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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 2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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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정면으로 다루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작가는 좌우대립의 철저한 희생자였다. 6·25전쟁 중 투옥된 남편을 만나러 서대문형무소를 매일 기웃거렸고, 작가 자신과 가족은 일상화된 위험과 공포에 노출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차츰 손상되고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히고 재물을 탐하는 모순을 접하면서 이데올로기의 허망을 보았다. 그에게는 생존이 더 급했다. 그가 보기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자였다.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치아를 통해 수용된 사회주의는 로맨티스트적·계급적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맑스 보이’ ‘엥겔스 걸’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탐구와 함께 박경리는 ‘생명사상’에 대한 모색을 계속한다. 여주인공은 전장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무관한 채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마치 ‘전장’ 속에서 ‘시장’의 세계를 살아가는 듯한 인물이다. 작가가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보인 것은 헌신적이고 가식 없는 사랑을 통해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 것이다.

박경리 문학의 뛰어남은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사적 비약을 보여주는 데 있다.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좌익의 평등 열망과 우익의 자유 열망, 그리고 각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들 간의 설전이 소설의 등줄기를 타고 앙상블을 이루어낼 때, 이미 박경리는 당시 어느 작가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줬다. 최인훈의 ‘광장’은 인텔리 주인공과 농부를 대면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군 장교가 되어 내려온 남자 주인공을 박경리는 농부와 대면시킨다. 누가 이것을 행동주의자의 로맨티시즘적 한계라고 하겠는가?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

박경리의 삶은 생명을 향해 열려 있었던 세월이었다. 인천에서 꾸린 짧은 신접살림, 연안에서의 짧은 교편생활, 전쟁과 남편의 죽음, 용공 혐의, 아들의 돌발적 죽음, 사위인 김지하의 출현, 유신과 폭력, 그리고 새롭게 다가온 생명에 대한 연민, 이런 한국 현대사의 얼룩 속에 홀로 내던져진 작가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한(恨)의 근원을 캐어 생명사상을 잉태하는 크고 넓은 모성이 된다. ‘토지’ 탄생의 전경(前景)이 여기서 펼쳐진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장편소설이다. 동학운동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기록으로 남는다. 작가가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오로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4반세기 동안 완성도를 높여간 것은 우리 문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 문단에서도 아마 이런 식의 작가적 투혼은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박완서는 박경리의 영결식에 바친 추모사에 못다 한 이야기를 보탠 ‘신원(伸寃)의 문학’(‘현대문학’ 6월호)에서 ‘토지’를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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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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