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폭파된 대한항공 858기 사건이 최근 6자회담 프로세스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북한에 대한 테러 지원국 해제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그 ‘근본 계기’였던 KAL 858기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는 의견이 미 의회를 중심으로 제기된 것. 이에 따라 9월초 열린 북미 회동에서 이 문제가 처음 언급됐고, 연말까지 이어질 관련 실무회의에서 본격 논의될 전망이라고 당국자들은 전한다. 한 번도 책임을 인정한 적 없는 평양은 과연 ‘고백’에 나설까.
KAL 858기 폭파사건 직후인 1987년 12월 서울로 압송된 김현희씨.
회담이 이렇듯 구체적 결과물을 낳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9월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 회동이 있었다는 게 공통된 분석이다. ‘북미 관계정상화 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핵심 당사국인 두 나라가 사실상 모든 쟁점에 합의함으로써 9월말 열린 6자회담이 순조롭게 풀릴 수 있었다는 것. 10월3일 발표된 대부분의 타결내용이 제네바 회동에서 사실상 합의를 이룬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제네바 회동에서 뜻밖의 사안이 거론됐다는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198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폭파된 대한항공(KAL) 858기 사건이 그것. 제네바 회동 결과에 대해 미 국무부가 한국 정부에 설명한 내용 가운데 이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정부 당국자는 “미 정부 당국자가 AFP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시점이 공교롭게도 회동 직후인 9월4일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9월4일 AFP통신은 익명의 미국측 당국자 말을 인용해 “테러 지원국 해제를 위해 해결할 현안으로 KAL 858기 폭파사건 개입 해명 등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1987년 11월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 폭파되어 한국인 승객 93명과 외국인 승객 2명, 승무원 20명 등 115명의 희생자를 낸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해 대통령선거 직전에 폭파범 김현희씨가 서울로 압송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던 이 사건은, 당시 정부의 공식발표에도 불구하고 ‘대선을 앞두고 북풍(北風)을 만들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가 꾸민 조작극’이라는 주장을 낳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국정원 과거사위가 재조사를 벌여 지난해 8월 “조작설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공식결과를 발표했으나, 김현희씨에 대한 조사가 무산되는 등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북한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남조선 안기부의 날조’라고 주장하면서 한 차례도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가 매년 4월과 10월 발행하는 세계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한 것은 1988년으로, 한 해 전의 KAL 858기 사건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마디로 KAL 858기 문제는 테러 지원국 해제의 ‘근원문제’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북한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에 가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차관 공여를 받을 수 없게 됐고, 이에 따라 테러 지원국 해제는 북한의 최대 희망사항이 됐다.
그러나 그간 워싱턴 주변에서는 KAL 858기 문제가 테러 지원국 해제의 쟁점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사건 발생 후 20년의 시간이 지난 데다, 최근 수년간 미국이 밝혀온 테러 지원국 해제의 공식요건에 KAL 858기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 오히려 일본인 납치 문제가 더욱 중요한 이슈라는 것이었다. 납치 문제는 일본측이 피랍자가 아직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살아 있는 이슈’인데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테러 지원국 해제를 반대한다”는 태도를 거듭 천명해왔다. 반면 한국 정부는 KAL 858기 문제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다.
10월4일, 두 개의 회의
‘그냥 넘어가는 듯하던’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 데는 미 의회 내부의 강경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테러 지원국을 해제하려면 미국 대통령이 지정 해제 희망일 45일 전까지 ‘해제 대상국이 지난 6개월간 테러 지원 사실이 없고, 향후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면 된다. 그러나 의회가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명의로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해제는 부결된다.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다 해도 의회의 이의 제기 자체가 백악관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9월27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6차 6자회담 2단계 전체회의.
다만 제네바 회동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잣대는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0월4일 워싱턴에서 열린 두 개의 회의다. 이날 미 국무부는 법무부, 국방부, 재무부 등 관계부처 담당자들을 소집해 제네바 회동과 6자회담 합의 결과를 공유하는 회의를 열었다. 또 하나의 회의는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직접 주재한 것으로, 미 상하원 의회의 관련 상임위원회 의원들을 초청해 결과를 브리핑하는 자리였다. 두 회의의 개최 사실과 논의내용, 결론 등도 개략적인 형태로나마 한국 정부에 전달됐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상하원 의원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 자리였다. 테러 지원국 해제에 반대해온 공화당 소속 의원과 담당 보좌관들이 모두 참석했기 때문. 3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테러 지원국 해제를 외교협상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 공화당 소속 에드 로이스 하원의원(캘리포니아 주)과 일레나 로스-레티넌 하원의원(플로리다 주)이 대표적이다.
“매우 긍정적인 반응”
이들의 대북 강경 분위기는 최근까지도 유지돼왔다.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인 로스-레티넌 의원의 경우에는 9월25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기 위한 8가지 조건을 규정한 ‘북한 대(對) 테러 확산금지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공화당 의원 9명이 공동발의한 이 법안이 본회의를 최종 통과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법안의 내용 자체가 의원들의 강경한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익명을 요청한 하원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신동아’의 질의에 “KAL 858기 사건 역시 테러 지원국 해제를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라며, “20년이 지났으므로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해도, 테러 지원국 지정의 계기가 된 사건인 만큼 북한의 태도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호(signal)라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른바 ‘원칙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만 이 관계자는 10월4일 국무부의 대(對)의회 브리핑에서 KAL 858기 문제가 거론됐는지에 대해서는 “행정부로부터 보고받은 정보사항은 공개할 수 없도록 돼 있다”며 말을 아꼈다.
흥미로운 것은, 국무부가 이날의 브리핑 결과를 한국측에 전달하며 “의회 관계자들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평가를 덧붙였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 테러 지원국 문제에 관해 의회 관계자들이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에 비춰볼 때, 9월초 제네바 회동에서 북미간에 논의된 내용이 매우 ‘전향적’인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KAL 858기 문제도 선결과제에 포함된다는 미 의회 강경파 의원들의 ‘원칙’을 감안하면 제네바 회동에서 북측이 ‘상당한 양보’를 시사한 것 아니냐고 추론할 수 있다.
테러 지원국 해제 문제에 정통한 노무현 정부 안보부처의 전직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KAL 858기 사건의 책임을 미국측에 ‘비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수용할 가능성 있다고 본다”고 평했다. 그에 덧붙여 이후 다른 사건에 관계된 바 없음을 확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정도로도 의회를 설득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관계자의 말이다.
“‘비공개 인정’ 아이디어는 이전에도 거론된 적이 있을 만큼 북한으로서도 정치적 부담이 크지 않은 방안이다. ‘외부에 공개될 경우 부인하겠다’는 식의 단서를 붙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불능화조치를 조기 성사시키기 위한 미 국무부의 적극적인 태도로 미루어, 제네바 회동에서 KAL 858기 관련부분이 세부사항까지 진척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테러 지원국 해제 4차회의
정부 관계자들이 전하는 또 한 가지 소식은, 향후 2단계 조치 완료시점인 연말까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미 양국이 10월 중순부터 ‘테러 지원국 해제 실무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영변 등 북한 핵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미국측이 방북하는 것과 동시에 테러 지원국 해제를 논의하는 회의도 미국에서 개최하는 형식이다.
10월11일 성 김 미 국무부 한국과장을 비롯해 8명으로 구성된 북핵 불능화 실무팀은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서 고려항공 JS252편을 타고 평양에 입국했다. 일주일로 예정된 방문 기간에, 뉴욕에서는 김명길 주(駐)유엔대표부 정무공사와 알렉산더 알비주 국무부 부차관보가 만나 테러 지원국 관련 회의를 연다. 6자회담 프로세스로는 첫 회의지만 2000년 3월, 8월, 10월 세 차례 진행된 테러 지원국 해제 관련 회의의 연장선상에 서 있으므로 공식 명칭은 4차 회의가 된다.
KAL 858기 문제에 대해 북측이 ‘비공개 인정’이라는 승부수를 던진다면 바로 이 테이블이 그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인 납치 문제 또한 의제로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회의는 미국측이 의회와 주변국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쟁점들을 열거하고 ‘최소한의 양보’를 요구하는 형태로 시작되어, 이에 대한 북한측의 반응을 듣는 수순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연말까지 진행될 이 회의에서 북측이 어떤 태도변화를 보여줄지가 관심의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통해 북미간 핫 이슈로 떠올랐던 금융제재 해제 문제도 조만간 관련 회의가 예정돼 있다. 역시 9월 제네바 회동에서 개최가 결정된 이 실무회의는 11월 중에 미 법무부·재무부와 조선무역은행 관계자가 참석하는 첫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난 6월 뉴욕 소재 연방준비은행(FRB)의 도움으로 BDA 북한 자금의 송금 문제는 해결됐지만, 북한은 여전히 국제전신환 사용이 불가능해 무역결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네바 회동에서 이 금융제재를 푸는 것 역시 불능화에 대한 미국측의 상응조치로 합의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핵 폐기 2단계 조치를 현실화하기 위한 북한과 미국의 움직임은 각 분야에서 빠른 속도로 궤도에 오르고 있다. 테러 지원국 해제만 해도 여러 쟁점이 남아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낙관적이라고 관련 당국자들은 입을 모은다. KAL 858기 문제를 포함해 몇몇 ‘근본적인 문제’가 불거져 상황 진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분위기가 안보부처 곳곳에 역력하다.
그러나 복병은 전혀 엉뚱한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9월말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 관계자들이 도쿄와 서울을 방문해 ‘북한과 중동 테러 단체의 연결고리’에 관한 정보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돌아갔다는 정보당국 주변의 소문이 대표적이다.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북미 관계에 대해 부시 행정부 일각에서 여전히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자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9월말이라는 시점은 더욱 공교롭다. 이렇듯 ‘물밑에서 진행되는 움직임’을 지켜보는 이들은 ‘낙관적인 전망’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대로 쉽게 끝날 리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