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에 나온 포고문을 무기 삼아 세계적 골프장의 전횡에 제동을 걸고 나선 스코틀랜드 노인을 떠올려보라. 테니스나 스케이트에는 물지 않는 유흥성 오락시설 이용세를 골프에만 부과하는 것에 반기를 든 일본의 노(老)법률가는 어떤가. 사적인 이익이 없으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시대, 심판이 없어 자기 고백에 모든 것을 기대는 ‘신사의 스포츠’ 골프에 담긴 내부고발 정신.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 전경. 흰 건물이 클럽하우스다.
그렇지만 필자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기도 전에 연륙교 예산이 배정됐다는 보도를 접했다. 필자가 품고 있던 꿈이, 비록 다른 힘에 의해서일지라도 이뤄진 것이다. 이로써 사법시험 합격의 당위성도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목표를 잃은 셈이 됐다. 약간의 방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에 시작했으니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필자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대부분의 동료와 달리 변호사가 된 까닭이다.
변호사 일은 골프와 매우 닮았다.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서둘러서도 안 된다. 자기 페이스를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와 자기관리를 필요로 한다. 승부근성도 있어야 한다. 집요함과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은 정의감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골프를 하듯 변호사 일도 즐긴다. 필자는 골프 관련 책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
스월컨번의 빨래하는 여인들
명확하진 않지만 사건의 발단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골프가 매우 성행하던 1420년 무렵, 올드코스 일대는 세인트앤드루스시(市) 소유지였다. 저 유명한 ‘골프 금지령’이 공포된 1457년에는 누구든 골프에 빠져 야단법석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제어하지 않으면 수습이 안 될 정도였다. ‘귀족의 딸도, 화차의 마부도 골프가 있다면 밤이 깊어가는 것을 모른다’는 노래가 유행할 만큼 이 시기의 남녀노소는 모두 골프의 노예였다.
세인트앤드루스에서는 주말이 되면 하루에도 30건 이상의 타구 사고까지 발생해 ‘신사는 2파운드, 숙녀는 1파운드, 시민은 10실링, 소는 5실링, 개는 1실링’이라는 보상액 공고문이 나붙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1번홀과 18번홀을 가로지르는 작은 샛강 스월컨번 주변에 매일 빨래를 하러 오는 여인네들이었다. 켈트어 사전에 따르면 ‘스월’은 헹구다, ‘컨’은 흐름, 번은 시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스월컨번은 ‘빨래하는 샛강’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개울이었다.
이 강에는 로망브리지라는 유명한 다리가 놓여 있다. 기원전 1세기경 스코틀랜드를 침략한 로마군은 우선 중남부를 제압한 다음 북부 칼레도니아 지방에 출병했다. 올드코스의 경계도 당시 로마군 주둔지였다. 5세기에 이르러 이전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과 지중해계 이베리아인, 아일랜드에서 온 스코트인들까지 가세해 드디어 로마군을 스코틀랜드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로망브리지는 쫓겨나기 이전 로마군의 손에 의해 건설된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지금이야 적은 물만 흐르지만 당시에는 페어웨이에 찰랑거릴 만큼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든 세인트앤드루스의 여인네들은 햇살이 날 조짐만 보이면 양손 가득 세탁물을 안고 스월컨번을 찾았다. 다 빤 빨래는 시민광장인 잔디밭에 널어놓고 마르는 사이에 수다 떠는 것을 즐기는 식이었다. 세인트앤드루스시의 유지였던 휴 모리스 경은 다음과 같이 적은 적이 있다.
“정말로 떠들썩하고 유머러스한 광경이었다.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기 지겹다는 듯 곧바로 둥그렇게 둘러앉아 재잘거리기에 빠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여자, 주변을 맴돌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개, 식사준비를 위해 서둘러 돌아가는 여인 등 한가로운 일상이 수세기에 걸쳐 전개되어왔다. 적어도 골프 공이 난무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스코틀랜드 시골마을의 이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린 것이 바로 15세기의 골프 붐, 그리고 그로 인한 예기치 않은 싸움이었다. 위험한 골프 공이 날아드는데다 빨랫감 위에 떨어진 공이 얼룩을 남기기도 했다. 때로 빨랫감 밑에 숨어들어간 공을 찾기 위해 생각이 모자라는 골퍼들이 거칠게 옷을 잡아당기다 강으로 떨어뜨리는 일도 빈번했다. 특히 이 지역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성향이 강해 여인들의 항의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뿐이었고, 남정네들은 수세기 동안 제멋대로 행동해왔다.
스코틀랜드에서는 6월 하순부터 한밤중에 티샷을 하는 ‘백야 골프’를 즐길 수 있다.
“저도 골프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경기의 철칙이요 골프의 정신일 것입니다. 이참에 시민광장의 사용권과 세탁권에 관해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당시 세인트앤드루스 지구의 최고 실권자이던 존 해밀튼 대주교가 1532년 1월25일부로 이른바 ‘해밀튼 헌장’을 공포했다. 스월컨번의 너른 뜰은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평등하게 목축, 수렵, 골프, 축구, 활쏘기, 군사훈련, 숨바꼭질, 술래잡기를 즐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민광장의 성격이 명확하게 표시된 헌장이었다.
해리 바든의 캐디
한참 후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역사책 속에 잠들어 있던 이 헌장을 한 청년이 다시 현실세계로 끌고 나왔다.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이때의 소송 이야기를 듣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찾은 길, 이제는 73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봅 마크레인의 굳은 일자 입술에는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탁권 소송에 대해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에든버러의 민사법원에 제소하셨지요? 자신에게 스월컨번에서 세탁할 권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소. 실은 70년쯤 전에 크리스토퍼 게인이라는 남자가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의 손녀사위고요. 원고가 죽은 뒤 소송을 승계해 마침내 판결을 받아냈을 뿐입니다. 나는 인문학적 성향에 독서가 취미인 사람입니다. 싸움질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자손으로서 선조의 명예와 권리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에든버러 커트’라고 하는 아름다운 유리잔에 봅 마크레인은 고급 싱글버렐을 가득 따라주었다. 마침 석양이 창문으로 비껴들어 유리잔의 액체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러자 실내가 풍요로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왜 크리스토퍼 게인은 빨래를 할 수 없게 된 샛강에 미련을 가졌던 것일까요?”
“실은 일요일의 산책이 원인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올드코스 일대는 해밀튼 헌장에 따라 보호되는 시민광장이지요. 그런데 골프장측에서는 잔디밭이 상한다는 이유로 산책길을 말뚝으로 둘러싸서 보행의 자유에 제한을 가했습니다. 이는 시민에게서 광장을 빼앗는 만행이고 오만이었죠. 그래서 세탁권을 이유로 저의 조부님이 일어섰던 것입니다.
결코 골프를 혐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골퍼였고 저도 골퍼니까요. 그러나 골프를 하지 않는 시민도 많습니다. 산책을 좋아하는 시민들을 위해 골프장측의 횡포를 규탄하는 일은 골퍼가 맡는 게 정당하다고 조부께서는 생각하셨던 거지요. 물론 저도 그분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고요.”
“재판에 이겼으니 당신은 이제 마음만 내키면 언제라도 스월컨번에서 빨래를 할 수 있게 됐군요.”
“그렇죠. 그런 마음만 있다면요. 물론 농담입니다. 요즘에는 누구나 빨래를 세탁기로 하니까 그 샛강에서 빨아야 할 빨랫감은 없지요. 지금은 수량(水量)이 워낙 적어서 넘어져 굴러버릴지도 모르고요. 만일 제가 작정하고 빨래를 하기 시작한다면 라운드하는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셔츠다, 팬티다, 샛강 주변에는 온통 말리려고 널어놓은….”
“조부인 크리스토퍼 게인씨께서는 어떤 인물이셨나요?”
“해리 바든의 캐디셨다고 하더군요.”
“정말요?”
“본업은 사진기자셨대요. 신문과 잡지에서 해리 바든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아 일하다가 어느 틈엔가 캐디까지 하게 된 모양이에요. 다만 사진 찍는 일이 바쁠 때는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바든은 매우 세심하고 친절하게 남을 배려하는 골퍼였답니다. 골프를 칠 때만 강한 게 아니라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금방 팬이 돼버릴 정도로 매력 있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면 세인트앤드루스와 싸우시겠어요?”
“물론이지요. 골프에 관한 문제는 내부로부터 고발이 있어야 합니다. 골프는 심판이 없이 자기 신고를 자랑으로 여기는 게임이 아닙니까. 내부고발이야말로 그 정신에 잇닿아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돈 500엔 반환을 위한 소송
비슷한 사건은 일본에서도 있었던 모양이다. 1903년 이시카와현에서 출생한 이즈미(泉芳政)씨가 그 주인공. 일본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도쿄지방법원 판사, 만주국지방법원 판사, 최고법원 재판연구관 등을 거친 뒤, 도쿄도 미나토구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활동했던 훌륭한 법률가였다. 이즈미씨는 1965년 9월21일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후쓰우 컨트리클럽에서 플레이를 하다가 ‘오락시설 이용세’로 500엔이 징수된 사례를 확인하고는, 이것이 일본 헌법 제13조와 14조, 지방세법 75조와 78조 등을 위반했다는 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제기했다. 당시 도쿄도지사 미노베료 오키치를 상대로 500엔을 반환하라는 취지였다.
물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소송이었다. 지금이라면 매스컴이 일대 소란을 피웠겠지만, 그 무렵엔 골퍼의 숫자도 적었고 신문에서도 몇 줄 적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즈미씨의 청구이유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골퍼들로부터 오락시설 이용세를 징수하는 것은 헌법에 반한다. 헌법 13조는 개인의 존엄,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취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건전한 신체 및 건강증진을 위해 스포츠를 즐길 자유는 헌법 13조가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지금 골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스포츠로 정착해 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나 대학에도 골프부가 설치되고 정식 교과과목으로 채택한 학교도 있다. 사회 통념상 건전한 스포츠로서 사람들의 생활에 밀착돼 있는 골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중대한 헌법 위반이다.’
이즈미씨는 모순적인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 일본의 조세제도에 예리한 메스를 들이댔다. 스케이트나 테니스는 1957년 지방세법 개정에 의해 과세대상에서 제외됐는데 골프만 예외로 취급된 점이라던가, 전국의 파친코 가게가 납부한 세금이 200억엔인 데 비해 골퍼들이 낸 세금이 1000억엔을 넘어섰다던가 하는 것이었다.
“회원클럽은 회원 상호 간의 친목과 건강 향상을 목적으로 결성된다. 퍼블릭코스 이외의 골프장에는 분명 이러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회원들로부터 오락시설 이용세를 징수하려는 태도는 사단법인 일본클럽 내에 있는 마사지실, 도쿄변호사회관 내에 있는 당구장, 교준샤(交詢社·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의 살롱을 이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과 같은 행위로 흡사 극도의 만행과 다름없다 할 것이다.”
도쿄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이즈미씨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피고측인 도쿄도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골프는 사치 스포츠다. 고소득자만이 즐길 수 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다. 더욱이 광대한 토지를 필요로 하기에 정회원이 되려면 막대한 부담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골프를 대중적인 다른 스포츠와 차별한다 해도 위헌은 아니다. 특정계층만으로 이뤄진 이용자들로부터 이용세를 징수하더라도 법 앞의 평등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 또 약간의 이용세를 부과한다고 해서 고소득자의 행복추구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즈미씨는 명문 골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가미 컨트리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많은 친구가 협력했지만, 재판이 장기화하고 패소(敗訴)가 예상되자 이들은 한발씩 빼기 시작했다.
“내가 시작한 싸움이다. 혼자서라도 계속 싸워갈 것이다.”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재판을 수행하는 것은 골프의 국민 스포츠로서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길이라 한결같이 믿고 재판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골프협회 같은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법도 했건만 그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제소한 날로부터 3년 후인 1968년 도쿄지방법원 제3민사부는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기각의 이유는 거의 피고측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즉 골프는 고소득자만의 경기이고, 광대한 토지를 전유(專有)하기 때문에라도 이용세 부담은 당연하다, 그래서 오락시설 이용세의 부과는 헌법 위반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골프의 미래를 위해
그러자 이즈미씨는 상대를 바꾸어 이번에는 자신이 소속된 사가미 컨트리클럽이 징수하는 오락시설 이용세가 부당하다며 즈다 당시 가나가와현 지사를 상대로 소(訴)를 제기했다. 소장에서 그는 지방세법 75조가 규정하고 있는 오락시설 이용세의 대상은 파친코 가게, 사격장, 마사지실, 당구장, 볼링장, 댄스홀 등 오락과 사행심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에 한정돼야 함에도 골프를 함께 규정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재판에서도 패소하게 되자 이즈미씨는 도쿄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그의 끈질긴 싸움은 사가미 컨트리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10년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젠가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골프의 미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싸움인 것이다.”
1965년부터 시작된 장기 재판은 끝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75년 2월6일 일본최고재판소는 이즈미씨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홀로 묵묵히 국가를 상대로 싸워온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는 세금을 적게 물리라고 외친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숭고한 경기를 일반 오락과 똑같이 취급하는 일본의 경망스러운 생각에 돌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아쉽지만 이즈미씨는 1997년 8월17일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죽기 직전 이즈미씨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일본의 골프서적은 전한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다시 한번 싸워보고 싶다. 처음 재판을 건 시기가 너무 일렀던 것 같다. 그러나 시대도 변했다. 위대한 골퍼들이 유흥 오락세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야말로 굴욕이 아닌가. 말이 없는 신사 숙녀들은 지금이야말로 궐기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