 허허벌판에 홀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아시아인권센터 윤현(尹玄·79) 이사장이 바로 그다. 그는 숱한 역경을 거치며 지난 37년간 인권신장을 위해 열정적으로 매진했다. 1972년 국제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이하 한국지부)를 설립하며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정치범과 양심수를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당시 국내 유일의 인권단체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였기 때문에 보람이 매우 컸다”고 뿌듯해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연합신학학원(연세대)을 거쳐 목사로 활동하다 인권운동가로 인생행로를 바꾼 윤 이사장은 1996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설립하고 10년 뒤인 2006년 1월 아시아인권센터를 설립해 현재 두 곳의 대표를 맡고 있다. 아시아인권센터는 아시아인권포럼과 청년인권활동가워크숍을 개최하는가 하면 고려대 국제대학원과 연계해 인권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내와 북한인권 운동을 넘어 아시아로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힌 윤 이사장은 최근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의 폭력적 시위탄압 사태에 대해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인권과 자유가 우선 보장돼야 민주화가 가능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사회 인권운동 역사의 산증인이자 여전히 현역 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는 “인권운동은 내 인생의 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인권운동은 김지하 시인의 시에서 비롯됐다.
인권운동 불 댕긴 ‘五賊’
“1970년 봄에 월간지 ‘사상계’를 사려고 서울 종로의 한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없었습니다. 주인 말이 ‘그저께 잡지를 싹 걷어갔다’고 해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지요. 어렵게 잡지를 구해서 봤더니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실려 있었죠. 그것 때문에 김지하씨를 비롯해 관련자 4명이 구속됐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재벌과 국회의원, 장성을 풍자한 시를 썼다고 책을 수거하고 사람을 잡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분노했습니다.”
▼ 그때 목사이셨으니 분노가 인다고 바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듯한데요.
“마침 국제펜클럽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외국 대표들이 충무로 대연각호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급히 ‘시인 김지하를 구하자’라는 제목의 영문 전단지를 만들어 청년 몇 명과 함께 호텔 방마다 노크하며 외국 대표들에게 배포했지요. 그 과정에서 당시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있던 독일인 브라이덴슈타인과 세브란스병원 행정관이던 캐나다인 선교사 베이리스를 만났는데 그게 내 생애 행로를 바꾸게 한 인연이 됐습니다.”
▼ 목사에서 인권운동으로 방향을 튼 것이군요.
“브라이덴슈타인이 런던에 본부가 있는 국제앰네스티 멤버였어요. 그가 ‘우리 힘만으로는 약하니까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지부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됐지요.”
김지하 시인 구속사건은 일명 ‘오적 필화사건’으로 불리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중앙정보부가 ‘사상계’를 모두 회수하고 ‘다시 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러나 한 달 뒤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이 시가 실리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 부완혁 대표와 김승균 편집장,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