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열린 오후 회담 첫머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도발’에 가까운 깜짝 제의를 했다. TV를 통해 방영된 그 대화를 옮겨보기로 한다.
김정일 : 기상이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떠나기에 앞서 오찬이 있는데…. 1시간30분가량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오찬을 시간 품을 들여서 편안하게 앉아서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 오늘 회의를 내일로 하시고,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궁색한 노 대통령의 대응
노무현 : …나보다 더 센 데가 두 군데가 있는데, 경호, 의전 쪽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정일 : 대통령이 결심 못 하십니까. 대통령이 결심하시면 되는데….
노무현 : 큰 것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 합니다….
짤막한 대화지만 남북 정상은 순간적으로 기(氣) 싸움을 벌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도발은 대단했다. 그는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를 하시지요”가 아니라,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라며 아랫사람 대하듯이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큰 일, 작은 일을 거론한 노 대통령의 대응은 왠지 궁색해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은 노 대통령이 근 5년간 미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마련한 ‘결전장’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그는 국내 보수진영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북풍(北風)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정치권의 공세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김 위원장을 만나서는 배포 있게 대하지 못했다.
정상회담 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회담 의제와 관련된 부처에서는 회담장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명답을 찾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회담을 끌고 가기 위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모으는 조사도 펼친다.
이러한 조사에는 의제를 맡은 부서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청 정보팀도 참여한다. 대북 문제에서는 국정원이 통일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번 정상회담은 김만복 국정원장이 마련한 것이므로 국정원은 세밀한 예상 대화 자료를 준비했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라고 했을 때 노 대통령이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것은, 이 기관들에서 올린 예상 문답 가운데, 김 위원장이 “더 있다 가라”고 제의하는 항목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노 대통령이 순발력을 발휘해 넘기긴 했지만 한국의 준비가 소홀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반면 북한의 준비는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10월2일 평양시 모란봉구역(구역은 우리의 ‘구’에 해당한다)의 4·25 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김 위원장은, 수많은 관중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잡고 환영사를 발표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북한 인민이 들을 수 있는 마이크를 통해서는 육성을 들려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