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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Asia-신동아 특약

민주국가 지도자들의 독재자 다루기

  • 글·월터 C. 클레멘스 Jr.| 보스턴대 정치학 교수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

민주국가 지도자들의 독재자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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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가 지도자들의 독재자 다루기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독재자들에게 당근보다는 채찍을 휘둘렀다.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부시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1일 오후 제주의 한 호텔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포용 정책은 구소련 독재정권의 생명을 유지해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포용 정책 옹호론자들은 구소련이 서방 국가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독재 체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반박했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데탕트(긴장 완화)가 구소련의 반체제 인사들이 목소리를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개방정책으로 서방 TV 매체들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소련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발트 3국의 독립 획득 과정에서 사망자 수는 채 50명도 안됐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만일 소련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운동을 억압한다면 미국은 소련과 맺은 경제 협력관계를 동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는 수출입 신용보증, 미국 상품금융공사 신용보증, 소련의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 특별 부회원 지위 획득에 대한 지원, 그 외 다수의 기술 지원 프로그램이 포함돼 있었다.

구소련의 마지막 10년간 미국이 소련과의 관계에서 얻은 경험은 현재 미국과 한국의 대북 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노쇠한 정치 지도자 3명이 이끌고 있었고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과는 거의 협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여러 차례 회담을 통해 중대한 합의안을 이끌어냈고, 1988년에서 1991년까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그 기조는 유지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말 소련은 해체됐다.

자칭 현실주의 진영과 신(新)현실주의 진영에서는, 레이건이 주창한 전략적 방어 구상(SDI)이 소련을 굴복시키고 무너뜨린 주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분석이 맞다면, 미국은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사실은 이러한 역사 해석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미국 전역의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긴장 완화를 주창하는 소련인들의 목소리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소련 지도부가 전략적 방어 구상의 위협이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 인식하고 나서야 고르바초프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과 기타 군축 조약에 합의하게 된 것이다.

서방 국가들과 민간단체들은, 정례화된 교류 이외에도 소련권역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에게 ‘정신을 위한 마셜 플랜’을 제공했다. 이 원조 계획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조지 민덴(George C. Minden)은 서방 세계가 “(구소련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진공상태”를 마주했고 이제는 서방 국가들이 나서서 “좌절과 무의미, 그리고 누락으로 가득 찬 삶에 맞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원조 계획이 시행된 37년 동안 민덴이 이끌고 CIA가 재정 지원하는 국제문학센터는 서유럽 도서와 잡지 등 1000만권을 동유럽과 소련으로 전달했으며, 1991년에는 전달 권수가 약 30만권에 달했다.



북한 사람들이 사고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하기 위해 (미국의) 아시아재단은 북한에 12만권의 책을 보냈다. 이는 연간 9000권에 달하는 양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과학과 영어 교육 관련 책을 선호하지만 아시아재단은 인문학, 사회과학, 법학 관련 서적들도 함께 보내고 있다. 하지만 책 대부분이 국립 중앙도서관 격인 평양 인민 대학습당에 비치되거나 일부는 다른 기관에 보내진다고 한다. 해당 기관 직원들은 아주 쉽게 이 책들을 접할 수 있지만 학생들의 경우는 불확실하다. 미국은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북한에 보냈지만, 북한은 이에 대한 답례를 하지 않았다. 또 유엔 주재 북한 외교관들은 미국 학생들과 학자들의 토론회 초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리비아와의 협상이 주는 교훈

미국이 공산주의 정권뿐 아니라 리비아와 협상해본 경험은 국제무대에서 적대 국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對)리비아 정책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먼저 레이건 행정부는 리비아 정부를 위협하고 아마도 최고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살해하기 위해 폭격을 포함한 강경책에 의지했다. 이후 조지 H W 부시 및 클린턴 행정부는 다자 외교와 강압책을 병행했다. 이 병행책을 통해 미국과 영국은 리비아와 비밀 협상에 돌입할 수 있었고, 1999년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물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 기조는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이 성공적인 접근 전략의 특징은 믿을만한 수준의 강제력(군사 위협과 경제 제재 조치)과 능수능란한 외교술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세 가지 기준에 철저하게 부합했다. 비례의 원칙, 호혜의 원칙, 강제력의 원칙이다. 미국이 당시 요구한 것은 리비아의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책 변화였다. 미국은 당시 국제사회로 편입하고 싶어하는 리비아 내 엘리트 계층의 욕구를 ‘전달 벨트’로 적극 활용해 카다피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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