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 팔아서라도 극빈자 치료해야…” 발언에 내부 반발
- “일부 병원, 제약사 리베이트 받았다” 방송 구설
- 독서광 ‘둔재 소년’, 증시에서 ‘블루오션’ 발견
- 외환위기, 대활황, 폭락, 재상승 시점 족집게 예측
- “2012년까지 주가지수 5000 간다”
- 부동산 폭등 지역 예상 적중…“하지만 나는 토지공개념 지지자”
- “돈, 벌 만큼 벌었다…장학재단, 장애인 재활시설 만드는 게 꿈”
국내 최대의 이익단체인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의 ‘공식 입’으로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 ‘시골의사’ 박경철(朴慶哲·42)씨가 10월1일자로 의협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불과 3개월의 짧은 기간이 “3년처럼 긴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오랜 여정을 마친 여행자처럼 지친 모습이었다.
조직에 들어간 반골 의사
박씨를 만난 곳은 그가 집필실로 사용하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입주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집기라곤 소파와 책상,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고작이었다. 주인조차 낯선 공간. 출판사에서 그의 집필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 얻어준 오피스텔은 새로 꾸민 공간 특유의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두고 시작한 인터뷰. 그는 짧은 대변인 생활의 소회로 말머리를 열었다.
“처음부터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요. 대변인과 공보이사 겸직 요청을 받았을 때 3개월에서 6개월만 대변인을 맡겠다고 미리 말했습니다. 생각보다 그 시기가 좀 빨랐지만, 계획대로 움직인 거지요.”
박씨는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흥미로운’ 사람이다.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주식 사이트에 글을 올려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한 주식 투자 전문가이고, 2005년에는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1, 2)’이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필명을 날렸다.
지난해에는 그가 펴낸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이 그해 각종 언론매체에서 경제분야 추천도서로 꼽히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한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특강요청이 쇄도하는 자기계발 전문가이기도 하다. 어느덧 한 달이면 50회의 강연을 하는 인기강사가 됐다. 이 외에도 각종 인쇄매체에 연재하는 칼럼이 20개가 넘는 베테랑 칼럼니스트이자 라디오와 TV의 여러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는 방송인이다.
한편으론 바이오업체의 경영에도 관여하면서 친구와 공동 경영하는 경북 안동 신세계연합병원에서 일주일에 사흘은 진료와 수술을 하는 외과전문의다. 의협 대변인을 맡은 후에는 일정이 바빠 진료를 잠시 쉬었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 이튿날 새벽부터 수술을 하고 오후에 서울로 돌아오는 강행군을 하며 의사로서의 소임을 챙겼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수십 권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의 식견과 실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재야의 숨은 고수’ 이미지가 강하다. 의사말고는 이 모든 재주를 ‘독학’으로 길렀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가 가장 보수적인 이익단체 중 하나인 의협의 감투를 쓴다는 사실은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한때 그는 “의료수가를 높이려고 종합병원들이 하지 않아도 될 수술까지 하고 있다”며 의료계에 일침을 놓은 ‘반골 의사’였다.
그런데 인터뷰를 요청한 시점과 인터뷰가 이루어진 일주일 사이에 그는 신분이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의협 대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변인이 되기까지
다종다양한 직업을 가진 박경철씨. 그의 달력은 각종 일정 메모로 빡빡하다.
이후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면서 박씨는 대변인으로 기용됐다. ‘전격적’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의사 사회가 배출한 걸출한 스타를 대변인으로 기용한 의협의 판단은 일단 성공한 듯 보였다. 그가 대변인을 맡기 전에는 의협에 대변인이라는 직함이 있는지, 의협이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도 별반 없었다. 그러나 박경철이라는 인물은 의협을 눈에 확 띄는 단체로 만들어 놓았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의 변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쉬울 것 없는 그가 왜 말 많고 탈 많은 의협에 들어갔는지 의문스러워하는 이도 많았다.
“의사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냉혹했습니다. 의사가 정치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로비로 둔갑했고 그러다 보니 건강한 소통로마저 막히고 말았지요. 언론이나 대중에게 비교적 거부감이 덜한 제가 대변인을 맡아 ‘소통의 광케이블’을 복구해주길 바랐던 겁니다.
저라고 왜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의사 사회에 빚을 진 사람입니다. 의사였기에 여러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의사 사회가 준 무형의 도움들이죠. 사람들은 의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의사 집단에는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는 데 제가 활용될 수 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새 지도부의 대변인이 되면서 박씨가 벌인 첫 번째 일은 정부가 추진하는 새 의료급여제도에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다. 특히 의협과 대립각을 세우던 18개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반대투쟁을 벌인 것은 모두에게 의외였다. 빈곤층에 대한 진료제한을 통해 국가재정의 누수를 막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사실 시민단체가 막을 일이지 의협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신선한 반향이 일었다.
‘좌파세력의 주구’
“시민단체와의 협력은 무리라는 내부의 반대를 잠재우고 제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소비자인 시민단체와 공급자인 의협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지요. 처음 시민단체 대표들에게 공동 대응을 하자고 제의하자 그들은 ‘의협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다행히 제 책의 독자인 그들이 호감을 갖고 대화에 임하고 우리의 진정성을 인정하면서 손을 잡게 됐죠. 결과적으론 실패했지만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고 자평합니다.”
그런 진보적인 목소리가 의협 전체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병원을 팔아서라도 극빈자에게선 진료비를 받지 말자”는 그의 ‘옥쇄 주장’이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강경파로부터 ‘트로이의 목마’니 ‘좌파세력의 주구’니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 싸움에서 의협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박경철이라는 개인이 의사협회의 상징성을 지닌 것처럼 비쳐져 힘들었어요. 의협의 의견을 물을 때면 모두 제게 몰려왔습니다. 전체의 결정을 전달하는 대변인임에도 언론의 포커스가 개인에게 맞춰지다 보니 대표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 거죠. 그게 제겐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조직 내부에 그런 저를 고깝게 보는 이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박씨가 의협 대변인으로서 치른 두 번째 싸움은 성분명 처방 반대투쟁. 이 역시 별 성과 없이 그에게 열패감만 안겼다. 이 때는 오히려 시민단체와 논리의 궤를 달리하며 반대편에서 입씨름을 해야 했다.
“성분명 처방 반대는 조직의 논리가 아니라 제 소신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박경철도 별수 없다. 조직에 들어가니 집단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만 싸운다’는 말이 들려왔어요. 저는 진료현장 경험을 통해 카피 약(복제 약)은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건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된 문제죠.
‘의미 있는 실험’
주식투자는 더는 하지 않지만 그는 주식 투자 전문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성분명 처방 반대투쟁 과정에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을 때였다. 성분명 처방 반대 논리를 펴던 그에게 사회자가 “리베이트 때문 아니냐?”고 묻자 “리베이트 관행이 일부 있었음”을 인정한 대목이 문제가 됐다. 의사협회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공론화를 통해 개선점을 찾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갈등의 불씨를 키운 셈이 됐다. 사실 의협 집행부에서는 잘못된 관행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통해 먼저 변화를 꾀하자는 분위기였지만, 조직논리를 앞세운 일부 비판세력의 비난은 거셌다.
그는 “애초부터 대변인을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의 사퇴 배경에는 분명 이런 내부 갈등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의협 공보이사 직함을 달고 있지만 이 또한 올해 말까지만 맡을 계획이다.
“‘내가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나를 사랑하게 하라’는 게 제 신조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게 하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차선이 협상이지요. 협상은 잘 해야 절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가 싸움이지요. 의약분업 갈등 이후 의료계는 많은 것을 잃었고, 그로 인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정부 정책은 자꾸만 의료계를 압박하고, 의료계를 지지할 국민적 공감대도 없는 상황에서 의사 사회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들이 작정하고 딱 1년만 진료현장에서 따뜻하고 친절하게 환자들을 만난다면 국민은 의사의 편이 될 겁니다. 우리의 소리를 듣게 될 거고요.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이해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과거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양새야 어떻든 박씨의 ‘짧은 대변인 생활’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의협에 들어갈 때 그가 우려했던 부분은 현실이 되어 그를 옥죄었다.
“가시방석이었죠. 9월 초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퇴 선언을 한 뒤 의사 사회에서 유임 청원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만큼 제 진정성을 알아주는 분이 많다는 거죠. 물론 노골적으로 사퇴를 요구한 이들도 있고요. 결국 떠나는 것이 전체를 위해 좋겠다는 판단을 했지만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의협의 변화에 제가 작은 불씨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 자신을 모두 던졌습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실험이었죠.”
주식판 떠나야 돈 번다
박씨의 또 다른 면모는 ‘주식 투자 전문가’다. 그는 의협 대변인을 맡기 전 주식시장을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금융기관과 애널리스트, 증권투자 분석가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그 분야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다만 투자자의 위치에서만 벗어났을 뿐이다.
“개인투자자 가운데 5%만 시장에서 살아남습니다. 최근 3년 동안은 개미 투자자도 증시 호황을 타고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벌어야 얼마나 벌었을까요. 주식이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돈을 벌어야 수익을 낸 것입니다. 도박판의 생리와 같죠. 개미 투자자들은 수익을 내면 내는 대로, 잃으면 잃은 대로 주식시장을 못 떠납니다.
그런 순환이 계속되면 결국 돈을 버는 곳은 매매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증권사뿐이죠. 저는 1990년대 후반에 기록적인, 아니 기적적인 수익률을 올렸습니다. 남이 상상도 못하는 수익률이었죠. 그리고 지금까지 매년 수익을 냈습니다. 적지 않은 돈을 벌었죠. 제가 계획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한 거죠. 그러자 주식 투자에 흥미가 사라졌고 자연스럽게 떠나게 됐습니다.”
투자는 기술이 아니라 맥락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주식 투자에서 발을 뺀 후) 이제야 수익을 낸 것이다. 그가 주식 투자를 접은 것은 더는 주식 투자로 돈을 벌 수 없다는 판단 때문 아닐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는 주식시장의 미래를 밝게 본다. “앞으로 주가지수는 5000포인트를 기록할 것이고, 2012년까지 그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 지금 다시 투자에 뛰어든다 해도 많은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 그러나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것이 주식에서 승리하는 길”이란 믿음에 과감하게 빠져나왔다. 물론 주식과 금융시장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지만.
도대체 그는 얼마를 벌었을까. 그는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액수가 일반인이 상상하는 금액보다 크다는 건 분명하다. 그 돈은 누가 뭐래도 그 자신이 노력해서 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계획을 위한 밀알이 될 것이다. 그는 왜 주식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저는 둔재입니다. 외과전문의가 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했지요. 제가 한 노력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의대 시절 제 성적은 잠 안 자가며 공부해도 겨우 중간에 머물렀습니다. 최고의 외과의사가 되기는 틀렸구나 생각했죠. 그래도 의미 있는 사람은 되고 싶었습니다. 본과 1학년 때 선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타임’과 ‘이코노미스트’의 의학 코너를 독해하는 ‘메디칼 잉글리시’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학 분야만 읽고 버리기 아까워 이것저것 훑어보니 금융과 주식 투자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당시 미국이 증시 활황이었는데, 10~20년 후에는 우리나라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죠. 똑똑한 친구가 너무 많은 의학에 비하면 당시만 해도 눈여겨보는 이가 드문 이 분야를 공부한다면 승산이 있겠다 싶었어요. 그때부터 외국에 나가는 선배나 친지들에게 부탁해 책을 구해 보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20년 전, 그는 그렇게 다른 길을 준비했다. 요즘 말로 블루오션을 찾아낸 것이다. 애널리스트니 펀드니 하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때였으니 어지간한 전문가보다 일찍 주식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대학 졸업 후 인턴을 하면서 주식 투자를 시작했는데, 10년 동안 실패의 쓴맛만 봤습니다. 10년을 깨지고 나서야 잘못을 알았죠. 투명하지 않은 한국 기업에 투자하면서 미국식 투자론을 적용했으니 깨지지 않는 게 이상한 거죠. 1990년대 중반부터 투자 방법을 바꾸면서 숨통이 틔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외환위기를 예견하는 글을 썼고, 그 예측이 맞아떨어지면서 유명세를 타 각종 주식 사이트에 글을 올렸습니다. 1990년대 후반의 대활황, 2002년의 폭락, 그리고 2005년부터의 상승 등 증시 흐름의 맥락을 잡는 예측들이 다 맞아떨어졌죠. 그 시절 정말 열심히 글을 썼는데, 제가 마치 독수리 5형제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시장에서 늘상 깨지기만 하는 개미 투자자들을 지켜야 한다는 정의감 같은 게 있었어요.”
주식시장에서 개미 투자자는 외국인이나 기관투자가들과 맞붙어 수익을 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일반인 사이에 간접투자 상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젠 개인의 시대가 아니다.
“일반 투자자들은 ‘현실의 결핍’을 주식 투자에서 채우려 합니다. 그런데 주식시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죠. 잉여를 가지고 투자해야 여유가 생깁니다. 출발이 잘못되다 보니 조급해지고 자꾸 허방을 밟는 거죠. 그래서 원칙 없는 투자의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투자의 원칙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원론적인 주식 공부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지금 당장 시장에서 승리하는 법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개인투자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종목이 무엇인지 물었다.
토지는 투자 대상 아니다
“투자는 기술이 아니라 맥락입니다. 큰 흐름을 좇아야 해요. 1990년대 후반의 호황기는 꿈의 시대였습니다. 꿈과 벤처정신이 지배하던 코스닥에서 엄청난 수익이 발생했죠. 2003년부터는 저평가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러자 가치주들이 주목을 받았어요. 조선주와 증권주처럼 저평가된 회사의 주식들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7년부터는 재평가의 시대가 왔습니다. 거품이 꺼지고 시장에서 꿈과 희망을 가진 종목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지금은 돈의 시대입니다. 생산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어주는 시대가 됐습니다. 투자금융 쪽이 유망하다고 봐요. 이와 더불어 에너지, 바이오, 환경, 레저, 엔터테인먼트가 시장의 주도주가 될 것입니다. 공격적인 투자자라면 2008~2012년까지 시장을 주도할 바이오를 추천하고, 보수적인 투자자라면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통신과 전력에 역발상 투자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는 주식 투자를 접었지만 자신의 예측과 시장 흐름이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할 마지막 포트폴리오는 유지하고 있다. 그가 남겨둔 최후의 종목은 LG생명과학, 한국전력, KT, 현대중공업, 삼성증권, SK케미칼 등이다. 현대중공업은 너무 올라서 얼마 전에 처분했는데, SK케미칼도 곧 처분할 계획이다. 목표수익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2012년까지 보유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가파르게 올랐다. 다른 종목들도 가능하면 오랫동안 가져갈 종목들이다. 한마디로 ‘10년 후에도 망하지 않을 기업’들이다. 물론 배당도 고려했다.
주식 외에 그가 보유한 자산은 액수를 밝힐 수 없는 현금, 친구와 동업하는 병원, 안동에 있는 시가 1억5000만원짜리 221.5m2(67평) 아파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약간의 부동산(투자 목적이 절대 아닌)이다. 투자의 귀재인 그는 부동산에 투자해 수익을 낸 적이 없다. 한국에서 가장 빨리 돈 버는 방법이 부동산이었다는 점에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동산 경기를 예측하는 글도 썼습니다. 오히려 주식보다 더 정확하고 예리한 경우가 많았죠. 1990년대 후반 반포 재건축 아파트나 경기 파주 북부 지역의 가격 폭등도 제가 가장 먼저 예측했어요. 그런데 부동산은 합목적성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땅은 공공재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땅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땅은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이고 다시 후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시장원리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땅만큼은 정부가 나서서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지공개념을 지지합니다.”
스무 살의 약속과 마흔의 꿈
대변인 자리를 떠난 박씨는 홀가분해 보였다. 그의 인생에 예기치 않게 끼어든 3개월. 그는 그 공백을 미뤄둔 강연계획과 집필 일정으로 채울 예정이다. 환자들이 기다리는 안동의 진료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가장 행복한 일이다. 대변인의 마이크보다는 외과의사의 메스가 그에겐 더 편안하다.
박씨가 고향 안동의 ‘시골의사’가 된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고향에 터를 잡기 전 그는 대전 예수병원 외과과장을 지냈고, 대전에서 중앙성심외과를 개업해 진료했다. 그 병원은 하루 500명의 환자를 볼 만큼 문전성시였다. 5년 동안 병원을 운영하면서 진료 횟수에서 의원으로는 전국 8위, 의사 개인으로는 3위를 기록했다.
“고향 친구와의 약속 때문이었죠. 학교는 달랐지만 둘 다 의대를 갔습니다. 의대에 진학한 후 처음 만났을 때 스무 살의 청춘 둘이서 ‘우리 나중에 마흔이 되면 고향에서 함께 병원하면서 재미있게 살자’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습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그 약속은 지상명령처럼 굳어져갔습니다. 그래서 계획보다 빠른 서른여덟에 같이 안동에 병원을 냈습니다.”
그렇게 안동에 터를 잡고 다섯 해가 지났다. 그 기간에 박씨는 유명인이 됐다. 그러나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당연히 의사를 택할 겁니다. 저는 많은 죽음을 목도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압니다. 가끔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진저리 치도록 행복할 때가 있습니다. 의사가 아니었다면 깨달을 수 없는 진리지요.”
그가 얘기하는 죽음 중에는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아버지의 죽음도 포함돼 있다.
“제겐 목표가 없습니다. 49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정신적 강박이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준비해놓지 않은 채 어머니와 자식을 남겨놓고 떠나는 가장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겨진 가족 걱정에 눈을 감는 것이 속 터지도록 답답했을 것입니다. 나도 아버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살았습니다. 무슨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준비를 해두고 싶었을 따름이지요.”
목표가 없다고는 했지만 그에겐 ‘가능하면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다. 주식 투자로 적지 않은 돈을 모은 것도 이루고픈 두 가지 계획 때문이었다.
“‘개천에서 용 만들기 프로젝트’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장학재단 사업이 첫 번째 꿈입니다. 저는 과외가 금지된 시대에 태어났기에 개천에서 이무기라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습니다. 삶의 격차가 곧 꿈의 격차가 돼버렸다고 할까요.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3년 전부터 전국의 학생들을 불러 2박3일간 안동 종갓집에서 숙식시키며 강연과 강의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장애인 재활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중증 장애인은 국가가 어느 정도 도움을 주고 있고, 경증 장애인은 타인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경증과 중증 사이에 있는 사람들과 가벼운 정신지체장애인들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죠. 재활에 조금만 신경 써주면 이들도 사회의 일원으로 설 수 있어요. 언덕 위로 올려다주면 가속도가 붙어 달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위한 시설을 짓고 싶습니다.”
‘의사 박경철’에게 진료가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듯 ‘작가 박경철’에게는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일이 거를 수 없는 숙명이다. 그는 말 그대로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고,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소년, 도서관 책을 모두 읽다!
“문학소녀였던 어머니 덕에 경찰관 아버지의 박봉에도 집에 책이 많았습니다. 다른 어머니들은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때 저희 어머니는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셨죠.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때는 시골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다 그랬죠. 그런데 하필 전학을 간 동네가 대구에서도 부자동네로 손꼽던 곳이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우리 집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책이 방안 가득했죠. 머리를 꽝 때리는 문화충격을 받았죠. 그 후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고등학교와 같이 있는 학교였습니다. 도서관에 책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책을 중학교 3년 동안 다 읽었습니다. 수업만 끝나면 도서관에 달려가 밤 12시까지 책을 읽었죠. 저의 지적 방랑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광적이다 싶은 독서 습관은 지금도 여전해 손에서 책을 놓을 줄 모른다. ‘TV 책을 말하다’는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기도 했다.
“나쁘게 말하면 취향이 없고, 좋게 말하면 걸림이 없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의 독서편력을 ‘질환’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런 제게도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있습니다. 시간 때우기로는 읽지 않는다는 겁니다. 재미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미로 따지자면 책 읽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뭔가를 얻기 위한 독서습관이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엔 마조히스트적(피가학적)인 글 읽기를 하는 편입니다. 제가 보기에 좀 버거운 책을 고르는 거죠. 그렇게 점점 난해한 책을 읽다 보면 지적 욕구들이 해소되고 세상을 보는 눈도 커집니다.”
무미건조한, 그러나 진정 행복한
지치지 않는 지적 욕구(광적인 독서)는 그에게 또 다른 재능을 선사했다. 글 쓰는 재주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규모의 창작대회에서 소설 부문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할 수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매일 글을 쓴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지금껏 그가 만나온 소시민들의 모습을 투영한 에세이도 곧 나온다. 또한 올해 안에 두세 권의 경제 에세이와 자기계발서를 출판할 예정이다. 평소에 써놓은 글들을 간추리고 다듬는 과정만 남았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원고 독촉 전화에서 친구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 의협 관련 전화, 마흔에 얻은 늦둥이 딸의 전화까지 수시로 벨이 울렸다. 세 살배기 딸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지며 ‘닭살 아빠’가 됐다. 대학 시절 의대 동기동창으로 만나 결혼한 아내도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안동에서 환자들을 본다.
그는 무척 바쁘고 다재다능하다.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한다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는 술, 담배, 여자, 도박, 골프에 시간 빼앗길 일이 없어 무미건조한,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일도 오락이 됩니다. 밥벌이가 아니라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힘든 줄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