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 혁명이 시작된 곳은 시리아였다. 지난 4월 1일,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가 혁명 3주년을 맞아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3월 18일 시리아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 집계된 사망자 수는 15만344명이었다. 그중 5만1212명이 민간인이었으며 어린이도 7985명에 달했다. 행방불명된 18만여 명을 고려하면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실제 사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시리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의 진영을 빼앗으려는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은 여전하다. 내전이 4년째로 접어든 지난 2월, 정부군과 반군은 처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제네바-2 회담’으로 명명된 그 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회담이 무산되자 전 세계 전문가들은 “정치적 해법은 물 건너갔다”며 걱정했다. 아랍과 전 세계 70여 개국이 모여 만든 국제연대인 ‘시리아의 친구들’도 더는 맥을 못 추는 상황이 됐다.
시리아 내전의 시발점은 바시르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었다.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그는 바스당과 함께 철권통치를 해 국민의 원성을 샀다. 아무 말 못하고 쥐 죽은 듯이 살던 국민이 아랍의 봄을 타고 들불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시리아의 시민활동가 이브라힘(35)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시위가 일어났을 때 바시르 정권이 탱크를 앞세워 우리를 진압하려 했다. 그때 우리가 손에 든 무기는 겨우 올리브 나뭇가지였다.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었다. 제발 우리에게 민주주의 국가를 달라는 눈물겨운 애원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시리아 정부는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국민도 무장을 하게 됐다. 자유시리아군(FSA) 소속의 마르완(22)은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정부가 우리를 무기로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도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내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난 총을 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나둘 무기를 들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부대가 자유시리아군이었다. 여기에는 시리아 정부군에서 탈영한 장교와 병사도 일부 합류했다. 혁명 초기 시리아에서 반정부 세력이라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자유시리아군과 시리아국가위원회(SNC)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정부군 대 반군의 구도가 형성됐다.
그러나 반군은 정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아랍 최강의 군대였다. 이들은 60만 정규군과 탱크, 전투기 등 모든 화력을 동원해 반군을 공격했다. 반면 반군이 가진 것이라곤 고작 탈영할 때 들고 나온 소총이 전부였다. 반군에게는 무기와 병사가 더없이 필요했다. 다른 아랍 국가와 서구 사회의 도움이 절실했다.
시간이 지나고, 자유시리아군이 ‘시민의 자유를 위해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반군’으로 알려지면서 이들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힌 아랍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전이 벌어진 지 1년쯤 지난 2012년의 일이었다.
당시 아랍권 고위 외교관리는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요르단을 통해 무기와 군사 장비를 자유시리아군에 전달할 예정이다”라고 말했고, 사우디 외교장관도 “시리아 반정부군은 스스로 무장할 권리를 가졌다”라고 했으며 카타르 국왕은 “시리아 학살을 막으려면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라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국가 중 최초로 자유시리아군에 무기를 공급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