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올리버 색스의 화제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한 도입부인데, 이 소설 전체가 이 에피소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3부 구성 중 처음과 끝만 장식할 뿐, 정작 소설(본체)은 작가를 화자로 삼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소설 창작의 메커니즘을 희화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가만, 윤성희의 이전 소설집 ‘감기’와 신작 소설집 ‘웃는 동안’의 비정상적인 공백을 두고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더듬다가 잠시 샛길로 빠졌다. 샛길이라고 했지만, 사실, 살면서, 아니 쓰면서 샛길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다. 어떤 사물이나 일의 사정과 사태를 명료하게 헤아리기 위해서는 비교라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 소설로의 샛길 빠지기는 얼마든지 유의미하다. 김영하가 지난 2년여간 세계 체제의 흐름 속에 세계 소설로서의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었다면, 윤성희는 단편에서 장편의 호흡과 리듬을 치열하게 조련했다고 할 수 있다. ‘구경꾼들’은 데뷔 11년차 작가 윤성희의 첫 장편으로 웹진을 통한 매일 연재를 거쳐 출간되었다. ‘감기’와 ‘웃는 동안’ 사이에 ‘구경꾼들’이 놓이게, 그렇게 보자면 작가 윤성희는 출간의 흐름을 2, 3년 주기로 꾸준히 유지해온 셈이다. 필자가 이번 소설집에서 흥미롭게 주목한 것은 두 가지, 대화체와 괄호의 사용이다.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죠스바였어.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버스 안에서였지. 반 아이들이 앞에서부터 한 명씩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압정은 끔찍하다는 말을 열 번도 더 내뱉었어. 왜 압정이냐고? 머리가 아주 크거든. “나는 자는 척해야겠다.” 압정 옆에 앉은 라디오가 의자 등받이 조절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어. 그러자 압정의 의자가 뒤로 젖혀졌지. “라디오. 이건 내 의자야. 넌 저쪽 걸 눌렀어야지.” … 라디오는 밤마다 라디오를 들어. … 그 라디오는 60년도 더 된 거야. 딸에게서 딸로 물림 되어온 것이지. - 윤성희, 문학과지성사, ‘어쩌면’(‘웃는 동안’ 수록) 중에서
위의 인용에서 보듯 ‘웃는 동안’에 수록된 10편의 작품은 모두 단락 안에 대화를 수용하고 있다. 보통 지문에 대화를 쓸 경우, 따옴표를 생략한 채 간접화법으로 처리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 직접화법을 고집스럽게 블록(단락) 안에 가둬놓고 있다. 이는 작가가 소설을 대하는 자세, 정확히는 문장을 부리는 태도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매우 엄격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불러낸 문장들이지만 연필로 한 단어, 한 문장 꾹꾹 눌러 쓴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다. 또 하나는 몇몇 작품에서 구사된 괄호의 사용이다.
이모는 취하면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곤 한다. 술만 마시면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나. 쿵. 쿵. 쿵. 세 번 발로 문을 걷어차고 난 뒤에는 나지막이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나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대충 걸쳐 입고(잠을 잘 때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 몸이 튼튼해야 공부도 잘되는 법이라며 이모는 내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한약을 한 재 지어 주었는데, 그걸 먹고 나서부터 답답한 걸 견디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밖으로 나간다. 쿵. 쿵. 쿵. 다시 한 번 이모가 문을 발로 걷어찬다. - 윤성희, 문학과지성사, ‘구름판’(‘웃는 동안’ 수록) 중에서
위의 대목뿐 아니라, 앞의 ‘웃는 동안’의 인용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윤성희의 단편에서 괄호의 사용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지문에서 괄호란 부연적인 것, 여담적인 것이다. 읽을 시간이 없거나, 읽을 의향이 없으면, 안 읽어도 무방한 것이 괄호 속 내용이다. 수사학에서 괄호는 여담으로 분류되고, 여담은 본 서사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폄하되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새로운 서사의 기능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세계, 중심과 주변이 전복되고, 다른 종, 다른 장르가 혼종, 통섭되는 21세기적인 흐름에 적합한 기능으로 간주된다. 곧 (마음) 속말, 속삭임 같은 괄호, 본 궤도에서 자꾸 이탈해 빠져드는 샛길 같은 괄호를 더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 초고속 인터넷 매체 환경으로 밤과 낮의 일상이 뒤바뀌고, 여기와 저기가 동시적으로 놓이는 현실을 재현하는 한 방법이 괄호인 것.
생각해보면, 괄호 속 내용을 유독 탐하고,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 슬쩍 웃으며 ‘이건 여담인데’라고 덧붙이는 목소리에 유독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여담적인 인간들, 괄호 속의 인생들이 아닌가. 그 괄호 속의 은근하고도 뜬금없는 귀엣말이 일상이라는 거대한 본말(本末)을 잠시 잊게 해주지 않는가. 그리하여 웃게 해주지 않는가.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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