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b> 신범순 지음/현암사/527쪽/2만5000원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않은 이론”
그러나 산적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본질에 접근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명쾌하게 그려낸 연구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이론은 부분적인 진실을 해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상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아니한 이론”(이상은 ‘지도의 암실’에서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아니한 글자”를 말한 바 있다)을 그의 문학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 나온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는 새로운 이상 연구 붐을 추동해가면서 쌓아올린 저력이 오롯이 담긴 저서로서, 이상 문학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는 역저라 할 만하다. 거기에는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아니한 이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문학 연구자의 집요한 독해가 요청된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이상은 기존의 기괴하게 과장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더니스트가 아니다. 근대를 초극(超克)하기 위해 고심했던 사상가로서의 이상이다. “역사시대의 종말과 제4세대 문명의 꿈”이라는 부제에 그 사상의 핵심이 함축돼 있다. 이상 문학의 난해한 구절들에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붕괴된 메시지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읽는 것은 지난하면서도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이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주려무나!”(이상, ‘1931년(작품 제1번)’) 하며 자기 사상에 대한 확호한 갈망을 표출해왔다는 점에서 사상가로서 이상의 출현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동안 이상 문학처럼 이상 문학 연구 역시 파편적으로 이뤄져왔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상이 겨냥했던, 아니 겨냥했으리라 짐작되는 어떤 차원에 대한 해명이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상의 작품 전체를 포괄할 가능성이 사라진다.
따라서 작품 전체를 구성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 의도를 실현시킨 사상이 문제될 수밖에 없다. 사상가 이상이 그려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이 방법론으로서의 모더니즘을 이해한 탁월한 응용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학적 지향을 분명하게 지닌 창조적인 시인이자 사상가였음은 그의 작품이 지닌 수준과 응집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연대기적·문화사적 추적
520여 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서술 방식에 대한 윤곽이며 다른 하나는 서술 내용의 전반적 특성이다. 먼저 서술 방식에서 사상가 이상의 사유(思惟)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난해한 초기 작품(‘삼차각 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을 세밀하게 읽으면서 이상 사상의 핵을 짚어내고(이 부분이 저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중시된다), 이후 ‘오감도’ 계열의 작품을 통해 초기사상의 진행과정을 점검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실화’ ‘종생기’ 등을 통하여 그 사상의 종결된 지점을 확인한다.
다음으로 서술 내용의 전반적 특징은 이상의 시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에 대해 방대하고도 집요한 문화사적 추적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인상적인 이미지들은 나비 이미지, 김기림의 ‘주피타 추방’에 나타나는 여러 이미지, 말 이미지, 초검선 이미지, 천문 이미지 등인데, 그중 하나로 나비 이미지를 살펴보자.
저자는 이상 시의 원형적이고 핵심적인 이미지로 나비 이미지를 든다. 그는 이상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 이미지의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 나비효과, 카오스이론, 프랙탈이론, 김동인의 소설 ‘태평행’, 버선본집, 인디언 설화 등을 꼼꼼하게 검토한다. 언뜻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이런 이미지들은 저자의 일관된 논리체계 안에 적절하게 배치되면서 설득력을 지닌다.
이미지의 축제, 독창적인 개념
특히 이상의 나비 이미지는 근대 초극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는 근대의 결정론적 과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보여주는데, 이는 나비효과 혹은 나비끌개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서구 카오스 이론이 등장하기 40여 년 전의 일이다. 저자는 이상 사상의 선구성에 주목하고 나비 이미지의 문화사적 추적을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인다.
이미지의 축제는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이 풍요로운 이미지를 통하여 독자는 암호화된 이상의 난해한 구절이 차츰 어떤 형상을 획득하며 구체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때 이미지는 심오한 사상의 표상으로 새로운 위상을 지니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독창적인 개념을 의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초검선’과 ‘무한사상’이라는 개념이다. ‘초검선’은 “물질적인 운동의 극한인 광선을 초월한 운동선”(‘이상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28쪽)이다. 근대의 평면적인 기하학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며 새롭게 설정한 이상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저자는 ‘초검선’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초검선의 세계는 현대의 물리학, 기하학을 넘어서서 인간과 우주가 새로운 차원에서 “광대한 삶의 우주적 운동선”(157쪽)을 회복한 세계다.
현대의 평면적 세계관을 뚫고 입체적인 총체성을 회복한 세계, 초월성과 일상성이 현재 속에서 역동적으로 얽혀 있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 세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무한정원’ ‘무한호텔’ 등이며, 그것을 추동하는 정신이 ‘무한사상’이 된다. ‘무한사상’은 ‘멱에 의한 멱’이라는 표현에 집약돼 있다. 이것은 현대과학의 우주적 평면성을 부정하고 세계의 다층적 구성을 강조하는 용어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무한’은 현실에 초월성을 도입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초월계의 도입으로 우주가 온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상의 생각이자 저자의 생각이다.
이름을 돌려주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이런 개념들은 다소 낯설기는 하지만 저자가 읽고자 하는 이상의 사상을 규정하는 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상 문학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독서를 바탕으로 이상의 관련 구절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이상 문학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라는 혐의도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상이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것들에 이름을 돌려주는, 즉 이상 문학의 완성을 기획한 대담한 의도를 담고 있는 저서라 하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상 문학은 본격적인 문학 연구에 있어 하나의 관문이며, 그 연구는 한국의 문학 연구 수준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신범순 교수(서울대 국문학과)의 이 책이 발간됨으로써 여기에 하나의 관문이 더 생긴 셈이다. 이 책은 이상 문학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필독서라 할 만하다. 수많은 문화사적 인용과 다소 낯선 개념들을 정치하게 읽지 않는다면 이상 문학의 새로운 가치와 저자의 사상을 놓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