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이 머리칼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수업시간에 숙제로 쓴 시가 정호승이 쓴 최초의 시다. 제목은 ‘자갈밭에서’. 대구에는 자갈이 많다. 한 소년이 수성천변의 자갈밭을 걸어가면서 한 생각들, 즉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같은 사춘기의 감정적인 생각을 짧게 적은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수업시간에 교탁에 오르지 않고,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날도 여전히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정호승 옆에 와선 “네가 쓴 시를 읽어봐”라고 했다. 소년 정호승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읽었고, 두 눈을 감고 낭송을 다 들은 선생님은 자리에 앉은 소년의 까까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
김진태 선생의 과묵한 성품으로 보아 이것은 굉장한 칭찬이었다. 정호승 선생은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는 말보다는 ‘열심히 노력하면’에 더 의미를 둔다. 그는 이 얘기를 하면서 “시는 재능으로 쓰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쓰는 것이다. 재능이란 다름 아닌 노력이다”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우리는 신의 은총을 받은 대천재 모차르트가 아니라, 노력하고 천재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문예장학생으로 입학
이것은 선생의 시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선생의 시는 그 노력의 흔적이다. 그 노력으로 삶의 외로움과 괴로움과 그리움을 견디고 써내는 것이다. 누구의 가슴속에나 천하의 절창이 숨어 있고, ‘죄와 벌’ 같은 걸작이 숨어 있다. 작가는 그것을 써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써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리는 낭만주의 시인들도 부지기수다.
그때 선생님의 손바닥에서 까까머리로 전해지던 온기가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백일장만 되면 친구들이 자신의 등을 떠밀어 나가게 되었는데, 처음엔 백일장이 백일 동안 어디에 가서 장보는 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백일 동안이나 어디에 가고 싶지 않아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백일은커녕 교내 숲에 모여서 원고지 몇 장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 나간 중학교 백일장에서 받은 제목은 ‘불’이었고, ‘등불’이라는 시를 써서 장원을 한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계성중학교는 문예적인 분위기의 학교였다. 그래서 매달 학생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했고, 1등 한 학생에게는 상품을 주었다.
상품은 학교 매점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이었다. ‘삼립 크림빵’이 1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매달 응모해서 탄 상품권으로 매점에서 아이들과 빵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가끔은 체육복도 사 입어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됐다.
시간이 흘러 정호승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원’지에 ‘역(驛)’이라는 시를 응모해 시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 상을 받으면 고교생 사이에는 기성 문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 산문과 시를 동시에 쓰다가 시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선생이 다니던 대륜고등학교 문예반의 영향이다. 대륜고등학교에는 박해수 시인, 이성수 시인 등이 있어 정호승 시인의 시밭에 거름을 줬다.
정호승 시인은 경희대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시가 아니라 평론이었다. 시인이 평론으로 입학하게 된 것은 고3 때이던 1967년 9월 경희대 백일장에서 선생이 4등으로 입상했기 때문이다. 3등까지만 문예장학생이 될 수 있었다. 조병화 선생의 심사평을 보니 ‘정호승 군의 작품은 등수에 넣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아까워 4등을 준다’고 되어 있었다. 고교생 정호승은 조병화 선생이 내 시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싶어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 읽은 문예지의 평론 스타일을 모방하며 쓴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원고로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다. 문예장학생에 연연한 것은 학비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문예장학생 학비는 1년만 지급됐다. 계속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장학금이 필요했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신춘문예로 문단에 등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3년 내내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