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 대통령, 김정일 위원장에게 ‘기세 敗’
- 극에 달한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대립
- 이명박-부시 면담 중개한 B씨…회담은 왜 불발됐나
- 국정원에 보관 중인 최태민 보고서, 내용만 빠져나갔다
- 노 대통령은 왜 이 후보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나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열린 오후 회담 첫머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도발’에 가까운 깜짝 제의를 했다. TV를 통해 방영된 그 대화를 옮겨보기로 한다.
김정일 : 기상이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떠나기에 앞서 오찬이 있는데…. 1시간30분가량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오찬을 시간 품을 들여서 편안하게 앉아서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 오늘 회의를 내일로 하시고,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궁색한 노 대통령의 대응
노무현 : …나보다 더 센 데가 두 군데가 있는데, 경호, 의전 쪽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정일 : 대통령이 결심 못 하십니까. 대통령이 결심하시면 되는데….
노무현 : 큰 것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 합니다….
짤막한 대화지만 남북 정상은 순간적으로 기(氣) 싸움을 벌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도발은 대단했다. 그는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를 하시지요”가 아니라,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라며 아랫사람 대하듯이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큰 일, 작은 일을 거론한 노 대통령의 대응은 왠지 궁색해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은 노 대통령이 근 5년간 미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마련한 ‘결전장’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그는 국내 보수진영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북풍(北風)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정치권의 공세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김 위원장을 만나서는 배포 있게 대하지 못했다.
정상회담 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회담 의제와 관련된 부처에서는 회담장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명답을 찾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회담을 끌고 가기 위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모으는 조사도 펼친다.
이러한 조사에는 의제를 맡은 부서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청 정보팀도 참여한다. 대북 문제에서는 국정원이 통일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번 정상회담은 김만복 국정원장이 마련한 것이므로 국정원은 세밀한 예상 대화 자료를 준비했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라고 했을 때 노 대통령이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것은, 이 기관들에서 올린 예상 문답 가운데, 김 위원장이 “더 있다 가라”고 제의하는 항목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노 대통령이 순발력을 발휘해 넘기긴 했지만 한국의 준비가 소홀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반면 북한의 준비는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10월2일 평양시 모란봉구역(구역은 우리의 ‘구’에 해당한다)의 4·25 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김 위원장은, 수많은 관중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잡고 환영사를 발표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북한 인민이 들을 수 있는 마이크를 통해서는 육성을 들려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도발
그가 북한 인민이 들을 수 있는 공개석상에서 마이크를 통해 육성을 전한 것은 1992년 4월25일 조선인민군 창군 6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고 한 것이 유일하다. 왜 김 위원장은 북한 인민에게 육성을 들려주지 않는 것일까. 김정일 위원장을 몇 차례 접한 한 소식통의 분석이다.
“공개석상에 나온 김 위원장은 매우 위압적이다. 그는 한눈에 사람을 알아본다. 아는 사람을 보면 ‘당신을 안다’는 뜻으로 가벼운 손짓만 한다. 그러나 절대로 말을 걸지는 않는다. 김 위원장도 정치인이다. 당연히 대중 앞에 서면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대단한 달변가이지만 북한 인민이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무서운 절제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환호한다고 해서 마이크를 잡고 말하다 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그러면 카리스마가 실추된다. 김 위원장은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공개석상에서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에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기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인사는 이렇게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 위원장보다 16세 많은 연장자라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김 위원장이 민족문제로 공격을 하자 김 대통령은 ‘당신과 나는 우리나라를 둘로 나눠 통치하고 있는데, 각자가 통치하는 기간은 길고 짧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영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민족을 위해 뭔가를 남겨보자. 우리 민족이 잘살고 못사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연장자의 위엄으로 김 위원장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기에 김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에 최선의 준비를 했다고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측은 일정을 하루씩 늦추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의 동선(動線)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경호상의 이유라는 등 추측이 난무했지만, 북한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맞는 데 이상이 없도록 다시 한번 점검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번 노 대통령의 방북은 한 달 가까이 연기됐다. ‘올여름 북한을 휩쓴 수해’가 그 이유로 거론됐다. 노 대통령은 비행기가 아닌 육로로 방북하므로, 노 대통령이 지나가는 지역을 정비하기 위해 한 달을 연기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수해 정비 이상으로 준비를 했다.
북한을 자주 방문해본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을 접할 때 북한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사전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북한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러나 도착하는 순간 북한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보곤, 은연중에 ‘북한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북측 사람들에게는 ‘머리를 숙여라’라는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은 강경하게 나온다. 한국 사람들의 허점을 찔러 기선을 제압하거나 실수를 하면 강한 공격을 퍼부어 우습게보지 못하게 한다.
“젊은 대통령의 배포를 떠보았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북측은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보다 네 살 연하인 데 대해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들은 젊은 대통령을 대하는 것이 나이 든 대통령을 대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판단했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에게는 용납되는 것도 젊은 대통령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한 달을 연기해 회담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측의 젊은 대통령에게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것이 북측의 진심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10월3일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하루 더 평양에 머물라는 제의를 한 것은 노 대통령의 배포를 떠보는 동시에 진심으로 노 대통령을 잘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날 평양에는 가을비가 내렸으므로 아리랑 공연을 보기엔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이 제의를 받아들이면 잘 모신 것이 되고, 받지 않으면 부담을 느껴 북한을 우습게보지 못 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코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의식이 드러난 대표적인 행동이 지난해의 미사일 무더기 발사와 핵실험이다. 북한은 만만하게 보이면 당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왔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매개로 김대중 정부의 노선을 이은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17대 대통령선거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싸움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을 산뜻하게 처리하지 못했고, 이명박 후보는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노 정부가 햇볕정책을 계승한 ‘평화와 번영 정책’을 펼치려면 국내외의 두 반대 세력을 물리쳐야 했다. 이 가운데 훨씬 어려운 상대는 ‘힘’을 가진 미국이다. 그런데 노 정부는 출범 직후, 1차 남북정상회담 직전 DJ정부가 건넨 대북 송금 사건 수사를 허용하는 실수를 범했다.
야당의 주장으로 특검이 만들어져 노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수사 결과 수억달러가 북한으로 불법 송금된 사실이 확인됐다. 과거 국정원을 비롯한 대북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슈퍼노트’라 불리는 위조 달러를 제작해 유통시킨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CIA 등 미국의 정보 수사기관들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대북송금 수사가 있자 북한의 위조달러 제작에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2005년 9월,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통해 북한이 위조달러를 세탁해 유통시킨 혐의가 있다며, 북한이 이 은행에 예치한 2400만달러를 갖고 가지 못하게 했다.
미국은 위조달러나 마약 등에 관여된 자금을 세탁해준 은행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법률을 갖고 있다. 달러는 세계 유일의 기축 통화다. 따라서 미국과 거래하지 못하는 은행은 국제 거래에 참여할 수 없다.
盧, “BDA 동결 자금 풀어달라” 요구
방코델타아시아는 꼼짝 못하고 2400만달러(약 240억원)를 동결했다. 2400만달러는 개인에게는 큰돈일지 몰라도 국가 차원에서는 소액에 불과한데, 이 돈이 동결되자 북한은 비명을 질렀다. 북한은 그들이 가진 모든 매체를 동원해 반미여론을 선동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몰라도 때 맞춰 한국에서는 인천 자유공원 안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 정부도 펄펄 뛰는 북한 달래기에 나섰다. 2005년에 나온 ‘국방백서’에서 주적(主敵)이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이다. 군사 용어에는 ‘적’은 있어도 ‘주적’은 없다.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삭제한 것은 과장된 표현을 바로잡는 행위일 수 있다. 과거 소련과 핵무기 감축회담(SALT, START 등)을 하던 시절 미국은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표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홋카이도(北海道) 동북쪽에 있는 4개 섬을 빼앗긴 일본도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표현했다.
미국과 일본은 소련과 ‘수교’를 한 사실이 있으므로, 소련을 적으로 묘사할 수 없어 가상적국으로 부른 것이다. 남북한도 1992년 평화를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로 북한을 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삭제하며 적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노 정부가 주적 표현을 삭제하자 한국 사회는 들끓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인 2005년 9월8일,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60주년 정상회의를 거쳐 멕시코와 코스타리카를 방문하는 순방외교에 나섰다. 이때 외교 전문가와 정보 전문가들의 관심은 노 대통령이 뉴욕에서 대북제재를 주장하는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날 것인지에 쏠렸다.
유엔 60주년 정상회의는 9월14일 뉴욕에서 개막됐는데 이날 노 대통령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주최한 오찬장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가벼운 인사만 나눴다.
그리고 닷새 뒤인 9월19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는 ‘북한은 모든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 9·19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9월20일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20분간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9개월 동안 대화하지 않은 한미 정상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바라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05년 11월18, 19일 부산에서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렸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 미국이 동결한 BDA의 북한 계좌를 풀어달라”고 요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두 정상은 APEC 개막 전날인 11월17일 경주에서 따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방코델타아시아의 북한 계좌를 풀어달라고 요구하자, 부시 대통령은 손으로 테이블을 치면서까지 거절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8개월이 흐른 2006년 7월5일 북한은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압박을 가하는 미국과 국제사회에 저항한다는 뜻으로 무더기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 그 직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중국 일본 러시아 정상과 긴급 통화를 했으나 한반도 문제 당사자인 노무현 대통령과는 통화하지 않았다.
2005년 9월 20일 통화 이후 두 정상은 단 한 번도 통화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다. 두 정상의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두 달 뒤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 관심이 쏠렸다.
그리스와 루마니아, 핀란드 순방을 마치고 미국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9월14일 부시 대통령과 오찬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회담은 한 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는 두 정상의 의견이 갈렸다는 뜻이다.
회담이 끝난 후 두 정상은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양국이 공동으로 노력해 나간다는 큰 틀의 합의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따로 기자회견을 한 노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 합의를 묻는 질문에 “한미 합의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 내용은 매우 복잡하다. 이 자리에서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렵다”며 대답을 피했다.
이 회담에서 거둔 유일한 성과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조속히 성사시키자고 한 것뿐이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이 회담이 있은 후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그가 원한 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이 시기 미국 정가의 기류는 강력한 북한 제재 쪽으로 흘렀다. 미국은 인권 문제를 거론해 북한을 압박했다. 1년 전인 2004년 10월4일, 미국의 상하 양원은 만장일치로 북한인권법안을 통과시킨 적이 있다. 이렇게 된 데는 기독교계 한국 보수 인사들이 큰 몫을 했다.
황장엽씨를 비롯한 몇몇 인사는 미국을 방문해 정치범 수용소 등을 거론하며 북한의 인권 탄압을 고발했다. 미 의회는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자를 불러 북한의 인권 탄압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인권 문제로 북한 압박한 미국
미국이 앞장서자 국제사회가 따라왔다. 2006년 6월13일과 16일 일본의 중의원과 참의원이 잇달아 북한인권법안을 통과시키고, 6월15일에는 EU 의회가 북한 인권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해 11월17일, 유엔 총회 제3위원회에서는 찬성 91, 반대 21, 기권 60으로 북한 인권결의안이 채택됐다.
이 표결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 한국은 찬성했다. 이에 대해 김창국 유엔 주재 북한 차석대사는 “미국이 (2001년 9·11테러를 당한 후) 대테러 전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이 국제사회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인권탄압이다. 이번 결의는 미국과 그 위성국들이 북한의 주권을 침해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 음모의 산물이다”라고 반박했다.
노 정부가 결의안에 찬성한 것은 의외였다. 이에 대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남한은) 북남관계에 장애를 조성한 범죄행위로 초래될 모든 엄중한 후과(결과)에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외세의 눈치를 보면서 권력을 지탱하는 자들은 우리와 상종할 체면도 없을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주도한 공세에 북한은 2006년 7월5일의 미사일 무더기 발사와 10월9일의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이로써 미국을 붙잡아놓고 북한을 달래 정상회담을 해보려던 노 정부의 꿈은 무산되는 듯했다.
노 정부가 미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2006년 3월11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이 워싱턴 DC와 자매결연을 한다는 이유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날 미국에 도착한 이 시장은 “예상하지 않았지만 로버트 졸릭 미 국무부 부장관을 만나고, 미 무역대표부의 로버트 포트먼 대표와도 면담할 예정이다. 그리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쪽에서도 갑자기 만나자는 제의가 와서, 조찬을 함께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자신감이 넘쳤는지 이 시장은 “서울시장에 대한 그 정도의 예우는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사족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미 국방부와의 조찬에) 럼스펠드 장관이 참석할지는 아직 모르겠다”며 자신이 한 말을 정정했다.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거론된다 해도 도시간 자매결연을 하러 간 시장이 미국 실력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소동이 일었다. 미국 행정부 실세들이 이 시장을 만나준다면, 이는 미국이 이 시장을 차기 한국 대통령으로 점찍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럼스펠드 면담 불발 경위
미국에서는 대북 제재에 대한 논의가 많던 때라 사람들은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조찬을 하기로 했다”는 이 시장 말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 시장은 럼스펠드 장관을 만나지 못했다. 이 시장 발언이 보도된 직후 미 국방부는 이 시장을 만나기로 한 적이 없다고 발표한 것이다. 한 소식통의 전언이다.
“럼스펠드 장관 면담은 이 시장 최측근 인사의 부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한 기관의 대표가 다른 기관의 대표를 만나려면 ‘명분’이라고 하는 프로토콜(protocol)이 있어야 한다. 이 시장은 명분을 서울에 있는 용산기지 이전에서 찾았다. 미 국방부를 방문해 용산기지 이전을 담당하는 실무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럼스펠드 장관이 지나가다 우연히 이 시장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됐다. 악수와 인사 정도만 교환하는 2~3분짜리 만남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 이 시장은 럼스펠드 장관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중재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각본을 짜고, 이 시장측에게 ‘우연을 가장해 럼스펠드 장관을 만나는 것이므로 사전에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이 시장은 기분이 좋았는지 기자들에게 이를 발설함으로써 다 잡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2005년과 2006년의 노무현 정부가 북한을 제재하려는 미국을 붙잡아놓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면, 그 시기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지목되던 이명박 시장은 미국의 유력 정치인을 만나 한국 보수주의의 대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한국의 두 정치 지도자가 각자의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사이, 북한은 원하는 것을 ‘한 방’에 이뤄냈다. 2006년 10월9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겠다는 식으로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여러 정황 증거로 볼 때 북한이 터뜨린 핵무기는 ‘짝퉁’일 가능성이 높았다. 7월5일 무더기로 발사한 미사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포동 2호도 발사 직후 추락했다.
북한의 대응은 조악하지만 용감했다. 그런데 이것이 ‘통(通)’했다. 2007년 2월 노 대통령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던 6자회담이 열린 것이다. 이는 ‘제재’를 강조하던 미국이 ‘대화’로 돌아섰음을 의미한다. 방향을 바꾼 미국은 큰길을 열어주었다.
2007년 2월13일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라는 이름의 2·13합의가 발표됐다. 2·13합의는 ‘북한은 현존하는 모든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5개국은 북핵 시설이 불능화되는 시점까지 100만t의 중유로 환산되는 에너지와 중유를 지원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의 인권탄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노 정부는 러시아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 노력했다. 러시아 측은 과거 한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을 탕감받고, 남북한이 연결되는 한반도 경제권에 연해주를 포함시켜 발전시키며 푸틴 대통령의 3연임 방안을 마련해보자는 생각이 있어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적극적이었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참여하는 남북한-러시아의 3자 정상회담까지 추진했으나 김정일 위원장의 거부로 무산됐다.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큰 실마리가 잡힌 만큼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 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북한 제재를 주장하며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대해 부정적이던 미국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것이다.
부시 대통령과 다툰 노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일자가 10월2일로 확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9월7일, 호주 시드니에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싫어도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만나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9월8일 두 정상은 55분간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이 끝난 후 청와대는 “매우 만족스러운 회담이었다”라고 평했고, 백악관은 “이번 회담은 매우 부드럽게 진행됐다”는 평을 내놓았다.
그러나 두 정상의 회담에서는 현격한 시각 차이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 회담이 있은 후 미국 언론은 일제히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6·25전쟁 종전선언 계획을 밝히도록 압박했다’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도전했다’고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해야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했으나, 노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폐기한 후 미국이 내놓을 비전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동의한 것처럼 몰고 가려고 했다.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다퉈가면서까지 대북정책을 챙기고 있을 때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후보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10월 중순 미국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을 만난다는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이 후보가 노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부시 대통령을 만난다면, 이 후보에게 이번 대통령선거는 ‘떼어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야당 대선후보를 만나는 것은, 내정 간섭으로 비칠 소지가 있어 정식 만남이 아닌 우연한 만남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이 후보와 부시 대통령이 함께 참석함으로써, 가볍게 인사하는 기회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B씨 등이 중심이 돼 추진했으나 B씨 라인을 감추기 위해 다른 라인을 가동하는 것으로 꾸미기로 했다. 알리바이를 위해 만든 다른 라인 가운데 하나가 K씨 라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포석을 깔고 추진했지만 부시 대통령 면담은 뜻밖의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9월17일 CBS(기독교방송) 라디오는 강영우 미 백악관 장애위원회 차관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명박 후보가 10월14일부터 17일 사이 미국을 방문해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 인터뷰에서 강 차관보는 “이명박 후보와 부시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하기 위해 국무부와 백악관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이 후보가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외교 경로를 통해서는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미 공화당 원로들과 전·현직 장관들을 동원해 이 후보와 부시 대통령의 면담을 성사시켰다”고 밝혔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은 한나라당을 상대로 취재에 들어갔다. 기자들이 달려들자 한나라당은 이명박-부시 면담을 공식화해버렸다. 그러자 바로 백악관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면담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나 부시 대통령이 이 후보를 만나기로 계획한 바는 없다”며 공식 부인했다. 언론 보도로 인해 럼스펠드 면담 불발을 겪은 이 후보는 또다시 ‘헛물’을 들이켜야 했다.
노무현의 이명박 공략 전략
이 후보는 부시 면담을 계기로 17대 대통령선거 때까지 4강 외교에 진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무산됨으로써 그는 자신을 향해 칼날을 벼리고 있는 노 대통령과 일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정가 소식통들은 노 대통령의 대(對) 이명박 공세는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남북정상회담 성공으로 국민 지지도가 올라갔을 때 이 후보의 서울 도곡동 땅과 BBK 주가 조작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터뜨리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한나라당 경선 레이스에서 박근혜 후보도 공격을 했다. 그러나 노 정부의 공세는 차원이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살아 있는 뇌관’ 최태민 보고서
박근혜 캠프는 수사권이 없으므로 ‘득문(得聞) 정보’를 토대로 이 후보를 공격했다. 그러나 노 정부는 검찰과 국정원 국세청 경찰 등 정보 수사기관을 동원, ‘사실’을 근거로 이 후보를 압박한다. 이러한 공격의 출발선이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인데 노 대통령은 절반의 성공만 거뒀다. 한 대북 소식통의 분석이다.
“노 대통령은 TV를 통해 방영된 김정일 위원장과의 기 싸움에서 이겼어야 한다. 과거 노 대통령은 젊은 검사들과의 대화 때 ‘이제 막 가자는 것이지요’라는 말로 단번에 기선을 제압한 적이 있었다. 김 위원장이 ‘하루 더 있다 가라’며 압박했을 때 노 대통령은 유려한 화술로 상대를 제압했어야 한다. 김 위원장의 공세에 대한 모범답안은 이것이다.
‘좋습니다. 특별 수행원으로 따라온 기업인 가운데는 연로한 이가 많고 차후 일정이 있는 사람이 많으니 그들은 예정대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해놓고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하루가 아니라 사흘 나흘을 더 머물러도 좋습니다. 그런데 회담이 끝나는 날 김 위원장은 나와 같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로 가셔야 합니다. 김 위원장께서는 1차 정상회담에서 서울 답방을 약속한 바 있으니 나와 솔직한 대화를 나눈 다음에 이를 우리 국민에게 보고하기 위해 함께 서울에 가는 겁니다. 그러한 약속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평양에 더 머물며 대화할 용의가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이렇게 김 위원장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국민 지지도는 급격히 높아졌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큰소리 칠 수 있고, 이명박 후보를 확실히 압도할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결전장에서 담대함을 보이지 못했다.”
이명박 후보가 문전 대시도 해보지 못하고 기회를 무산시켰다면, 노 대통령은 문전 대시를 해놓고도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러한 양쪽은 이제 국내에서 정면 대결에 들어간다. 이 대결은 노무현 대통령측의 선공으로 시작된다. 정가 소식통들은 노 대통령이 BBK 주가조작 의혹과 도곡동 땅 문제와 함께 최태민 보고서로 이 후보를 압박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가운데 폭발력이 큰 것이 최태민 보고서다.
소식통에 따르면 국정원에 보관된 최태민 보고서는 유출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실린 내용은 빠져나갔다. 따라서 궁금증은 내용을 빼내간 사람이 누구냐는 데 쏠리고 있다.
만약 이 후보 캠프에 있는 사람(국정원 출신 인물 등)이 이 자료를 빼내는 데 간여했다면 이 후보측은 공작을 통해 비밀을 빼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이 후보 지지율은 급전직하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9월11일 노 대통령이 청와대 공작설을 제기한 이 후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이다. 만의 하나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누군가가 최태민 보고서를 빼내는 데 간여한 것이 밝혀진다면 노 대통령의 고소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경선은 치열했지만 진짜 대통령선거는 지금부터다. 노 대통령은 범여권에서 누구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드느냐보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는 데 더 큰 힘을 쏟을 것이 틀림없다.
17대 대통령선거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명박 후보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은 막겠다는 노무현 대통령 간의 싸움이다. 이왕 벌이는 혈전이라면 예비전에서 멋진 승리를 기록한 후 벌였으면 좋을 뻔했다.
노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간단히 제압하고, 이명박 후보는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후 맞붙었다면, 한국 대선은 한결 차원 높은 경쟁 무대가 됐을 것이다. 예선전을 멋지게 통과하지 못한 양측은 어떤 싸움을 벌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