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민주화운동이 종교전쟁으로 변질 알카에다·쿠르드 개입으로 대혼란

시리아 내전 3년

  • 김영미 │국제분쟁지역 전문 PD

    입력2014-04-23 08: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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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랍의 봄’은 시리아에서 시작됐다. 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15만 명 넘게 희생됐다. 서방은 시민이 주축인 반군을 지원했다.
    • 그러나 알카에다가 개입하면서 반군은 사분오열됐다.
    • 민주화운동이 종교전쟁으로 변질된 것. 시리아의 봄은 언제 찾아올까.
    2011년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 혁명이 시작된 곳은 시리아였다. 지난 4월 1일,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가 혁명 3주년을 맞아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3월 18일 시리아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 집계된 사망자 수는 15만344명이었다. 그중 5만1212명이 민간인이었으며 어린이도 7985명에 달했다. 행방불명된 18만여 명을 고려하면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실제 사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시리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의 진영을 빼앗으려는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은 여전하다. 내전이 4년째로 접어든 지난 2월, 정부군과 반군은 처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제네바-2 회담’으로 명명된 그 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회담이 무산되자 전 세계 전문가들은 “정치적 해법은 물 건너갔다”며 걱정했다. 아랍과 전 세계 70여 개국이 모여 만든 국제연대인 ‘시리아의 친구들’도 더는 맥을 못 추는 상황이 됐다.

    시리아 내전의 시발점은 바시르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었다.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그는 바스당과 함께 철권통치를 해 국민의 원성을 샀다. 아무 말 못하고 쥐 죽은 듯이 살던 국민이 아랍의 봄을 타고 들불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시리아의 시민활동가 이브라힘(35)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시위가 일어났을 때 바시르 정권이 탱크를 앞세워 우리를 진압하려 했다. 그때 우리가 손에 든 무기는 겨우 올리브 나뭇가지였다.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었다. 제발 우리에게 민주주의 국가를 달라는 눈물겨운 애원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시리아 정부는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국민도 무장을 하게 됐다. 자유시리아군(FSA) 소속의 마르완(22)은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정부가 우리를 무기로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도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내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난 총을 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나둘 무기를 들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부대가 자유시리아군이었다. 여기에는 시리아 정부군에서 탈영한 장교와 병사도 일부 합류했다. 혁명 초기 시리아에서 반정부 세력이라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자유시리아군과 시리아국가위원회(SNC)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정부군 대 반군의 구도가 형성됐다.

    그러나 반군은 정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아랍 최강의 군대였다. 이들은 60만 정규군과 탱크, 전투기 등 모든 화력을 동원해 반군을 공격했다. 반면 반군이 가진 것이라곤 고작 탈영할 때 들고 나온 소총이 전부였다. 반군에게는 무기와 병사가 더없이 필요했다. 다른 아랍 국가와 서구 사회의 도움이 절실했다.

    시간이 지나고, 자유시리아군이 ‘시민의 자유를 위해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반군’으로 알려지면서 이들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힌 아랍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전이 벌어진 지 1년쯤 지난 2012년의 일이었다.

    당시 아랍권 고위 외교관리는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요르단을 통해 무기와 군사 장비를 자유시리아군에 전달할 예정이다”라고 말했고, 사우디 외교장관도 “시리아 반정부군은 스스로 무장할 권리를 가졌다”라고 했으며 카타르 국왕은 “시리아 학살을 막으려면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라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국가 중 최초로 자유시리아군에 무기를 공급했다.

    2012년 2월 24일, 드디어 국제연대 ‘시리아의 친구들’에 소속된 나라의 외무장관들은 첫 회담에서 반정부 세력인 시리아국가위원회에 대해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변화를 열망하는 시리아 국민을 대변하는 대표가 진정 적법한 대표다”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사실상 알아사드 정부를 시리아의 적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시리아의 친구들’은 2차 회담에서 시리아의 반정부 세력에 대해 물질적 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4개국이 수백만 달러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도 시리아 반정부 세력과 외부 세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통신 장비를 제공하겠다고 밝혔고, 한국 정부도 구호자금 100만 달러를 내놓기로 했다. 이에 반정부 세력 대표인 부르한 갈리운 시리아국가위원회 의장은 “자유시리아군 소속 장교와 병사, 레지스탕스에 대해 일정한 급여를 지급할 것”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군은 국제적 연대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기세를 몰아 수도 다마스쿠스뿐 아니라 북부 알레포와 홈즈, 남부 다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또 다른 외부의 개입이 시작됐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이라크 등 아랍 국가에 시리아 정부군과 싸우는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무장 전사가 몰려들었던 것이다. 자유시리아군은 이들을 환영했다. 자유시리아군에서 활동하는 샤피크 대위는 “같은 아랍권에서 우리를 돕고자 외국 전사들이 부대로 찾아왔다. 우리는 차를 대접하고 환영했으며 전투에도 같이 나갔다. 그들은 우리의 귀한 손님이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전사 수는 이후 급격히 불어났다. 나중에는 아랍 국가뿐 아니라 파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체첸 등에서도 몰려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전사들이었지만 자유시리아군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고마웠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됐다.

    자유시리아군보다 외국 전사 수가 많아지면서 서서히 전세가 역전됐다. 샤피크 대위는 “그들은 수가 많아지며 우리 지휘 통제를 따르지 않게 됐다. 그들은 우리의 전투를 지하드(성전)라고 불렀다. 우리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하는 시민의 열망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외국 전사들은 알라(하느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고 말했다. 외국 전사들에게 시리아 내전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종교전쟁이었던 것이다.

    알아사드 정권은 이슬람 시아파의 일종인 알라위파다. 시리아 내에서 알라위파는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는 이슬람 수니파다. 외국 전사들은 주로 수니파를 추종하는 이슬람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시리아 내전을 점차 ‘시아파 대 수니파’의 종교전쟁으로 만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리아 정부는 헤즈볼라와 이란에까지 도움을 요청하며 시아파 연대를 구축해 대항했다. 물론 명분상 반군에 맞서는 전략일 수도 있었지만, 도움을 요청한 상대가 시아파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리아 내전은 종교전쟁으로 흘러갔다. 자유시리아군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연일 분란이 일었다. 자신들을 도와준 외국 전사들이 고맙지만 ‘민주주의 대 종교’라는 갈등 때문에 고민이 깊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 전사들은 자신만의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반군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그동안 ‘정부군 대 반군’이었던 구도가 ‘정부군 대 자유시리아군 대 외국 전사’의 삼각구도로 변화됐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 전사의 상당수가 알카에다와 연계된 그룹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시리아 전역에서 공공연히 알카에다 깃발을 내걸고 전투를 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리아 내전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지하드 전쟁으로 변질됐다. 자살폭탄 테러나 참수, 납치 등 그동안 흔히 보아왔던 알카에다의 만행이 시리아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정부군, 시민군, 알카에다

    급기야 지난해 10월, 알카에다에 연계된 알누스라전선을 포함한 반군 13개 단체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면서 “시리아국민연합(SNC)은 더 이상 반군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유시리아군으로서는 승냥이를 쫓으려다 범을 불러온 꼴이 된 것이다. 자유시리아군의 한 고위급 지휘관은 “그들(외국전사)의 정체가 알카에다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전사가 시리아 내부로 유입된 상황이었다. 그들은 부대를 만들어 마을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정부군과 알카에다 둘을 상대하는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혁명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시리아에 입성한 알카에다는 시리아를 기반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이런 상황은 국제사회를 당혹스럽게 했다. ‘시리아의 친구들’이나 미국, 아랍 국가 등 국제사회가 반군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결국 알카에다를 지원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9·11 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을 들여 알카에다 소탕작전을 벌여왔다. 민간인 대량살상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무인기를 동원해 폭격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알카에다 전멸’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시리아에서는 알카에다를 지원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미국은 시리아 내전의 판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국면에 처했다.

    시리아에 상륙한 알카에다 연계 세력인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에 대해 미국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팔루자와 라마디를 장악하면서 급부상했다. 두 도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수니파 저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 미군 50여 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심했다. 10년간 군비 1조 달러와 40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감수한 미국에 이들이 시리아 반군 대열에 서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미 중앙정보국(CIA) 2인자였던 마이클 모렐 부국장은 이 상황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시리아는 알카에다의 극단주의와 내전이 혼재하는 상황이어서 미국 국가안보에 최대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현 상황이 지속되면 시리아 정부가 붕괴되고 시리아는 파키스탄을 대체해 알카에다의 새로운 근거지가 될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중동에 부는 민주화 바람을 적극 이용해 영향권을 넓힐 수 있지만 시리아가 알카에다의 나라가 되는 것은 절대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반대편인 알아사드 정권을 편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략적으로 시리아 내전 개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자유시리아군도 더 이상 미국이나 서방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반군은 이슬람이냐 민주주의냐에 따라 사분오열되어 여러 무장단체로 갈라졌다. 이제 시리아 반군이라고 불리는 단체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조차 모호해졌다. 국제사회 시각으로 이들 중 누가 알카에다인지 누가 자유시리아군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시리아 내전이 종교전쟁으로 변질되는 상황은 어느 나라에든 부담스러운 변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누구를 어떻게 지원해야 하느냐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러던 중 이 판을 확실하게 정리하는 사건이 지난해 12월 발생했다. 시리아 북부에서 반군 단체인 ‘이슬람전선’이 서방의 지원을 받던 자유시리아군의 무기고를 탈취한 사건이었다. 이슬람전선은 이슬람주의 성향의 시리아 반군 6개 그룹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이슬람 국가 설립을 목표로 새로 구성한 조직이었다. 이들이 자유시리아군이 장악한 북부 밥알하와 지역에서 반군 무기고와 검문소를 습격해 차량과 야간투시경, 컴퓨터 등을 탈취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과 영국은 서둘러 반군 지원을 중단했다. 조시 어니스트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이슬람전선’ 소속 병력이 서방이 지원하는 자유시리아군 산하 최고군사위원회 기지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보도에 우려한다”며 시리아 북부 반군에 대한 비살상용 군수품 지원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영국 외무부도 “이번 공격의 진상을 파악하는 동안 자유시리아군에 장비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유시리아군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내전 3년 가까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정부군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서방 세계의 지원 덕이었다. 자유시리아군의 한 장교는 “무기고를 탈취한 세력은 반군이 아니고 그저 도둑들이다. 그들 때문에 우리가 알카에다로 몰려 지원이 중단되면 어떻게 정부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의 말처럼 자유시리아군이 모두 알카에다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 영국은 누가 알카에다인지 알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내린 조치였다.

    불행하게도 이 무기고 탈취 사건은 자유시리아군을 이끌던 최고사령관 살림 이드리스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드리스는 시리아 전역을 망라하는 전선 지휘관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왔다. 또한 트럭, 의약품, 식량 등 반군에 대한 미국의 비군사적 구호물자를 인도하는 길잡이였다. 하지만 무기고 탈취사건으로 그는 통제권을 상실했고 막대한 양의 화기와 탄약도 이슬람전선이라는 조직에 빼앗겼다.

    알카에다의 무기고 탈취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자 이드리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결국 시리아 국가위원회(SNC) 대표인 자르바와 야권이 지지한 과도정부의 아사드 무스타파 국방장관이 사우디의 뜻에 따라 이드리스 축출을 추진했고 이드리스는 전격 해임됐다.

    하지만 지난 2월 16일 해임된 이드리스를 추종하는 일부 일선 지휘관들이 해임 조치에 거세게 항의하며 조직 이탈을 선언했다. 시리아 내 5개 주요 전선을 관장하는 지휘관들을 포함한 이탈파는 반군 조직의 전면 재구성을 요구하다 해임된 이드리스 장군과 함께 동영상에 출연해 세를 과시했다. 이들 가운데는 남부 전선에서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는 바샤르 알 주비도 포함됐다. 이제 자유시리아군도 이드리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를 해임한 세력으로 갈라질 판이다.

    이 판국에도 자유시리아군과 알카에다 연계 단체의 내분은 갈수록 확산됐다. 지난 1월 알카에다 연계 단체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자유시리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번 교전은 ISIL이 장악한 시리아 알레포에서 ISIL가 반군 소속 의사를 고문한 후 살해한 사건이 발단이 됐다. 시민들이 의사 사망과 관련해 항의 시위에 나섰고, ISIL이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자유시리아군이 이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는 것이다.

    우선 자유시리아군은 ISIL의 거점인 라카를 포위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자유시리아군은 이 과정에서 ISIL이 감금한 시민군 전사와 시민운동가 등 50여 명을 석방했다. 이 두 세력의 전투는 북부 알레포 주와 이드리브 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돼 하마 주와 라카 주로 번지면서 불과 4일 만에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참혹한 결과를 냈다. 이 전투는 알카에다 연계 반군과 자유시리아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선이 형성됐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자유시리아군을 지지하는 시리아국민위원회(SNC)는 사건 직후 ‘ISIL은 시리아 혁명과 노선이 다르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ISIL이 자유시리아군을 공격하는 등 시리아 국민의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를 비난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 이후 알카에다 최고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여러 반군에 단결을 촉구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알카에다로서도 시리아에서 알카에다를 팔고 나타난 수많은 무장단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ISIL은 알카에다의 이름으로 시리아에서 각종 폭력사태를 조장했다. ISIL이 장악한 지역의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고 담배 판매와 영화 시청을 금지하는 등 탈레반식 통치를 해 주민의 비난을 샀다.

    이에 알카에다는 웹사이트에 올린 성명에서 “알카에다는 ISIL과 관련이 없음을 발표한다”며 ISIL로부터 조직 구성을 통보받지도 않았고 승인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또 “ISIL은 알카에다의 지부가 아니며 아무런 관련도 없으므로 ISIL의 행동에 알카에다는 책임이 없다”고 덧붙였다. 알자와히리는 지난해 11월 육성 메시지에서 ISIL을 해체하며 시리아의 독립된 지부는 알누스라전선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5월에도 알누스라전선을 시리아의 공식 지부라고 확인하고 ISIL에는 “이라크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알카에다는 ISIL을 ‘짝퉁 알카에다’라며 선긋기에 나섰지만, 이들은 여전히 시리아에서 맹활약을 한다.

    알카에다의 유입은 시리아 정부에도 좋은 명분을 주었다. 기존의 시리아반군이 무장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알아사드 정권의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세계의 여론도 독재 정권인 알아사드 정권에 등을 돌리면서 시리아 정부는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내전의 성격이 종교전쟁으로 바뀌자 알아사드 정권은 내전을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으로 규정짓고 “반군은 모두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전투는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테러리스트와의 싸움’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이었으나 알카에다가 유입돼 세력이 확장되자 틀린 말이 아니게 돼버린 것이다.

    지난 2월, 시리아 정부군이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에서 매복공격을 펼쳐 반군 175명 이상을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매복 공격은 2011년 3월부터 반군이 상당 부분을 점령해온 다마스쿠스 남쪽 구타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숨진 반군 일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체첸 등지에서 온 외국 출신이었다. 시리아 정부는 즉각 이 공격을 ‘반군 테러리스트를 섬멸한 위대한 승리’로 포장했다. 외국에서 온 알카에다 대원들을 시리아 정부군이 나서 제거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자유시리아군 진영은 “희생자 중엔 알카에다 전사들이 있겠지만 자유시리아군도 있었다. 우리까지 알카에다로 매도하지 말라. 우리도 알카에다와 싸우고 있는데 정부는 우리를 알카에다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미 국무부는 알아사드 정권이 반군 측 평화회담 협상단의 가족을 구금했다고 비난했다. 젠 사키 국무부 대변인은 알아사드 정권이 “반군 평화회담 협상단을 테러리스트로 규정, 가족을 구속하고 자산도 압류했다”고 전했다. 유엔이 제네바에서 시리아 정부와 반군의 2차 평화협상을 중재했는데 이때 참가한 자유시리아군의 가족을 시리아 정부가 테러리스트라고 구속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시리아 정부는 모든 반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민주화 세력이든 시리아 임시정부든 모두 테러리스트로 몰아갈 수 있는 만능키를 쥐게 된 셈이다.

    명분 얻은 정부군

    시리아 내전 양상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시리아 내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터키, 이란 등지에서 나라 없이 떠돌던 유랑민족으로 인구가 4000만 명이 넘는데 아랍 국가들과 다른 언어와 풍습을 가졌다. 쿠르드족의 염원은 쿠르드 국가인 ‘쿠르디스탄’을 세우는 것이다. 시리아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만 무려 2300만 명으로 시리아 국민의 10% 이상을 차지해 시리아 내 소수민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시리아 내전 초기 시리아 쿠르드족은 중립을 취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이 길어지고 시리아 북부 라스 알아인과 탈 아비아드 등 쿠르드족이 주로 거주하는 터키 접경 지대에 주둔하던 정부군이 2012년 철수하자 쿠르드족이 실질적으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서히 무장과 조직을 만들어가며 나라 없는 설움을 풀어줄 국가 건설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알카에다 연계 세력과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지난해 8월, 이슬람 반군의 일부인 ‘이라크와 시리아 이슬람국가(ISIS)’가 쿠르드족 거주지인 라스 알아인을 공격해 양측에서 18명이 숨졌다. 사망자는 구급대원 2명을 포함해 쿠르드족 5명, ISIS 조직원 11명이었다. 시리아 쿠르드족이 만든 민주동맹당(PYD)은 지난해 7월 라스 알아인에서 ISIS 및 알누스라전선과 격전을 벌인 끝에 알아인 지역을 장악했다. 라스 알아인에서 퇴각한 알카에다 연계조직은 알레포 지역에서 쿠르드족 민간인 200여 명을 인질로 잡는 등 쿠르드족과 알카에다 연계조직 간 싸움이 치열해졌다.

    이 싸움은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까지 자극했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의 마수드 바르자니 대통령은 “시리아의 쿠르드족 민간인이 테러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다”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가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자칫 시리아 내전에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까지 가세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만약 이라크의 쿠르드족 전사들까지 시리아로 들어오게 되면 시리아 내전의 판도는 민주화 혁명, 종교전쟁에 이어 종족전쟁으로까지 번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이 때문에 자유시리아군과 시리아 임시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시리아 임시정부의 한 보좌관은 “눈치 없는 쿠르드족이 전쟁에 기름을 붓는다. 당장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정부군과 알카에다만 해도 버거운데 거기에 자기들만 살겠다고 무장조직을 만든 것은 바보 같은 행위다”라며 맹비난했다.

    물거품이 된 평화회담

    그러나 시리아 쿠르드족은 단호하다. 쿠르드족 시민단체인 ‘쿠르드의 봄’ 대표 마무드 칼릴리 박사는 “지금이야말로 쿠르드의 나라를 세울 좋은 기회다. 어차피 내전은 길어지고 우리는 이 내전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쿠르드족은 내전의 여파로 더 많은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같이 살 수 없다면 우리라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시리아 쿠르드족은 자체 무장을 한 전사들을 모아 무장조직을 만들고 터키에 있는 쿠르드 공산당(PKK)과 연계해 시리아 북부의 몇 개 도시에서 자치권을 행사한다.

    이렇게 시리아 내전 양상이 복잡하게 전개되자 주변국과 서방 세계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과연 누구를 어떻게 지원해야 시리아 내전이 끝나는가’에 대한 답을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3월 26일 폐막된 아랍연맹(AL) 정상회담은 이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아랍연맹의 국가들은 지금까지 확고하게 시리아 반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시리아 반군이 누구인지 모호해지자 나라마다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랍의 두 강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조차 서로 시리아 반군 가운데 지지하는 파가 다를 정도다. 사우디는 카타르가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지해 시리아에서도 알카에다 계열의 이슬람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한다고 비난해왔다.

    현재 두 나라는 별도의 무기 공급선을 통해 시리아 반군의 각각 다른 분파에 무기를 보낸다. 사우디의 무기는 서방이 지지한 포괄적인 반군세력인 자유시리아군에 공급된다. 다른 국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길고 지루한 시리아 내전이 아랍 각국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지난 2월에는 내전 종식과 과도정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한 시리아 평화회담 2차 협상이 열렸다. 이번 평화회담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등이 2012년 6월 합의한 시리아 과도정부 구성 방안 등을 어떻게 이행할지를 당사자인 정부와 반군이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 측은 과도정부 구성 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반면 반군 측은 알아사드는 물론 그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이 과도정부에 들어와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협상은 시리아 정부 대표가 권력 이양을 전제로 한 과도정부 수립 논의를 거부하면서 27분 만에 싱겁게 종료됐다.

    이날의 협상은 현재 시리아 내전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평화회담이 물거품이 되자마자 시리아 정부군은 알레포 동부의 반군 장악 지역인 타레크 알바브를 공격했다. 정부군 헬리콥터가 세 차례 드럼통 폭탄 공격을 퍼부어 13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21명이 숨지는 등 그날 하루에만 121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또 같은 날 ISIL의 자살폭탄 테러로 16명의 반군 대원이 숨지고 20명이 다쳤다.

    이 두 사건은 시리아 내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 그동안 시리아에서는 15만 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상당수 국민은 초근목피로 목숨만 부지하는 생활을 한다. 이 전쟁이 언제쯤 끝날지, 그걸 모르기에 시리아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은 답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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