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장수 장계 덕유산 자락에는 치매에 걸린 노모와 함께 사는 농부가 있다. 노동운동가, 민중정치인을 거쳐 이제 농부와 명상가, 대안교육가로 안착한 목암 전희식씨. 어머니가 싸놓은 똥을 보고 ‘똥꽃’이라는 시를 지은 그는 또 다른 진보를 어머니와 생명에서 발견한다. 자연과 ‘일’은 어머니의 마음 병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나갔고, 그는 어머니에게 노년의 존엄과 권리를 스스로 찾게 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보살피던 손이 이제는 아들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이어진다. 그 자체로 아름답고 존엄하다.
내가 전씨를 처음 만난 건 한 달 전쯤인가, 그가 잔치를 열면서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이가 거기 참여하려고 가는 길인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전씨가 여는 잔치는 어머니를 위한 잔치라는데 환갑이니 칠순이니 하는 그런 잔치가 아니란다. 잔치 이름이 ‘어머니의 건강과 존엄을 위한 기도잔치’란다. 잔치라면 즐겁게 어울리고 맛난 음식을 나누는 자리일 텐데 ‘존엄’이라니…. 생각할 거리가 많을 듯해 길을 나섰다.
전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곳은 우리 집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 전씨 집 들머리에는 승용차가 줄줄이 서 있고, 집으로 들어서니 마루와 마당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한창 식이 진행 중이어서 전씨와는 우선 목례만 주고받았다.
노모의 존엄을 위한 잔치
천천히 분위기부터 살폈다. 20여 명의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도 몇 보인다. 아이도 여럿 있고, 전씨 어머니는 방안에서 쉬고 계셨다. 잔치 의식 가운데 대금 연주도 있고, 명상 춤도 춘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어머니 사진도 전시해놓았다. 조금씩 분위기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식이 끝나고 마당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었다. 잔칫집이라지만 음식이 풍성하지는 않았다. 떡메로 쳐서 만든 인절미와 김치, 그리고 과일과 술 몇 병이 전부다. 사람들은 음식보다 이야기를 나누고 영적인 기운을 주고받고자 한다.
이날은 전씨와 얼굴 익히는 정도로 하고 헤어졌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곤 우리 마을 이웃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니 부모 모시는 문제가 생각보다 절실한 걸 알았다. 연세가 칠순 팔순이 된 부모님을 모시는 이웃이 적지 않다. 나 또한 어머니는 칠순,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팔순이 넘는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넘어간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안고 있는 고민은 곧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이다. 그런 점에서 전씨가 보여주는 삶의 해법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듯하다.
이후 추석 무렵에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장계가 아닌 완주 소양에서. 전씨의 집은 두 곳에 있다. 본디 귀농해 완주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올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장계에 따로 집을 마련했다. 소양에는 아내와 자식들이 머무른다. 추석을 지낸다고 식구가 모두 소양 집에 모인 거다.
전씨는 시골에 내려온 뒤 8년 만에 전북 완주 소양에 24평 집을 손수 지었다. 이 집에 와서 직접 보니 아주 잘 지은 집이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에 지붕은 흙 기와를 올릴 만큼 돈도 들였다. 담장 또한 튼튼하면서도 예쁘게 쌓았다. 흙과 돌과 나무토막으로 멋을 내고, 빗물에 허물어지지 않게 담장 지붕도 씌웠다.
사람을 사귀자면 살아온 이야기부터 나누는 게 제일인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 또는 일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시골에 와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 없이 이웃을 사귀다가 고생한 기억이 적지 않다. 삶의 뿌리에 대한 이해 없이 열매만 따고 나누어 가지려는 욕심은 자기 상처가 되기 쉽다.
전희식씨는 별명이 여럿이다. 농사를 중심에 놓고 지은 이름은 농주(農住 또는 濃酒). 마음공부를 하면서 얻은 법명은 휴강(休康). 나이 드신 어머니를 시골집에 모시고 살면서 새로 얻은 법명은 목암(牧庵)이란다. 그 뜻은 ‘고요한 오두막 하나 지키고 살아라’이다.
이 글에서는 여러 이름 가운데 목암을 쓰고자 한다. 목암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예전에 민중당 소속으로 인천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8.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시골에 내려와서는 ‘감자를 아궁이 불에 굽다’라는 책을 냈다. 지금도 농사를 지으며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생명평화결사운동이라든지 귀농운동에도 몸담고 있고, 잡지와 신문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 두루 글을 쓴다.
‘생명의 농사야말로 진보’
대안교육에 대한 경험도 다양하다. 두 아이, 새날(19)이와 새들(17)이가 모두 대안학교를 거치면서 학부모로서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하게 된다. 또한 부정기적으로 ‘보따리 학교’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손수 운영한다. 이 학교는 배우고 싶은 아이들이 보따리만 싸서 오면 함께 삶에 대해 공부하는 한시적인 학교다. 이 뿐만이 아니다. 가까운 마을 할머니들을 위한 한글 교실도 열고, 좀더 멀리 발을 뻗어 장수읍내 이주여성 지원센터에도 1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간다.
그를 더 알아보기 위해 젊은 시절과 귀농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목암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당시 삶은 치열했고, 가슴은 뜨거웠다. 그때 만난 인연들 가운데 지금은 꽤나 유명한 사람도 많다. 경기도 지사인 김문수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김근태가 그들이다. 목암은 1992년 총선을 치르고 나서 삶의 변화를 근본에서 다시 모색한다. 사회 변혁 이전에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그러다 1993년 무소유 공동체를 지향하는 야마기시 명상수련에 참여하면서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그 어떤 희열을 맛본다. 그가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많은 변혁운동이 상대를 공격하면서 상처를 받는다. 이는 곧 자기 상처가 되며 이를 다시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제는 이런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깊은 명상의 힘을 운동의 힘으로 삼자.’
술 한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는 충만감과 희열감. ‘이게 뭘까? 어디서 오는 걸까.’ 명상 끝에 그는 삶의 거처를 옮긴다. ‘생명의 농사야말로 진보’라는 결론을 얻고, 1994년에 전북 완주로 내려온다. 농사를 짓고 명상을 꾸준히 하면서 삶의 지평이 달라지는 걸 깊이 체험한다.
“모든 존재물과 조화로운 관계, 더불어 번영해야 하는 거지요.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세상을 살리는 걸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봐요. 울분에 차지 않고, 미워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자신을 바로 보고, 외부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자세. 전우주적 존재감을 갖고 살아가려고 해요.”
생명의 농사를 바탕으로 그는 삶의 지평을 하나하나 넓혀간다. 자연의학과 민족생활 의학을 두루 섭렵하고, 대안교육에도 깊숙이 발을 담근다. 최근 6년 동안 그가 학부모로서 관계한 대안학교는 네 곳이나 된다.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 작은 학교, 강화도에 있는 마리학교, 담양에 있는 한빛고등학교, 그리고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다. 그러다 지난해 큰아이 새날이가 고등학교를 1학년만 마치고 그만둔다. 스스로 세상을 학교 삼아 배움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목암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런 방식의 배움을 ‘스스로 세상학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 학교는 마리학교의 장계분교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 학교를 어찌 운영할지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웠고, 첫 입학생을 받았다. 이렇게 목암은 새로운 교육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지만 여기서는 부모 모시기로 이야기를 집중할까 한다.
노인에 관한 무지, 폭력
어느덧 우리 사회도 고령화로 접어들면서 부모 모시는 문제가 자식들에게 큰 일로 다가온다. 웬만큼 경제력을 갖추지 않은 한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직접 모시는 것도 그리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설사 의무감으로 집에서 자식이 모시더라도 그 주체는 대부분 여성 몫이 된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아니면 딸이 친정 부모를 모신다. 살림을 모르고는 노인을 보살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암은 남성으로서, 장남이 아닌 막내아들로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신다. 그것도 기쁘게.
그가 이렇게 어머니를 모시는 데는 사연이 조금 길다. 지금 어머니는 연세가 여든여섯, 하반신과 청각에 장애가 있어 현재 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상태다. 서울 사는 큰형님이 20여 년 동안 어머니를 모셨다. 7년 전쯤 눈이 오는 날 외출했다가 넘어져 골반을 크게 다쳐 큰 수술을 하게 되고 이후 어머니는 집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전희식씨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사진을 찍어 보여드린다. 한 장의 사진은 기억을 재생하는 힘이다.
“어머니가 지내는 방에 가보면 그 안에 다 있어요. 티브이 있겠다. 개인 옷장, 면경 다 있어. 밥도 다 갖다드리겠다. 거기서 어머니가 나오는 일이 없어요. 방안 온도도 20도로 맞추어져 있어요. 추운지 더운지,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몰라요. 사계절을 느끼고 살아야 오감도 살잖아요? 게다가 기저귀까지 차고 있으니 배뇨기를 느끼기가 더 어렵단 말이에요. 점점 더 몸이 감각을 잃어버리는 거지요.”
목암은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흥분한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아주 논리 정연했다.
“또 하나는 노인네를 배척하는 문제인데. 국외자로 낙인찍는단 말이에요. 문밖에만 나가려고 하면 ‘가만 계세요’. 다치거나 길 잃어버린다고. 물 좀 마시려고 해도 ‘가만히 계세요’. 잘못하면 그릇 깨뜨리니까. 우리 형님이 잘못하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한다고 봐요.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가만히 있어도 모든 사물로부터 소외당한단 말이에요. 모든 게 기계화가 되어 있으니 청소 하나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지요. 노인네라 청소기도 쓸 줄 모르는데다가 청소기 소리는 또 얼마나 무섭고 낯설어요. 자식은 잘 모신다고 하지만 어머니 처지에서는 수용소나 다름없는 거지요.”
4남 2녀 가운데 아들로서는 막내인 목암은 그런 어머니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모셔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1년 가까이 단단히 준비한다. 노인 관련 책과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책을 두루 독파한다. 그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을 들자면 ‘노인이 말하지 않는 것들’ ‘마흔에서 아흔까지’ ‘노인심리학’ ‘노인학개론’들이다.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자, 이번에는 후배가 운영하는 노인병원에 들러 자원봉사를 자청, 온몸으로 노인의 삶을 체험한다.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울분을 느낀다.
“간병인이 노인에게 밥을 먹이는데, 노인 한 사람당 밥 한 술 떠넘기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한 사람에게 6초 만에 한 술 먹이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 사람마다 밥을 넘기는 속도가 다르잖아요. 어떤 이는 10초가 걸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더 오래 씹을 수도 있는 건데. 밥숟갈을 마치 밀어 넣듯이 우겨넣는 겁니다. 이건 간병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봐요. 심지어 노인들을 대하는 말도 거의 다 반말이에요. ‘할머니, 일어나! 밥 먹어야지!’”
어머니의 기저귀를 벗기다
이렇게 공부하고 체험할수록 존엄에 대한 자각은 더 뚜렷해졌다. 누구에게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 어머니도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목암의 눈에 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년이 비참한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외로움, 가난, 병, 할 일 없음….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삶이란 여러 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거다. 목암이 강조하는 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할 때 존엄하다’는 거다. 특히나 노인에게 존엄이란 스스로 돌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존엄이 아닐까 싶다.
이런 확신에도 목암이 넘어야 할 산은 적지 않았다. 아내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과 어머니를 모실 만한 주거환경, 그리고 형제들을 설득하는 문제들이었다. 나로서는 소양 집이 한결 잘 지은 집인데도 장계 집으로 모시고 간 거부터 이해가 안 되었다.
“소양 집을 지을 당시는 어머니 생각을 전혀 못한 거지요. 우리 부부와 아이들이 살기 좋은 집으로 만든 겁니다. 어머니가 지내시기에는 너무 불편해요. 우선 화장실부터 그렇거든요. 몸이 불편한 어머니에게 맞추려면 지금 화장실을 다 뜯어내고 새로 지어야 해요. 그리고 집안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동선이 노인이 살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아요. 미닫이창이 너무 크고, 마루턱도 너무 높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우리 부부는 살림이나 개인 물건들을 좋게 말해서 자유분방하게 두는 편이에요(웃음).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꼴을 못 봐요. 잔소리를 줄줄이 해대면 어느 며느리가 견디겠어요?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는 일보다 생활을 간섭당하는 일이 더 힘들 거라고 여긴 거지요.”
이런 여러 요인을 생각해서 목암은 소양에서 멀지 않은 장계에 새로 집을 마련했다. 아홉 평(29.7m2) 남짓한 낡고 작은 시골집. 예전부터 사람이 대대로 살던 곳으로 시골 노인네들이 죽을 때까지 살다가 이후 버려진 집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집. 작은 방문만 하나 열면 세상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 마루도 아주 낮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아이 발이라도 토방에 닿을 만큼 편안하다. 이 토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턱은 한 자 남짓하니 앉은걸음으로도 내려올 수 있다. 생각을 깊이 하고 지은 집이라기보다 노인을 모시고 평생을 살아온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설계되고 지은 집인 셈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선뜻 동의했을까.
“사실 아내 처지에서는 둘 다 어려운 선택이지요. 며느리로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겠다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내가 가족을 제쳐두고 장계로 독립해서 어머니랑 산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잖아요. 상식으로 보면 가장이 어머니를 모신다는 핑계로 자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게 되니까요. 아내가 내린 답은 침묵이었지요. 제 뜻이 워낙 확고하니까, 침묵으로 묵시적 동의를 해주었다고 믿어요. 요즘 아내는 1주일에 두 번, 근처에 있는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에서 요가 강의를 하는데, 강의를 마치면 장계 집에 들러요.”
다른 형제들을 설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장계 집은 외진 산골이라 의료 시설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농사랑 목암이 벌여놓은 일이 많으니 형제들 반대가 심할 수밖에. 목암은 형제 가운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둘째형부터 설득해 나갔다. 시간이 문제지,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일어난 기적들
목암이 올봄부터 어머니를 모시면서 맨 먼저 한 일은 귀저기를 채우지 않는 거였다. 어머니가 속옷에 싸는 똥과 오줌을 다 받아내고 그 많은 빨래를 다 한다. 그것도 세탁기를 쓰지 않고 손빨래로. 그가 손빨래를 하는 데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
“손으로 빨래를 하면 어머니 몸의 변화를 알 수 있어요. 빨래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몇 시간마다 오줌을 싸는지, 똥 색깔을 보면서 먹은 음식이랑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도 있고요.”
그러면서 자신이 배운 자연의학 기술로 어머니에게 날마다 쑥뜸을 떠준다. 요리도 빼놓을 수 없는 일. 예전에는 아내가 요리를 하고 자신은 설거지만 하다가 하루 세 끼에다가 두 시간마다 어머니 참까지 마련해야 하는 과정이 녹록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모시면서 차츰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똥오줌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한 거다. 똥오줌이 마렵다고 몸이 느끼기 시작한 거고, 더 중요한 건 그 순간 참을 수 있을 만큼 방광과 항문 근육에 힘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치매에는 노인성 치매와 혈관성 치매가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노인성 치매다. 현대의학에서는 노인성 치매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약물 치료로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걸 늦출 수는 있지만 완전히 멈출 수는 없다고 한다. 쉽게 말해 죽음을 기다리는 병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목암은 의학에서 새로운 영역의 한 부분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어머니 치유를 위해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방대하다. 자연환경과 적절하게 접목하고, 일과 놀이와 치유를 다양하게 결합시킨다.
기본 바탕은 아무래도 자연환경이다. 추울 때 추위를 느끼고, 더울 때 더위를 느껴야 몸의 감각이 살아난다는 거다. 그러고도 좀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우박이 떨어지면 어머니 손에 올려 감각을 되살리고자 했다. 밤낮을 구분하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전등 하나만 끄면 온 세상이 어두운 밤. 그 밤 덕에 시골집으로 내려온 뒤 어머니는 밤에 잘 주무신다.
둘째는 일이다. 노인들이 존엄을 잃어버리는 데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도 큰 이유가 된다. 생산적 노동이이야말로 삶의 이유이자, 성취감과 기쁨을 얻는 뿌리가 된다. 시골은 마음먹기에 따라 일이 끝도 없을 만큼 많다. 어머니가 하는 일이란 사회적 생산의 뜻보다는 놀이이자 자기 앞가림이면 된다. 목암이 어머니와 처음으로 시도한 일은 청국장 만들기. 이 일은 어머니가 수십 년 해오던 거라 잘 아는 일이다. 청국장 하나를 만드는 일에도 다시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콩을 고르고, 씻고, 끓이고. 아랫목에서 띄우고, 으깨고, 간 맞추고…. 어머니가 손수 할 수 있고, 하고 싶어하는 일은 모두 어머니가 하게 두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기억을 되살리고, 자기 존재감을 조금씩 확인하게 된다. 목암 역시 자기 확신이 현실로 드러나는 기쁨을 체험한다. 그는 이제 치매는 병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똥꽃’
이렇게 어머니와 새롭게 생활해가던 어느 봄날. 밭에서 감자를 심던 목암은 산에 진달래꽃마저 활짝 피어 있기에 세상을 잊고 그냥 일에 취한 적이 있다. 보통 때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2시간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걸 규칙으로 한다. 어머니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오줌을 누기도 하거니와 그때쯤 간식도 드려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이날은 일에 취하다 보니 시간 가는 걸 잊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다. 아뿔싸, 어머니가 그 사이 똥을 싼 거다.
어머니는 당신이 다시 똥을 싼 것에 대한 자괴심으로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고, 어머니가 움직인 길 따라 이불에 똥을 묻힌 흔적이 드문드문 나 있다. 어머니를 씻기고 똥을 치우면서 목암은 시적 감흥이 떠올라 시를 한 편 썼다. 제목은 ‘똥꽃’.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방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걸음
검노란 똥 자국들
내 어머니 신산했던 세월
방바닥 여기저기에
이불 두 채에
고스란히 담겼네.
우리 어릴 적 봄날은
보리밭 밀밭 마늘밭
구릿한 수황냄새로 풍겨났지.
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 때처럼
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
진달래꽃
몇 잎 따다
깔아 놓아야지
자존감을 회복하자, 웃음과 해학도 되살아난 목암 어머니.
이 일을 겪으면서 목암은 자기 삶을 좀더 깊이 성찰한다. 더 집중해서 어머니를 돌보아야겠다고. 그렇게 모신 지 석 달 만에 어머니는 똥오줌을 완전히 가리게 된다. 똥오줌을 못 가리다가 다시 가릴 때 오는 기쁨은 어떨까? 아기들이 가리는 것과는 다를 것 같다. 자연스러움이 아닌 치유의 기쁨, 절망에서 다시 솟아나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다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어려운 건 어머니가 망상에 빠지는 것. 망상은 치매 환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자기 삶 속에서 막힌 부분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 어떤 동경 같은 것이란다.
목암 어머니에게는 ‘백운역 할아버지’라는 망상이 있다. 이 할아버지는 목암이 예전에 노동운동 관련 수배생활을 할 때 인천 백운역에서 구두를 수선하던 분이다. 당시 어머니는 아들에게 맞는 구두를 하나 사서 신기는 게 소원이었다. 아들 발이 몹시 커, 구두를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망상에서 벗어나는 ‘일’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신 거다. 지금 식으로 보자면 맞춤형 구두를 만들어준 셈이다. 어머니가 망상에 젖어들 때면 이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몸부림친다. 어머니는 이 할아버지가 못하는 게 없다고 믿는다. 침도 잘 놓으니 자신을 단박에 건강하게 해줄 거라 믿는다. 그러면서 한사코 그 할아버지에게 데려다달라고 떼를 쓴다. 이렇게 망상에 빠져들면 아들에게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며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이럴 경우 설득이 안 된다.
망상을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다. 목암이 시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관련 전문가나 경험 많은 분들과 상담을 하고, 때로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며, 상황극까지 만들어 어머니가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머니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늘 준비해두는 거다. 이를테면 바느질 같은 일. 내가 소양 집에 간 날도 그랬다. 목암이 어머니 드시라고 밤을 내어놓았다. 찐 밤이 아닌 생밤을. 어머니는 쪼그린 자세로 과일칼을 가지고 겉껍질을 깐 다음 속껍질은 손톱으로 하나하나 깐다. 그 모습이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 같다. 어머니는 그 일에 몰입한다. 그곳에는 어떤 망상도 들어올 틈이 없다. 부모를 잘 모신다고 자식이 과일을 다 깎아드리는 것과 견주면 큰 차이가 난다
그렇게 밤 두어 개를 노란 알이 드러날 때까지 정성으로 깐 다음 드신다. 어머니가 더는 밤에 흥미를 갖지 않자, 이번에는 목암이 바느질거리를 가져왔다. 뜯어진 개량한복 바지다. 어머니는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둡다. 아들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드리자, 어머니는 천천히 바느질을 한다. 곁에서 보니 엄청난 집중이다. 바느질은 집중하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바늘에 찔린다. 꿰맨 옷도 엉망이 된다. 중간에 실이 떨어지면 다시 목암이 실을 꿰어준다. 그때 어머니가 하시는 말.
“야야, 한꺼번에 바늘 두 개에다 다 끼워놓아라.”
그러자 목암이 놀란다. 어머니 목소리가 조용하다고. 이럴 때 어머니는 귀도 잘 들린다는 거다. 본인이 잘 들리면 말도 낮고, 안 들리면 목소리도 높아진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대로 정리되는 생각이 있다.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면 오감이 다 집중된다. 바느질에 집중하자면 우선 눈이 손끝에 집중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도 밝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 어떤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면 눈도 귀도 코도 활짝 열어두게 되리라. 그렇게 어머니가 여러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해서 일하니까, 중간에 목암이 운동 좀 해야 한다고 다리를 펴게 한다. 망상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할 때 온다는 걸 새삼 느낀다.
치매 어머니의 수제비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느질만이 아니다. 아주 많다. 최근 7개월 동안 어머니가 한 일만 대충 꼽아본다. 휠체어에 앉아 텃밭에 물을 주기도 했고, 뽕잎을 따서 차도 만들었다. 키질, 콩과 팥 가리기, 가죽 자반 만들기, 아카시아 꽃으로 효소 만들기, 오디 따서 오디술 담그기…. 어머니는 점점 자신이 생기시니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더니 한번은 마당에 목암이 쌓아놓은 나뭇단을 작은 손도끼로 잘게 잘라 불쏘시개를 만들 정도로 나아지셨다.
방안에서 자식이 주던 밥을 먹기만 하고, 똥오줌을 싸시던 어머니가 이렇게 달라지는 거다. 어머니가 달라지는 모습에 확신을 가진 목암은 이번에는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든다. 어머니가 차린 밥상이 먹고 싶다며 어머니를 설득한다. 메뉴는 수제비. 기본 밑 준비는 목암이 다 해두었다. 다시마국물을 마련하고, 애호박을 따오고, 칼도마와 기본 양념은 어머니가 언제든 쓸 수 있게 준비해두었다. 반신반의하는 어머니와 확신의 눈빛으로 다가오는 아들. 둘이서 수다를 떨면서 수제비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들은 어머니 곁에서 자잘한 심부름을 하며 보조해주자 어느 결에 수제비가 다 되었다. 어머니가 거의 20년 만에 손수 차리신 밥상이다. 모자는 그 감격에 겨워 수제비를 두 그릇씩이나 비웠단다. 나로서는 이 이야기를 곁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가슴이 뛴다.
“어머니가 똥오줌을 완전히 가리고 나서부터는 부쩍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 늘어났어요. 농담도 곧잘 하세요. 우리 어머니는 예전에도 위트가 있으셨거든요. 그게 차츰 살아나는 거지요. 그뿐 아니에요. 삶의 의지도 부쩍 살아나고 있어요. 이제는 제가 옆에서 부추기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고 해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하시는 말이 ‘우리 오늘은 뭐 하꼬? 뭐 해 먹을까?’ 그러시거든요. 하루 계획을 스스로 세워보는 거지요. 얼마나 놀라워요?”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목암이 새롭게 개발한 방식이 하나 있다. 바로 사진 찍기다.
“어머니 사진을 계속 찍어 인화를 해요. 틈날 때마다 사진을 꺼내서 어머니께 보여드리거든요. 알츠하이머 자료를 죽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병은 옛날 기억은 하지만 최근 기억은 전혀 못 한다고 하거든요. 사진 찍기는 최근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제가 나름대로 개발한 거예요. 한 달 전 기억을 소생하는 훈련이지요. 해 보니 정말 소생해요. 처음에는 못 알아보시더니 자주 하니까 일단은 자신을 먼저 알아보고 그 다음은 ‘너네’ 그러며 저를 알아보고. 다른 사람들도 두 번 세 번 본 사람은 언제 왔던 누구네 그런단 말이에요. 이 일을 겪으면서 ‘몸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우주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걸 다시금 확신했지요.”
목암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또 다른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어머니에게서 여성성을 발견한 거다.
“어느 분이 제게 도움말을 주었어요. 어머니는 엄마 이전에 여성이라고. 아들이 어머니 모실 때 꼭 마음에 두어야 할 부분이라고 알려주었어요. 수치심을 안 느끼게 해야 하며, 나이가 들어도 자신을 꾸미고 싶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거울을 드렸더니 정말로 어머니는 거울을 보시며 빗질을 하잖아요. 사람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서 선물로 손지갑, 쪽거울, 스카프, 반짇고리들을 가져다주었는데 어머니가 참 좋아하세요.”
자식에게 하는 반만 하자
병든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일은 의무감에 가까운 효심만으로는 어려울 듯하다. 어머니 모시는 데서 오는 그 어떤 깨달음과 기쁨이 있어야 서로 지치지 않을 것이다. 모시는 게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힘. 목암은 요리를 배우고, 자신에게 다가올 노년에 대한 공부도 저절로 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그는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그냥 제 어머니가 아니라 어떤 때는 신령님으로 비치기도 해요. 가르침을 주시고 저를 돌아보게 하니까요.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자면 제가 지쳐서는 안 되거든요. 무리해서 일하고 오면 어머니를 제대로 돌볼 힘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절대 무리해서 일을 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나를 잘 돌보는 게 돼요. 결국 어머니 모심이 나를 모시는 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내 노후도 저절로 보장되는 게 아닐까요?(웃음)”
우리나라도 점점 고령화 사회로 넘어감에 따라 노인성 치매도 늘어난다. 치매로 한 가정과 또 사회가 떠안아야 하는 비용이 적지 않다. 누구나 목암처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선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부모님이 치매라면 고민이 한 가정 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스스로 만족스럽게 모시지를 못하니까, 말 꺼내는 거 자체를 부담스러워하지요. 스스로 힘겨워하고 그러다 보니 형제간에 갈등도 적지 않고. 이제는 이를 드러내고 공론화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자식 키우는 정성에 반만 하면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거든요.
또 하나는 노인에 대한 무지가 극에 달했다 봐요. 늙어가는 몸과 마음 그리고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는 거지요. 노년의 삶도 전체 삶의 한 부분이잖아요? 아이들이 읽는 동화(童話)는 많지만 노인들이 읽을 만한 노화(老話)는 없거든요.”
그는 시간이 되면 노화(老話)를 직접 쓰고 싶단다. 또 노인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인터넷에는 ‘부모 모시기-자식 키우기 반만이라도(cafe.naver.com/moboo)’라는 카페를 열었다.
‘내적 연못’
그가 어머니를 이렇게 모시면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 곳에서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을 때는 이전 관계들을 다 정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별 무리 없이 저절로 다시 연결되더라고요. 제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리로 와요.”
그는 귀농운동과 관련해서 ‘시골 빈집 고쳐 살기 캠프’를 연 적이 있다. 참가자를 모으고 마을 이웃집 가운데 수리가 필요한 집을 골라 고쳐주었다. 여러 사람과 집 가까이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가는 걸 어머니가 보면서 어머니 역시 새롭게 사람들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참가자들과 헤어지는 걸 섭섭해할 정도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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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암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내게 남아 있는 말은 ‘전우주적 존재감’과 ‘내적 연못’ 그리고 ‘떠올림’이었다. 이런 말들은 명상과 관련이 있다. 늘 깨어 있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삶. ‘내적 연못’이란 우주에 널려 있는 다양한 기운 가운데 높은 기운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명상 상태를 말한다. 그런 단계로 나아간다면 굳이 말이나 글로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떠올림’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목암과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이따금 그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 모두 ‘내적 연못’을 잘 가꾸어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