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작곡가 이영조 - 텃밭 가꾸기

보는 재미, 먹는 재미, 나누는 재미!

  • 글·이설 기자 snow@donga.com / 사진·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입력2007-11-05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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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에는 손바닥만한 텃밭에서 시작했다. 상추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새싹 돋아나기를 기다렸다. 샛노란 싹들이 새끼손톱만큼씩 돋아나는 걸 보고 자연의 숨결을 잡은 듯 흥분했다. 한데 어느 날 배춧잎을 쏭당쏭당 파먹고 있는 배추벌레들을 발견했다. 농약을 사러 갈까 하다 멈칫했다. “잠깐, 배춧잎의 주인은 내가 아닌 배추벌레가 아닌가!” 날마다 텃밭에서 얻는 기쁨과 깨달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곡가 이영조 - 텃밭 가꾸기
    문 앞에는 논이, 집 뒤편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자리 잡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한국예술종합대학 작곡과 이영조(李永朝·64) 교수가 사는 곳이다. 100여 평(330여 m2)의 텃밭에는 고추, 감자, 상추, 토마토, 가지, 옥수수, 배추 등 갖가지 채소가 철따라 고개를 내민다. 이 교수와 부인 김정희씨는 저녁과 주말 시간을 이용해 이 작은 텃밭을 자식처럼 돌본다.

    “계절마다 이놈들을 수확해서 주변에 나눠주느라 바쁩니다. 올해에는 배추를 많이 심었는데 한두 달 뒤면 김장철에 맞춰 거둘 수 있을 거예요.”

    밀짚모자와 장화를 아무렇게나 걸친 이 교수가 고추와 호박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은 규모이지만 텃밭을 가꾸는 품새가 반쯤은 농부가 된 듯하다.

    그의 전원생활 경력은 짧지 않다. 14년 전 미국 시카고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 줄곧 시골에서만 살았다. 처음 그가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 광주군 초원면 학동리 동막골. 미국에서 두 자녀의 거처를 마련해준 뒤 몸만 달랑 들어온 내외에게 한 어른이 자신이 쓰던 시골집을 거저 줬다고 한다. 이 교수 또한 답답한 도시생활보다 바람이 있고 산이 있고 들이 있는 시골에 마음이 끌렸다.

    작곡가 이영조 - 텃밭 가꾸기

    제멋대로 자란 풀밭에서 대금을 불면 소리와 자연만 남은 듯한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작곡가 이영조 - 텃밭 가꾸기

    감자, 가지, 옥수수, 총각무…. 손바닥만하던 텃밭이 이제 여기서 거둔 갖가지 채소를 이웃에게 나눠줄 만큼 넉넉해졌다. 100여 평의 텃밭에는 그의 보물이 가득하다.(좌) 대학 시절에 만난 아내는 삶의 동반자이자 음악적 동지. 함께 정원을 가꾸는 재미가 쏠쏠하다.(우)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진 뒤 천안 시골에서 자랐어요. 원두막을 오르내리고 쥐불놀이며 갖가지 곤충을 잡으며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94년 10년 만에 서울에 돌아왔을 때 빌딩 빼곡한 도시 풍경에 가슴이 턱 막히더군요.”

    그는 전원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연의 소중함에 눈이 뜨인다고 했다. 사계절은 물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숲과 미물에 이는 미세한 변화, 하루에도 밤낮으로 달라지는 흙의 온도, 초목의 빛깔…. 상식적인 자연의 변화는 그를 매일 감탄과 감사 속에서 살게 했다.

    “자녀 교육 때문에 대부분 도시생활을 선호하지만 도시와 시골의 감성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도시생활하는 제자들에게 시골에서 산책도 하고 한적한 곳에서 낚시도 하도록 권했더니 작품이 한결 여유로워지더군요.”

    작곡가 이영조 - 텃밭 가꾸기

    이 교수가 작곡한 곡을 메조소프라노인 아내 김정희씨가 노래하고 있다.

    학동리 주변에 가구 공장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2000년 현재의 양지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교수는 날 때부터 음악과 가깝게 지냈다. ‘섬집아기’ ‘어머님의 마음’ ‘진짜사나이’ 등을 작곡한 고(故) 이흥렬 박사가 부친. 7남매 가운데 다섯이 음악을 전공했다. 이영조 교수의 부인과 두 자녀 역시 음악을 한다. 집 안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가족 몇몇이 모여 뚝딱 연주회를 여는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 시절까지 당연히 음악을 전공하려니 했다고 한다.

    “누님 여럿이 음악을 공부해 사실 저는 이과로 진학할까 했어요. 그런데 음악성이 흐르는 피, 환경은 어쩔 수 없나봐요. 자꾸 피아노 소리, 노랫소리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청년 못지않다. 아직도 새로운 곡을 쓸 때면 입술이 떨려올 만큼 흥분한다. 자신의 삶, 문학, 자연에서 느낀 감상을 악보로 옮길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앞마당과 뒷산에서 대금을 불고 거문고를 뜯는 것도 그의 큰 기쁨이다. 서양 음악을 공부했지만 국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피리, 장구, 단소 연주에도 능하다. 그의 작품이 ‘한국의 선율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조명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통역병 시절 만난 미군 사령관의 영향이 컸다.

    “통역을 해준 미군 사령관과 국악원에 갔습니다. 사령관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창(唱) 소리에 대해 묻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더군요. 오히려 우리 음악에 대해 그가 더 해박했습니다.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음악을 등한시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대 후 국악원에 들어가 국악을 배우기 시작했죠.”

    그는 “국악과 서양 연주 형태가 만났을 때 이를 어떻게 예술화할 것이냐가 요즘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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