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0리 열하행의 종반 레이스다. 고북구에서 반간방을 거쳐 마침내 건륭의 고희연이 열리는 열하에 닿았다. 이곳에서 엿새 머무는 동안 연암은 청나라 사람들과 두 나라의 역사와 예속을 논하고, ‘태학유관록(太學留튽錄)’을 남겼다. 청나라의 거만함과 무례함에 사절단 일행이 진땀을 빼는 와중에도 연암은 두루 여행할 기회를 엿보고, 달밤의 정취에 빠져들었으니 기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난 여름, 세 번째로 이 여정을 답사했다.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내일이면 조선은 물론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의 관심을 모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이궁(離宮)에 도착한다. 멀리 조선 반도의 한양으로부터 바리바리 싸 온 공품을 올리면서, 우리 정사·부사·서장관 3사가 꾸벅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3배9고두(三拜九叩頭), 그 진하(進賀)의 예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절을 위해 300명의 수행이 장마를 뚫고 일망무제의 들판을 건너왔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육체만 소진하는 싸움이 아니라 조선의 국력과 자존심을 쏟으면서 의식과 사상 그 모두를 투여하는 싸움이었다. 크게는 조선과 청, 두 나라의 정치·경제·풍속·문화·군사·제도 등의 두드러진 차이로부터, 작게는 현실 외교와 전통 외교, 성리학과 실학, 화이론(華夷論)적 명분론과 유정유일(唯精唯一)의 실세론, 훈척(勳戚)파와 서민파, 권위주의와 실용주의, 고문(古文)정통과 문체자유, 신분주의와 인간주의의 크고 작은 모순과 갈등을 연암은 도강(渡江)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4일 동안 아프도록 삭여온 것이다. 말하자면 신체적 피로 외에도 겹겹의 스트레스와 갈등을 떠안았던 것이다.
연암은 그날 일기에 “눈시울이 구름장처럼 무겁고 하품이 조수 밀리듯 한다”고 했다. 안장에 기대니 포근한 잠이 엉겼고 아롱아롱 꿈속에 둥둥 흔들리면서 취중의 세계, 몽중의 세계를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환상인가. 연암은 그 경지를 종교나 철학에 견주었다. 도가(道家)로는 내관(內觀), 곧 자기의식을 의도적으로 성찰하는 수행에 견주었고, 불가(佛家)로는 팔십일난이나 사백사병(四百四病) 등 중생이 도를 터득하기 위한 온갖 장애와 질병의 극복에 비유했다. 연암이 이러한 고난의 연속, 그 수렁을 차라리 장주(莊周)도 호접(蝴蝶)도 아닌 꿈나라로 여기면서 즐기는 여유는 초극(超克)적인 정열의 향연이랄 수밖에 없다.
청의 영악한 봉공체제
고행의 끄트머리에서 연암은 깔깔거리며 묘안을 꺼내 보인다. 때마침 길가에 뒹구는 돌을 보고 맹세했다.
“내가 어느 날, 연암으로 돌아가면 꼭 천일 하고도 하루를 더 자리라. 그래서 송나라 때 은사였던 희이(希夷) 선생보다 하루를 더 잘 것이며, 자다가 천둥처럼 코를 골아서 음식을 들던 영웅들이 그 젓가락을 떨어뜨리게 하리라.”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연암은 ‘막북행정록’을 마무리하는 노상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뜻밖에 아니꼬운 장면과도 맞닥뜨렸다. 이틀 전 깊은 밤,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넜던 백하에서 자기가 모는 말 발굽에 밟혀 뒤처지며 통곡하던 창대를, 천하 만방의 조공이 모여들어 수레바퀴가 마치 비바람 치듯 쏴쏴 쿵쿵거리는 어도(御道)에서 만난 것이다. 하나는 이가 빠질 만큼 반가운 상봉이요, 또 하나는 눈이 비뚤어질 만큼 뒤틀리는 일이었다. 보라! 누구는 나흘 동안 뜬눈으로 죽자 살자 험한 강을 건너는데, 누구는 말, 낙타, 노새들을 총동원해 길을 꽉 메운 채 가고 있었다.
그 시절 청나라의 ‘종번(宗藩)관계’와 ‘봉공체제(封貢體制)’는 갈수록 영악스러웠다. 이웃 나라에 군신관계를 강요하면서 책봉을 비롯해 연호와 인장 등을 관장했다. 청나라의 주요한 경절은 물론 철따라 조공의 빈도를 늘려 딴에는 인방(隣邦·이웃 나라)과의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미명을 붙였다. 저들의 궁궐이 북경에 있어 누런 기와의 물결을 구름처럼 일으키고 있음에도 새북 땅 먼 먼 700리 밖에 행궁을 떡 벌어지게 지어놓고도 그 궁궐 이름을 굳이 ‘피서산장’이라 붙여 내숭을 떠는 까닭, 더구나 황제가 그 피서산장에서 고희연을 베푼다며 온 천하 사절들을 불러들이는 까닭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8월9일 사시(巳時)에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쌍탑산과 봉추산을 먼발치서 보았다. 황실은 조선 경축사절을 태학(太學)에 배치했다. 겹처마에 누런 기와를 얹은 대성전(大成殿)과 대성문(大成門), 대성전의 우측 담 밖에 명륜당(明倫堂), 당 앞에는 행낭이 늘어서 있었다. 오른편에는 진덕재(進德齋)와 수업(修業)재, 왼편에는 일수(日修)재와 시습(時習)재가 들어섰다. 다시 명륜당 뒤로 벽돌의 대청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재실이 있어, 우재에 정사, 좌재에 부사, 별재에 서장관을 들게 했다.
조선과 청의 역사·문물 비교
고북구 열하로 가는 중간지점에 새로 중수한 만리장성이 지나고 있다. 금산령(金山嶺)이라 한다.
태학관 생활은 연암보다 먼저 유숙한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토론으로 시작됐다. 대리(大理)에서 온 통봉대부 윤가전(尹嘉銓)을 비롯해 조선에서 온 귀주(貴州) 안찰사 기풍액(奇豊額)과 왕거인(王擧人) 민호(民?) 등이 연암과 대담을 나눴다. 토론의 주제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았다. 천문, 건축, 목축, 종교, 음악, 문학을 넘나들었다. 그중 17세기부터 조선에 일기 시작한 지전설 같은 천문학이나 황교(黃敎) 같은 새로운 종교 파문이 주의를 끌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역사나 문물 비교는 비록 단편적이긴 해도 두 나라 문화사 정리나 역사관 정립에 시사한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연암은 상고사로부터 현대사까지 그 대강을 요약했다. 먼저 우리 고대사를 거론하면서 기자조선이 주나라 무왕(武王)의 봉강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당시 진(秦)나라가 연(燕)족을 거느리고 조선에서 편거(偏據), 곧 일부 점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 국토 또한 요동땅을 포함 5000리에 뻗었던 것이 중고(中古)시대에 들면서 5000리 미만으로 줄었다가 고려 이후 연암 당시까지 3000리를 지켰노라고 했다.
그리고 연암은 당시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송나라의 문화와 예속을 따르는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인했으나 중국 역사에 기록된 조선의 문물이나 예술은 오늘의 조선이 아니고 기자·위만 때의 그것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중국의 편견을 지적했다.
연암은 종착지인 열하에서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과 모순에 줄곧 시달렸다. 태학에 들어온 날, 군기(軍機·청나라 황제의 고문부)의 장경(章京·공문 수발을 관장하는 관원)이 와서 황제의 조서를 전달했다. 다름 아닌 건륭 고희연 자리에 참석할 조선 정사의 반열, 그러니까 외교 의전상 위치를 지정한 것이었다. ‘우반 이품말(右班 二品末).’ 그러니까 우열의 2품품관 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청나라의 생색이 남세스러울 정도다. 조선 사절을 우반에 세우는 것은 전에 없던 특전임을 강조하고, 한술 더 떠 그 은총에 황감하다는 말씀을 예부에 올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 그 감사의 뜻을 황제께 상주하겠다는 것. 조선 사절이 머뭇거리자 독촉을 빗발치듯했다. 조선 사절은 할 수 없이 예부에 글을 올렸다. 황제의 은총에 감격한다고 말이다.
티베트의 성승은 중국인?
그렇게 뜻에 없는 감사를 올리고 속이 뒤틀린 판에 또 한번 벼락이 떨어졌다. 국책을 흔들 만큼 엄중한 일이었다. 8월10일, 건륭황제의 조찬에 초대받고 조선 정사와 부사가 궐내에 들어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었는데, 그날 밤 군기대신이 정사를 예방해 또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티베트의 라마 성승(聖僧)을 만나보지 않겠는가?” 하고. 날벼락이었다. 참모들의 불평이 들끓었다. 정사는 어이가 없었다. 청나라에 외교 사절로 와서 청나라 아닌 비방교국(非邦交國)의 지도자를 임의로 방문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그런데도 군기대신은 “티베트의 성승은 중국인이나 다름없다”며 압박했다.
여기서 연암의 천의무봉한 상상이 또 한번 나래를 폈다. 만일 우리 정사가 라마 성승 만나기를 막무가내로 거절한다면? 청나라의 대(對)사절 조치는? 이 일로 우리 사절을 중국의 저 귀퉁이, 운남이나 귀주로 귀양살이 시킬지도 몰라? 그럼 나도 덩달아 구경 길에 오를지도 모르지! 의리로 보아 혼자 귀국할 순 없잖아? 강남땅은 물론 광동땅 월남땅 서쪽땅까지 밟아보리라고.
연암은 손가락으로 하늘에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사절단은 난제를 만나 끙끙 앓는데 연암은 철없이 구경할 생각으로 시근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튿날, 피서산장에서 황제를 알현한 뒤 라마를 예방하고, 그 답례로 금부처 하나 받는 것으로 날벼락은 마무리됐다.
봉건예속에 대한 비판
길상법희전. 1780년 반첸이 거처하던 곳.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후당에서 곡정과 그의 친구 장성을 만나 두 나라의 혼례 얘기를 나누던 중 곡정이 난데없이 조선 자랑을 듣고 싶어 했다. 연암이 주저 않고 ‘사가(四佳)’, 네 가지 장점이 있노라 했다. 첫째는 유교를 숭상함이요, 둘째는 수재가 없음이요, 셋째는 물고기와 소금을 자가 생산함이요, 넷째는 아낙네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함이라 했다. 연암의 어조는 당당했다. 듣는 이들은 모두 “낙국(樂國)”이라고 찬탄했다. 그러면서도 네 번째 ‘여불경이부(女不更二夫)’ 조항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냈다. “온 나라가 그런가?” 하면서 법령으로 금지하는지 물었다. 연암은 법령이 따로 없지만 명색이 선비 집안이면 삼종(三從)의 덕을 지키고 산 지 벌써 400년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곡정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불경이부’ 같은 관습의 폐단과 그 비인도성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그보다 더 심한 예를 들었다. 옛날 중국에는 납폐를 하고도 성례를 안 했거나 성례를 하고도 합방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평생 수절을 했다고. 그것은 약과라고 하면서 친교가 두터운 집안끼리는 뱃속에 든 아이끼리 구두로 혼사를 정했다가 불의의 일로 사내가 죽으면 어린 색시가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게 하여 한 무덤에 집어넣는 해괴망측한 일을 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주검을 따라 바람이 났다 하여 ‘시분(尸奔)’이라 욕질했고, 절개 지키는 화냥질이란 의미의 ‘절음(節淫)’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들의 봉건 예속에 대한 비판은 열렬했다. 눈 속에서 죽순을 캐고 얼음덩이를 깨 잉어를 잡아다 부모를 공양하는 효도로부터 자신의 가슴을 갈라 염통을 꺼내 어머니 병환을 치유했다는 희생적인 효도,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바다를 건너다 빠져 죽거나 외군에 잡혀가 기름에 튀겨 죽임을 당할지언정 끝내 굴복하지 않은 충렬. 이러한 것들이 반인도적인 충·효라고 꼬집었다. 지나친 충·효는 오히려 천도를 문란케 한다고 힐난했다. 혼·상과 충·효에서 인간주의와 실학이 강조되는 건, 조선의 성리학적 예속사회를 흔들어 깨우는 물결이었다. 여기서 연암은 중국이 탈봉건·인간 회복의 의식운동에서 한걸음 앞섰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두액, 구액, 족액
다음 라운드에선 연암이 선공을 취했다. 중국 부녀들의 전족을 물고 늘어졌다. 중국 여인의 활 굽정이 같은 신발과, 바람도 없는데 넘어질 듯 뒤뚱거리는 걸음을 호되게 비꼬았다. 곡정은 솔직했다. 그 역시 전족을 비판했다. 오대(五代) 때부터 전래한 이 악습은 명나라 때 엄금했지만 없어지지 않는다면서. 오랑캐들은 한족 여인네의 전족이 남자들에게 음탕한 생각을 품게 한다거나,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한족이 지닌 민족적인 긍지 때문이라는 등 억측이 난무했다.
이때 곡정은 ‘삼액(三厄)’을 지적했다. 연암의 ‘사가(四佳)’에 상대적이었다. 삼액은 이러했다. 머리카락을 그물 속에 갇히게 하는 망건은 두액(頭厄)이요, 천하의 독초를 태워 가슴과 머리를 자극하면서까지 무례한 몸짓으로 혼탁하게 연기를 뿜어내는 흡연을 구액(口厄)이라 할 것이요, 위에서 말한 대로 한족 여자들이 발을 싸매는 것을 족액(足厄)이라 할 것이다. 머리와 입 그리고 발을 구속하거나 마비시키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사고와 호흡, 행동의 자유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곡정의 ‘삼액’은 중국의 병증을 들추어내는 진단인 것이다.
연암은 여기서 장군 멍군했다. 곡정과 ‘사가’니 ‘삼액’이니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무언가 굼실거리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친김에 자신을 포함해 조선 사람의 껍데기를 벗겨 그 속살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에피소드 두 토막을 꺼내었다. 그 하나는, 열하에 도착한 날 통봉대부 윤가전이 우리 정사를 만나러 의관을 갖추고 태학관에 왔을 때다. 윤씨는 명함을 전하면서 그 내의를 밝혔지만 정사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만나기를 꺼렸다. 나이 많은 윤씨가 밖에서 오래 서 있다가 돌아갔는데 연암은 이 기회에 조선 대관들의 오만한 뽐내기를 긁기 시작했다. 연암이 보기에 조선 대관은 중국 사람을 만나면 한족, 만주족 가리지 않고, 싸잡아 되놈 취급했다. 그렇게 멸시하고, 도시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들을 반겨 맞기는커녕 개나 염소 보듯 푸대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턱없이 교만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연암의 자기 비추기다. 8월11일 낮, 거리 구경을 나갔다가 과일가게 건너편 깃발이 펄럭이는 술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웬걸, 몽골 사람과 회회교 사람 수십 패거리가 각기 민속 복장을 입고 시끌벅적했다. 중국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선 갓에 수정 갓끈을 늘어뜨린 연암은 그 사납고 거센 분위기에 으스스했지만 찬 술 넉 냥을 주문했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잔 두개를 담뱃대로 휙 쓸어버리고 큰 보시기를 가져오라 소리쳤고, 그 보시기에 술을 따라 단번에 쭉 들이켰다. 그러고 일어서자 손님들이 술 석 잔을 따라 놓고 권했다. 연암은 단숨에 꿀꺽 마시고 너부시 절을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주옥같은 소품, ‘낮술’ ‘달밤’
열하 시내 복판에 우뚝 서 있는 강희의 동상.
8월11일자 일기에서 이 대목 500여 자(한문)를 잘라내면 또 한 편의 명문이 된다. 필자는 ‘낮술’이란 제목을 붙여보았다. 열하에서 객기를 부리며 호탕하게 낯술을 들이켜는 조선의 나그네, 그 허와 실이 보인다. 어쩌면 조선의 얼굴일지 모른다. 건륭황제 대궐의 지척지간에서 컬컬하게 주욱 보시기를 비운 것이다.
필자는 ‘태학유관록’ 일기 가운데 ‘낮 술’과 같은 명문을 또 한 편 떼어낼 수 있었다. 연암이 열하에 도착한 날 밤 일이다. 달빛이 쌓이도록 교교한 밤이었다. 윤가전과 기풍액을 만나자 말문이 열렸다. 첫날부터 중국의 ‘시종(詩綜)’에 실려 있는 조선 시인의 작품을 토론하다 보니 어느덧 초경이었다. 태학에 돌아왔을 땐 일행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달빛 아래 낙타 울음이 들리고. 제독과 통관 무리는 탁자를 침상 삼아 깊은 잠에 빠졌는데 우악스레 코를 골기가 천둥소리요, 쏴 물병을 쏟아내는 소리였다. 연암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오니 개소리가 표범 소리처럼 장군부에서 들려왔다. 이경을 알리는 조두(?斗) 소리가 마치 소쩍새 울음 같았다. 나는 마당을 아장아장 거닐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림자를 희롱했다. 명륜당 뒤뜰의 고목은 침침한데 방울방울 이슬에 아롱아롱 구슬들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담 밖에는 삼경 두점의 조두. 이렇게 좋은 밤, 밝은 달을 함께할 사람 없어라. 이 밤 왜 우리 사람들만 쿨쿨 잠 속에 빠졌는가.”
열하에 왔건만 일행이 모두 고꾸라져, 흥분을 나눌 길이 없다. 이룬 자의 환희와 고독이 엄습해온 것이다. 필자는 시험 삼아 이 400여 자의 글에 ‘달밤’이라고 제목을 붙여보았다. ‘낮술’이 풍자라면 ‘달밤’은 서정이다. 하나가 자기 희화화라면 나머지 하나는 자기 고백이었다. 모두가 주옥같은 소품이다.
위의 두 편은 필자가 마름질한 수필인데 반해 당초 연암이 독립 집필한 것으로 ‘환희기(幻戱記)’가 있다. 8월10일부터 태학관에 머무는 동안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몇 차례 구경한 요술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열하일기’ 총 26편 중 한 편이면서, 그 소재가 요술 한 가지만 세심하게 관찰한 전제(專題) 수필이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요술을 조선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취지로 쓴 르포지만 그 기록과 묘사의 재주는 요술보다 더 오묘스럽다. 빈 손바닥을 비비면서 별의별 것을 만들다가 그것들이 손바닥 속으로 사라지는 요술을 얘기하는가 하면, 시퍼런 칼을 입으로 삼킨 뒤 두꺼비처럼 불룩거리는 배에서 다시 꺼내는데 그 칼끝에 묻은 핏방울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더라고 했다. 연암이 ‘환희기’ 한 편에 기록한 요술만도 족히 스무 가지가 넘는다.
반간방, 삼간방
필자는 벌써 세 번이나 이 길을 답사했다. 고북구에서 열하까지. 지금은 버스로 두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연암은 꼬박 하루가 더 걸려 갔다. 물론 잠도 자지 않고. 가히 필사의 노정이었다. 이틀 전 밀운에 닿았을 때 청나라 군기대신이 8월9일 아침까지 도착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북구의 동서로 뻗은 장성 그 북쪽을 뚫고 지나가는 국도 101번을 따라 나서면 당장 조하(潮河)를 만난다. 이 강은 머지않아 밀운(密雲)댐으로 흘러든다. 조하를 건너 한참 북진하면 파커스잉(巴克什營) 톨게이트, 톨게이트를 지나면 반간방(半間房)·삼간방(三間房)이라 하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삼간방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관광지 안내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금산령(金山嶺) 장성 입구에 닿는다.
그런데 장성 안내판은 고북구 남방 10km쯤에서도 보였다. 바로 사마대(司馬臺) 장성의 입구인 것이다. 사마대장성이나 금산령장성은 우리가 산해관이나 북경의 팔달령(八達嶺)에서 본 장성과 그 건축 양식이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지방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지역에 따라 보수 공사를 벌인 뒤 관광지로 선포하는 듯했다. 따라서 파커스잉 톨게이트나 금산령·사마대장성 등은 연암이 볼 수 없었던 경물이다.
반간방·삼간방은 작은 두메였다. 연암이 8월9일 새벽, 여기서 밥을 지어먹고 쉬었다. 그때는 겨우 말이나 지났음직한 오솔길이었으리라. 더구나 삼간방은 지금 벽돌집 세 채만 남아 있어, 그 이름을 실감케 한다. 그 건너편에 호두산(虎頭山)이 솟았는데 거기 산꼭대기에도 뾰죽한 바위가 꽂혀 있었다. 그런데 밀운을 벗어나면서 가로질러 달리는 연산산맥 그 물결은 마치 깃대들을 세운 바위 같았다. 연산산맥은 물론 열하의 동서쪽에 자리한 봉추산과 쌍탑산에도 돌올한 바위가 마치 다듬잇방망이나 제주도의 돌하르방 같았다. 그리고 지명이 재미있다. 가옥 구조를 말하듯 반칸·두칸·세칸, 그랬다. 빙긋이 웃음이 났다. 현재 나와 있는 ‘열하일기’ 몇몇 번역판은 ‘반칸 방에서 밥을 지어 먹고 세칸 방에 와서 쉬었다’고 옮겼는데, 실제로 반칸, 세칸은 모두 고유명사다.
다시 삼도량(三道梁)과 왕영자(王營子)를 지나자 난하(?河)를 만났다. 이 강을 건너면 열하다. 저 서북쪽 전두산(轉頭山)에서 발원한 난하는 열하를 스쳐 발해로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230m 강폭에 수심도 제법인 듯 푸르렀다. 연암은 그때 여기서 최후의 난관을 돌파했다. 조공을 싣고 가는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모여든 데다 청나라 벼슬아치들이 쌍가마 여러 채를 어깨에 멘 채 배에 실려 가는 위세와 횡포를 목격했다.
태학관은 없고 부학만 있어
명륜당. 연암이 기숙했던 곳. 지붕은 230년 전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8월11일, 세 번째로 열하를 답습하곤 열하 문물국(文物國)의 소장과 함께 부학을 확인했다. 올해 봄까지 승덕 제8중학교가 있던 자리다. 이사를 마친 뒤라 적적한 운동장만 휑뎅그렁했다. 그 문에는 아직도 조벽(照壁)이 낡은 채 서 있고 문묘는 중앙에 위치해 공자를 배향했다. 그 서쪽으로 부학, 동쪽으로 공자 배향 준비 부서인 희생정(犧牲亭)과 신주(神廚), 신고(神庫) 등이 모여 있다. 부학은 맨 위쪽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에는 교수서(敎授署)를 두었다. 그리고 당 앞에는 진덕, 일신, 수업, 시습(時習) 등의 재방을 열립했는데, 생원들이 공부하고 교수가 강학하는 곳이다. 재방 좌우에는 재실을 줄줄이 세워 숙소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조선 사절과 연암이 기숙했던 곳이다.
연암이 열하에 도착한 날 밤, 잠 못 이루고 혼자 배회하고 달리기도 한 곳이 바로 명륜당과 그 앞의 재실이다. 그곳은 대체로 옛모습을 지녔다. 특히 명륜당의 지붕과 뜨락의 고목, 그리고 재실의 기와와 벽돌담은 200년 풍우를 견디고 있었다.
부학에서 나와 피서산장 정문 쪽으로 100m쯤에 광피사표의 패루가 울긋불긋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승덕에는 패루 세 개가 서 있는데 연암이 ‘환희기’를 썼던 패루는 문묘 쪽 패루가 아닐까 짐작된다.
필자는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230년 전의 그림자를 줍고팠다. 적어도 연암이 기숙했던 곳, 연암이 경축사절을 수행해 건륭으로부터 여지즙을 받아 마신 대궐의 뜨락, 그리고 반첸 라마를 예방했던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 세 군데에 내 발자욱을 남겨야 했다.
시적(詩的)인 명칭
강희42년(1703)에 기공해 건륭57년(1792)년에 완공한 564만km2의 피서산장은 크게 궁전구역과 비원구역으로 양분된다. 궁전마다 만학송풍(万壑松風)·운산승지(雲山勝地)·청음각(淸音閣)·연파치상(煙波致爽)·담박성경(澹泊誠敬)…, 시적(詩的)이요 종교적인 분위기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 건축은 장중하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담박했다. 조선 사절이 8월13일, 건륭의 고희를 진하했던 담박성경전은 바로 정문 여정문(麗正門) 정북에 위치한 정전이었다. 정문과 정문에 씌어진 ‘避暑山莊’ ‘澹泊誠敬’은 모두 강희의 어필인데 녹나무 짙은 잎새에 묻힌 이 뜨락에서 매년 만수절 등 큰 행사 때 외빈을 접견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만주족의 황제가 담박이란 중국 전통 도가의 처세명제와 성경이라는 중국 전통 유가의 덕목을 융합해서 이름을 정한 그 통일적인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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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복수묘는 산장의 북쪽과 동쪽에 건립된 외팔묘의 하나, 이 사원은 건륭이 오직 1780년 자신의 고희연에 참석키 위해 오는 반첸 라마의 숙소로 지은 것이었다. 건륭이 얼마나 반첸과 티베트에 각별했는지 알겠다. 남향의 산자락에 열립한 수미복수묘는 남에서 북으로 오르며 지형에 맞게 지어졌다. 맨 아래에는 반첸이 설법하던 정전, 그 서쪽으로는 반첸의 침궁이던 길상법희전(吉祥法喜殿), 그 위로 반첸 제자들의 숙소로 금하당(金賀堂)이 좌정했다.
227년 전 8월11일, 조선 사절이 건륭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억지로 예방했던 이곳을 필자가 방문한 날이 마침 장날이었다. 길상법희전 1층에는 ‘6세라마 반첸의 건륭황제 배알 사료 전람(六世班?朝覲乾隆皇帝展覽)’이 한창이었다. 반첸이 축수 사절로 오간 경로와 그 동기, 준비, 축수 내용 등을 사료와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청과 티베트의 정략적인 관계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그러나 반첸은 그해 북경 여행 중 11월2일 끝내 입멸했다. 영화의 끝은 고작 한줌 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