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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단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다시 들여다보는 분단 책임

  • 최영호 | 하와이대 명예교수∙역사학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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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 중개의 노고를 맡기자”

1945년 4월 7일 고이소 내각이 무너지고 스즈키(鈴木貫太郞)가 새 총리에 취임했다. 많은 사람이 스즈키가 종전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했다. 스즈키 자신도 전후의 구술에서 총리에 취임할 당시 “나는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의 멸망이 진실로 확실해진다”고 믿었다고 했다. 또한 “천황도 하루속히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종전사록 2’ 154~155p) 일본이 당장 직면한 위기는 소련의 참전이었다. 소련이 참전하면 일본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소련과 협상해 공격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최고전쟁지도회의(最高戰爭指導會議)는 5월 11~14일 ‘일소교섭요령(日蘇交涉要領)’을 채택했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 “제국의 죽음과 생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항이라고 규정하고, 그 대책으로 세 가지를 결정했다. 첫째, 소련의 참전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 둘째, 소련을 ‘호의적 중립’으로 만든다. 셋째,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소련을 움직여 일본에 유리한 중개자가 되도록 유도한다. 일본은 소련과 교섭하기 위해 큰 양보를 각오했다. 그중에는 포츠머스 조약을 폐기하고 만주의 철도 이권과 뤼순(旅順)반도의 권리를 소련에 양도하겠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은 계속 지배하겠다고 명기한 점이다.[패전의 기록(敗戰の記錄) 278~279p]

6월 6일 최고전쟁지도회의는 당면한 시국의 모든 면을 토의한 후 ‘전쟁지도기본대강(戰爭指導基本大綱)’을 채택했다. 이 대강은 8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최종 재가를 받았다. 비록 정세가 절망적이었지만 “국체(國?)를 호지하고, 황토(皇土)를 보위하여, 정전(征戰)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는 결정이었다. 이른바 본토결전(本土決戰)이다. 일본 본토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육군 강경파의 주장에 스즈키 내각이 동조한 셈이다.[패전의 기록(敗戰の記錄) 256~276p]

사정이 이렇다보니 온건파가 초조해졌다. 천황의 최측근 인사인 기토(木戶幸一) 궁내대신(宮內大臣)이 움직였다. 기토는 ‘기본대강’을 본 그날 ‘시국수습대책시안(時局收拾對策試案)’을 작성해 천황에게 제시했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니 화평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부가 화평을 제창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나, 이는 군의 반대로 불가능하니 천황이 직접 ‘어용단(御勇斷)’을 내어 전국을 수습해달라고 건의했다. 여기서 구상한 종전은 항복이 아니었다. 왕실을 보존하고 국체를 견지하는 이른바 ‘명예의 강화’였다. 기토는 “교섭상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 중립국인 소련에 중개의 노고를 맡기자”고 제의했다. 육군은 신중해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천황은 이를 뿌리치고 ‘명예의 강화’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천황의 최종결정은 6월 8일 내려졌다.[기토일기 2(木戶幸一日記 2) 1208~1213p]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일본 최고 지도층이 시도한 강화는 항복이 아니라 국체를 보지하는 명예의 강화였다. 둘째, 일본은 강화를 위해 미국과의 직접 교섭을 거부하고 소련과 협상해 소련을 중재자 삼아 전쟁을 종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결정이 궁극으로 한반도를 분단하게 하는 운명을 가져온다. 만약 일본이 완전 패배를 인정한 이 시점에서 미국과 직접 교섭에 나섰더라면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는 없었을 것이고, 이로 인한 분단도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아직 참전하지 않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출할 명분이 전혀 없던 것이다.

한편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 전쟁을 시작해야만 했다.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해야만 얄타에서 약속받은 만주의 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련의 사정을 모르고 일본은 소련에 강화의 중재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당시의 모든 객관적인 여건을 고려할 때 결코 소련이 일본을 위해 중재자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때 이성적(理性的) 판단력을 상실하고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일본이 추구한 이 외교를 호소야(細谷千博)는 ‘환상의 외교’라고 불렀다.[양대전간 일본외교(兩大戰間の日本外交) 303~336p]

對蘇 협상과 특사 파견

당시 일본 외교의 총책임자는 도고(東鄕茂德) 외무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간 도공의 후예로 그의 가문은 아버지 때까지 성이 박(朴)이었다. 도고는 당시 내각에서 가장 강력한 평화주창자였다. 소련과의 첫 접촉은 전 총리 히로타(廣田弘毅)와 일본주재 소련대사 말릭(Jakob Malik)의 회담이었다. 일본은 소련에 좀 더 적극적인 우방이 돼달라고 애걸하면서 만주를 중립화하고 소련이 석유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어업권(漁業權)을 포기할 것이며 소련이 원하는 다른 사항은 앞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소련은 이 제안을 무시했다.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말릭은 애초부터 회담을 회피하려 했지만, 구걸하는 히로타를 6월 4차례 만난 후 병을 핑계로 회담을 사절했다. 이 접촉은 67세의 노(老)정치인이 39세의 젊은 외교관에게 아양을 부리는 아첨의 회담이었다.

6월 13일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7월에 들어서자 연합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중국의 행정원장(行政院長) 쑹쯔원(宋子文)이 모스크바에 가 소련 수뇌부와 7월 3일부터 회담을 하고 있었다. 7월 하순에는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포츠담에서 거두 회담을 개최한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히로타-말릭 회담에 아무런 진척이 없자, 곤경에 몰린 천황이 직접 나섰다. 7월 7일 특사를 모스크바에 보내 소련과 직접 교섭해 소련의 중재로 화평을 강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7월 10일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이안을 정식으로 채택하고 총리 직을 세 차례 맡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특사로 임명했다. 저의는 스탈린이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을 만나기 전 고노에를 통해 강화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명예의 강화’는 천황을 보존하는 게 핵심이었다. 다시 말해 스탈린의 원조로 ‘천황’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소련은 특사를 수락한다는 것도, 거절한다는 것도 아닌 회답을 보냈다. 소련의 지상 목적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7월 26일 포츠담선언이 공포됐다. 항복하라는 연합국의 최후통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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