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형적인 휴양지 피란에서는 길거리에서도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닷가 방파제 앞 카페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차 안에는 여행객보다 슬로베니아 할머니가 더 많다. 이들은 하나같이 바구니며 보자기를 들고 있다. 무슨 용도인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이들이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에 내릴 때 정류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보고서야 알게 됐다. 이들은 국경 넘어 이탈리아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국경선이 이렇게 물렁해도 되는 건가. EU에 속한 나라들끼리 국경을 개방한 것은 많이 봐왔지만 할머니들이 장을 보러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국경에 대한 경직된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하다. 슬로베니아 할머니들의 수다 속에 이탈리아-슬로베니아의 국경은 통쾌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방파제에서 아이들이 다이빙과 수영을 즐기고 있다.
남프랑스 느낌의 피란항
남쪽으로 더 내려가 목적지인 피란(Piran)이 가까워지니 아드리아의 해변 휴양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휴양지의 분위기 또한 고급스럽다. 불과 10여 년 전에 유고 내전이 있었지만 슬로베니아는 겨우 10여 일의 짧은 전쟁을 치르고 독립을 했다.

피란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타르티니의 동상이 있는 중앙광장.
나중에 발칸반도 국가 중 최초로 EU에 가입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 됐다. 그러니 슬로베니아에서 살벌한 유고 내전의 기억을 끌어낸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하기야 이제는 예전 부족 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지던 아프리카에서도 사파리용 지프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세상이다. 여행은 이제 산업이 됐고, 최소한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편하고 안전하게 활보할 수 있다. 가끔 그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