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부의 공기업 감사들에 대한 시선은 따갑다. “감사들은 기관장 못지않은 억대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정치권 인사들의 ‘낙하산 천지’가 됐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러나 여권 실세 중 누가 감사 임명에 실제로 관여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이런 가운데 노사모 출신의 한 공기업 전직 감사가 자신을 감사 자리에 앉혀줬다는 여권 실세의 실명을 밝혀 주목을 끈다.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양시경씨.
노무현 정부에서 낙하산 인사 논란을 빚으며 취업한 53개 공기업 임원들의 평균 연봉은 1억4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홍문표 한나라당 의원 자료, 2007년 10월1일).
“노무현 정부 들어 공기업 임원진에 대한 무원칙한 낙하산 인사와 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고쳐지기는커녕 아예 면역이라도 된 듯이 최근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감사 기능도 당연히 마비될 수밖에 없다. 기획예산처 평가 보고서에 평가단으로 참여한 한 대학교수는 ‘공기업 감사-이사를 청와대와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로 채우는 바람에 방만·부실 경영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문화일보 2007년 10월2일자)
‘노무현 정치’에 실망한 노사모
‘공기업 감사 자리 중 상당수가 여권 실세의 입김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란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줄기차게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밀어준 쪽이나 받은 쪽이나 대개는 실질적 인선과정에 대해 함구한다.
지난해 12월1일,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양시경(梁時景·42) 당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이하 제주개발센터) 감사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직 내부의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제주개발센터가 제주시 서귀포시에서 3150억원대 헬스케어타운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특정인 소유 부지(495.900m2, 15만평)를 시세(평당 8만원)에 비해 과다하게 비싸게(평당 15만원) 매입하려 해 수백억원대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청와대, 건설교통부, 감사원도 이 문제 해결에 미온적이라고 주장했다.
노사모 출신의 공기업 감사가 노무현 정부와 자신이 소속된 공기업을 정면 공격하는 모양새여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기자회견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지난 3월9일 해임됐다. 양 전 감사는 자신에 대한 해임이 부당하다며 최근 건교부를 상대로 해임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양 전 감사는 최근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대통합민주신당 이광재 의원이 자신을 감사 자리에 앉혀준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때 자신이 열렬히 지지했던 ‘노무현식 정치’에 대한 실망과 좌절 때문에 지난해 12월 폭로 기자회견을 한 것이며, 같은 이유로 자신의 감사 임명 과정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고 했다.
▼ 노무현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
“19년 전 나는 제주대 학생이었는데, 국회로 노무현 의원을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모 기업의 제주시 탑동 매립 특혜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운동에도 몸담고 있었다. ‘5공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의원이라면 내가 하는 시민운동을 성심껏 도와줄 것 같았다. 이때부터 노 의원의 보좌관이던 이광재 현 의원과도 친하게 지내게 됐다.”
▼ 서울과 제주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노 대통령측과의 인연은 그 후에도 계속됐나.
“탑동 특혜 의혹은 단발성 사안이 아니었다. 8년을 끌었다. 그래서 노 대통령 측과의 접촉이 이어졌다. 대학 졸업 후에도 제주 경실련 등에서 시민운동을 했는데 노 대통령측이 강연 등의 일정으로 제주를 찾을 때면 만나곤 했다. 내가 고리가 되어 제주 기초의원을 지낸 L씨도 노 대통령, 이광재 의원과 잘 알게 됐다. L씨는 지방자치를 연구하는 모임을 만든 적이 있는데 지방자치에 관심이 많던 노 대통령이 그에게 강연을 맡기기도 했다. L씨는 2002년 대선 때 제주도 노사모의 핵심으로 노 후보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
“세상이 바뀌는 줄 알았다”
2006년 12월18일 부산일보사 강당에서 이광재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최근 정치 현황 및 미래 한국을 위한 참여정부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물론이다. 노무현 후보가 2000년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해 낙선하는 것을 보고 그를 더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기는 했으나 조직이나 돈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지지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노사모 회원이 1000여 명 있었지만 실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30명 정도였다. 나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사업도 병행했는데 2002년엔 제주 노사모 회원으로서 밤낮없이 노 후보를 위해 뛰었다.”
▼ 주로 온라인에서 뛰었나.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다. 내 돈 써가면서 노사모 회원들을 독려했다. 아무 조건이 없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이라고 본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바뀌는 줄 알았다. 얼마나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던지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70만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내 일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 벌금형을 받은 사유는.
“노무현 후보의 참신한 이미지를 부각한다는 차원에서 ‘자전거 유세단’을 만들었다. ‘희망’이라는 큰 글씨가 쓰인 쓰레기통을 매단 자전거 행렬이 거리를 곳곳을 다니면서 쓰레기도 줍고 노무현 후보 지지 캠페인도 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메시지. 순수한 의미로 한 건데 그게 선거법 위반이 되고 말았다.”
▼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만난 적이 있나. 노 대통령은 당선 직후 제주도에 내려가 펜션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노무현 당선자측이 나와 L씨를 불러줘서 제주도 휴가 기간 내내 나도 노 당선자와 함께 그 펜션에 묵었다. 노 당선자 일행과 횟집에 가서 회도 먹고 했던 기억이 난다. 펜션 주인이 대선 때 노무현 캠프에 찾아와 100만원인가 후원금을 냈다. 그런 인연도 있어 노 당선자가 그 집에 묵었던 것으로 안다.”
양 전 감사는 “대선이 끝난 후 나는 개인사업에 열중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선거운동을 한 동료들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질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공기업 등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고 한다. 양 전 감사는 2006년 7월10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감사에 임명됐다.
“이광재 의원측에 얘기했더니…”
▼ 어떤 과정으로 제주개발센터 감사가 됐나.
“감사 임명 2개월 전쯤 이광재 의원측에 ‘내가 제주의 개발 현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감사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나.
“이 의원측에 내 이력서를 제출했다.”
▼ 결과는 어떠했나.
“얼마 뒤 건설교통부 총무 파트에서 ‘제주개발센터 감사로 임명됐다’는 연락이 왔다.”
▼ 이 의원측 이외에 다른 곳에 이력서를 제출하거나 감사직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이 있나.
“이 의원측에만 얘기했고 이력서를 줬는데 감사에 임명됐다.”
▼ 건교부나 제주개발센터에 아는 사람이 있나.
“이 의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이 의원이 나를 감사로 만들어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광재 의원의 후광으로 공기업 감사가 됐다는 양시경 전 감사의 주장은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체험을 얘기하는 것인 데다 당시 정황과도 어느 정도 부합되는 면에 있어 사실로 볼 개연성이 있다. 이광재 의원측의 영향력이 아니었다면 제주도에서만 주로 활동해온 시민운동가 양시경씨를 건교부가 어떻게 알고 감사직을 맡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광재 의원측은 “양 전 감사가 밝힌 내용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양씨가 감사를 맡기 직전에 제주개발센터 감사였던 J씨도 열린우리당 제주도당 창당준비위 공동대표를 역임한 바 있는 여권 인사였다. J씨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나는 청와대 추천으로 감사가 됐다”고 밝혔다.
제주개발센터는 ‘제주국제자유도시기본계획’ 및 ‘제주특별시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제주도를 지원하고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개발전담기구로, 2002년 5월15일 설립됐다. 제주개발센터 감사의 연봉은 1억2000만원 정도이며 서울과 제주에 사무실, 승용차, 운전기사가 각각 제공된다. 감사 산하엔 감사실장, 건축부문 감리부장, 법률담당 부장, 공인회계사, 여비서 등 5명 정도가 배속된다고 한다.
제주개발센터는 건설교통부 산하 정부출연기관으로서 감사에 대한 인사권은 건교부에 있다. 그러나 양 전 감사와 J씨에 따르면 청와대와 이광재 의원 등이 제주개발센터 감사 인선에 실질적으로 관여해 친노(親盧) 인사를 내려 보낸 셈이다. J씨의 감사 임명과 관련해 논란이 일어 제주지검은 2007년 J씨를 소환조사하는 등 내사를 벌이기도 했다. J씨는 “검찰 조사를 통해 의혹이 모두 해소됐다”고 말했다.
“사적 문제여서 답변 않겠다”
양 전 감사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광재 의원을 알게 된 뒤 2002년 대선 때 제주 노사모 핵심으로 활동했고 노무현 당선자가 머물던 제주 펜션에 나와 함께 초대되기도 했던 기초의원 출신 L씨는,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한국마사회 본부장을 역임했다. ‘실세’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L씨는 “내가 마사회 본부장에 임명된 과정엔 오해할 이유가 없다. 사적인 문제여서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은 L씨와의 일문일답.
▼ 마사회 본부장에 임명되는 과정에 여권 실세의 추천이 있었다는데.
“나름대로 일들이 있어서…. 오해할 이유가 없다.”
▼ 마사회 본부장직을 맡아보겠다고 관계기관에 신청한 적 있나.
“없다.”
▼ 그런데 어떻게 본부장에 임명될 수 있나.
“사적 문제여서 대답하지 않겠다.”
▼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마사회 쪽에서 본부장직을 맡긴 것인가.
“그렇다.”
▼ 누가 본부장으로 추천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
“대답하지 않겠다.”
국회는 마사회에 “L씨의 본부장 임명 때 L씨를 추천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 달라”고 요청했으나 마사회측은 답변을 거부했다.
양 전 감사는 “나는 감사직을 맡은 이후로는 경영진과 각을 세우면서 견제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양 전 감사가 문제 제기를 한 것이 헬스케어타운 건이다.
제주개발센터는 3150억원이 투입될 헬스케어타운을 짓기 위해 제주도 서귀포시 동홍동 일대 30만평을 사들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제주개발센터는 한국감정원의 예비감정평가에 따라 평당 15만원대에 부지를 매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양 전 감사는 시세가 평당 8만원대에 불과하므로 감정평가액이 과도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그는 “문제점을 건교부 감사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에 알렸지만 제주개발센터를 제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그는 지난해 12월1일 기자회견을 열어 특혜의혹을 공개했다. 그러자 건교부는 ‘사실과 다르게 문제를 잘못 제기하고 직무상 비밀(표본 감정 결과, 사업부지 위치도)을 공개해 사업 추진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양 전 감사를 해임했다.
이후 제주지검은 헬스케어타운 의혹에 대해 수사를 벌였다. ‘신동아’가 입수한 지난 8월24일자 검찰 수사결과 자료에 따르면 검찰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제주개발센터측이 2006년 4월경 이미 내부적으로 동홍동 토지를 사업부지로 내정한 뒤 그 선정절차를 형식적으로 진행했다는 의혹이 있다 △한국감정원 직원들이 현장조사, 가격조사, 가격형성요인분석 등 필요한 절차도 생략하고 개략적이고 직관적으로 탁상 감정을 했다고 진술했다 △제주개발센터와 한국감정원의 감정의뢰 및 감정평가는 그 절차 및 내용상의 하자가 있어 평가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한국감정원의 감정평가 금액인 평당 15만원은 제주지방법원의 의뢰로 실시된 인근 토지 감정평가금액인 평당 2만496원과 7배 이상 차이가 난다 △제주개발센터가 토지보상액을 평당 15만원으로 의결케 한 다음 토지매수를 추진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래서 등 돌리는구나”
양 전 감사가 제기한 의혹의 대부분이 검찰 수사에서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다만 검찰은 ‘제주개발센터 측에 범죄의 의도성이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판단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제주개발센터 홍보실 관계자는 “중앙정부 위원회에서 ‘문제의 땅이 사업부지로 적격’이라고 하여 우리 실무부서에서는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그 땅을 고수한 측면은 있지만 특정인에 대한 특혜 차원은 전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헬스케어타운 사업은 투명성 확보를 위해 추진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했다. 사업 예정부지도 당초 계획에서 일부 수정됐다. 해임된 감사의 처지에서는 서운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양 전 감사는 “노사모의 한 사람으로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왜 떨어지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감사로 부임해 정부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본 뒤로는 ‘이래서 등을 돌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감사 시절 헬스케어타운 사업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광재 의원측에 요청해 감사가 됐지만 일단 일을 맡은 이상 직분에 충실하려 했다. 시민운동가로서의 정의감도 있었다. 수백억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봤기에 지나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모른 채 묻힐 뻔했던 헬스케어타운 사업의 투명성이 제고됐지 않았나. 정부로부터의 은근한 압박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 정부의 압박이란 게 어떤 것인가.
“정부의 한 관계자는 내가 위험물저장시설 사업을 한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헬스케어타운 사업 부지를 당신 사업장 부근으로 바꿔 땅값을 올리려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냐’고 했다. 서울에 사는 내 여동생이 제주도에 땅 450평 갖고 있는 것도 알고 있더라. 나도 여동생의 재산을 잘 모르는데…. 조그만 흠이라도 잡히면 도덕적으로 매장되거나 구속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기자회견했다는 이유로 해임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