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권영해(국방차관)가 선공, 윤종구(해군무관)가 마무리

북·소 군사동맹 와해 비사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입력2015-02-24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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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러 자동군사개입의 모순 지적한 권영해
    • 러시아 외교부 설득한 주러 해군무관 윤종구
    • 윤종구, “내 아들은 푸틴 딸과 결혼하지 않았다”
    • 중국에도 북·중 자동군사개입 폐기 요구해야
    • 왜 對中 전선에는 서희 같은 외교관이 없는가
    권영해(국방차관)가 선공, 윤종구(해군무관)가 마무리
    ‘대우조선해양(주) 고문인 윤종구 해군 예비역 준장(해사 24기)’ 하면 금방 알은체 하는 이를 보기 힘들다. 하지만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딸과 결혼설이 돌았던 한국 젊은이의 아버지”란 설명을 붙이면, “아! 그 사람” 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결론부터 밝히면 윤씨의 아들은 푸틴 대통령의 딸과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모른다. 그것은 두 젊은이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윤씨는 1997년부터 4년 6개월 간 러시아 주재 국방무관이 돼 두 번째로 모스크바에 체류하게 됐는데, 그때 청소년이던 그의 두 아들이 푸틴의 두 딸과 가깝게 지냈다. 큰아들은 큰딸과, 작은아들은 작은딸과 친구가 돼 넷이 어울렸던 것. 윤씨가 귀국하면서 두 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네덜란드에 푸틴 딸이 숨어 산다”

    그 사이 의대를 마친 푸틴의 큰딸은 2009년 러시아 회사에서 일하는 네덜란드인 요리트 파센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결혼식은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석유회사로 옮겨간 남편을 따라 부어스코텐 시(市)에서 ‘조용히’ 살다가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해 7월 1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을 이륙한 쿠알라룸푸르 행(行)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다 친러 우크라이나 반군이 쏜 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탑승자 295명 전원이 사망했는데, 그중 193명이 네덜란드인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반군 측에 대공 미사일을 제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이웃한 힐베르쉼 시(市)의 시장인 피터르 브로어체스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푸틴의 딸을 추방하는 것이 러시아에 대한 확실한 경고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아버지의 죄를 딸에게 묻겠다는 연좌죄를 거론한 것이라 논란이 일자, 시장은 즉각 트위터를 통해 “현명한 발언이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큰딸(마리아 푸틴)이 살고 있는 아파트 주소를 알아내고, 그 앞에 모여 침묵시위를 벌였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윤씨의 큰아들은 지난해 11월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 역시 미국에서 공부한 차남은 미혼인 상태로 러시아로 건너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윤종구 씨는 “몇몇 언론에서 첫째와 둘째도 구분하지 않고 우리 아들이 푸틴 딸과 결혼했다고 수차례 엉터리 보도를 했다. 그러한 보도는 제발 하지 말아 달라. 둘째 아들 일이 궁금하다고? 그것은 나도 모른다. 장성한 아들이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개입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농담이지만 둘째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결혼한다면, 나는 ‘미소(美蘇)의 며느리’를 거느린 시아버지가 되는 것인데, 그 스트레스도 생각해 달라”며 손사래를 쳤다.

    김일성이 서명한 우호조약

    그러한 윤씨가 박근혜 정부의 대중(對中) 외교를 보며 매우 답답함을 토로한다. 그는 “왜 알맹이 없는 외교, 밥만 먹는 외교에 전력을 기울이느냐”고 비판한다. ‘밥만 먹는 외교’라고 한 것은 과장된 지적이지만, 그의 애국심이 묻어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평가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한·러 외교사에 큰 획을 그은 업적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재 해군무관으로 파견되기 전 그는 권영해 당시 국방부 차관의 지시를 받아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해 성공시킨 역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성공 비화를 처음으로 ‘신동아’에 털어놓았다. ‘한국 정부의 대중외교 전략을 바로 세우기 위해’라는 단서를 달고.

    한·러 외교사에서 그가 이룬 최대의 업적이란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담은 북한-소련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互相)원조에 관한 조약(1991년 이후 북·러우호조약)’을 폐기시킨 것이다. 이 조약은 1961년 7월 6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 수상 김일성과 소련 수상(공산당 총비서 겸임) 흐루시초프가 직접 서명한 것이다. 그리고 양쪽 의회가 동의해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했다.

    북·러 군사동맹을 보장한 이 조약의 효력은 10년인데, 10년 뒤에는 한쪽이 폐기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5년씩 효력을 연장하기로 했다. 양쪽은 폐기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에 이 조약은 계속 유지됐다. 그리고 1991년 소련이 무너짐으로써 고비를 맞았으나, 러시아가 구 소련의 모든 지위와 책임을 이어받기로 함으로써 존속했다.

    이 조약 1조에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나 국가련합(유엔이나 다국적군 등을 지칭)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수단으로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주: 조약 문장은 북한 것을 옮김). 상대가 전쟁을 하면 다른 쪽은 자동으로 군사지원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2조에 ‘체약 각 방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동맹도 체결하지 않으며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행동 또는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을 데 대한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했다. 1조의 의무를 강화해놓은 것이다.

    윤씨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길고 긴’ 수련의 길을 밟아, 이러한 내용을 담은 조약을 영원히 사라지게 했다. 잠시 옛날로 돌아가보자.

    서울올림픽으로 시작된 북방정책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방국가들이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을 이유로 불참하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그 반작용으로 공산국가들이 보이콧해 반쪽 대회가 됐다. 그런 까닭에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한국은 ‘모든 나라를 참여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전력을 기울였다. 서울올림픽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그때 동유럽 국민은 TV를 통해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다는 한국이 경제 기적에 이어 민주화까지 이루고 올림픽을 치르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에서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책임진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은 올림픽 성과를 이용해 공산국가들과 수교해 북한을 고립시킨다는 ‘북방정책’을 펼쳤다. 1989년 한국은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공산국가들과 잇따라 국교를 맺어가다, 1990년 소련과 ‘역사적인 복교(復交)’를 했다. 그때는 소련을 공산 종주국으로 볼 때라, 한-소 수교는 대단한 사건으로 평가됐다(주 : 조선은 1884년 러시아와 수교한 바 있기에 이는 복교에 해당한다).

    그 무렵 동유럽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 공산정권들이 연쇄적으로 붕괴되는 거대한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1991년에는 그 여파로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등이 독립해 민주정권을 세우게 됐다. 국제사회는 서울올림픽이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정권을 붕괴하는 단서를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1992년 한국은 중국과도 복교했다.

    국방부 정보본부 소속의 해군 장교였던 윤씨는 이런 정세를 지켜보다 현장에 뛰어드는 기회를 잡게 됐다. 갑자기 닥쳐오는 기회를 잡아 성공을 만드는 것은 ‘준비된 자’만 할 수 있는 법인데, 그때의 윤씨가 그러했다. 윤씨의 준비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했다.

    초년 장교 시절 그는 바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위탁교육생으로 들어갔다. 학사편입을 한 것이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해군 대위로 돌아와 상륙함 등을 타다 ‘운명적인 공고(公告)’를 보게 됐다.

    그 시절 우리 국방부는 정보본부가 아니라, 그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정보국을 운영했다. 정보국은 소련이나 중국 정보를 스스로 분석하지 못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분석해놓은 것을 받아와 번역해 정보로 활용했다. 중앙정보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때 합참 본부장(대간첩작전 본부장 겸직)으로 있던 이병형 육군 중장이 ‘우리도 공산국가의 정보를 스스로 입수해 분석할 수 있는 정보본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정치학자를 만나 자문했다.

    그리하여 사관학교 졸업자 중에서 우수한 장교를 선발해 미국 명문 대학에서 소련학을 공부시켜야겠다고 판단하고 공고를 낸 것이다. 선발 기준은 영어 능력으로만 하지 않았다. 아이비 리그급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장(admission)을 받아온 이만 뽑겠다고 했다. 전공 성적 등도 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 세계무대에서 서울대 명성은 미미했기에 아이비 리그급 대학은 서울대에서도 상위 3%의 성적을 받은 이에게만 입학 허가장을 주었다.

    그는 해사와 서울대 시절의 성적이 좋았다. 서울대 교수의 추천장을 받는 데도 성공했다. 이러한 것을, 토플과 GRE 성적과 함께 보내자 세계 최고로 꼽히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입학 허가장을 보내왔다. 그와 함께 하버드로 가게 된 이는 육사 24기의 이석호 대위였다. 두 사람은 러시아 지역학을 공부하게 됐는데(1975), 그는 러시아 경제학을 이 대위는 러시아 정치학을 주 전공으로 삼았다.

    하버드 나와 한미연합사 창설 참여

    권영해(국방차관)가 선공, 윤종구(해군무관)가 마무리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보조 통역으로 일하다 판문점을 넘어 우리 측에 미국 망명을 요구한 소련 청년 사건을 보도한 1984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 윤종구 씨는 이 청년을 신문해 소련이 비밀리에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선발 직후 한국외국어대 교수를 만나 ‘죽어라’고 러시아어를 익히고 도미했기에 3년 만인 1978년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소령이 된 그는 정보본부에서 소련 분석관으로 일하게 됐다. 그러한 때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군 사령부 해체를 추진했다. 그에 대응해 박정희 정부와 미 국방부는 한미연합사령부를 만들기로 했다.

    한국군에서는 이병형 장군 후임으로 합참 본부장이 된 유병현 육군 중장이 그 일을 맡았다. 영어를 잘 했던 유 중장은 직접 영어 잘하는 장교들 선발했다. 하버드대를 나온 그도 부름을 받았다. 유 중장은 대장으로 진급해 그해 11월 창설한 한미연합사의 부사령관이 됐기에, 그는 부관으로 따라갔다.

    연합사 창설 멤버가 된 그는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처음으로 전면전 대비 작전계획인 5027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정보본부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한국 방위는 미군으로만 구성된 유엔사가 전담했는데, 한미연합사를 만들면서 한국군도 작전계획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군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큰 경험을 한 것이다.

    1979년, 그가 돌아오자 정보본부 측은 ‘소련 분석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그를 소련 정보 분석에 정통한 워싱턴의 조지타운대학으로 또 유학을 보냈다. 10·26 사건 직전 미국으로 날아간 그는 조지타운대에서 러시아학을 공부해 지역학(러시아) 박사학위를 받고 1984년 귀국했다. 그는 중령으로 정보본부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해 11월 23일 엄청난 사건에 직면했다.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하고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에서 통역 보조로 일하던 22세의 소련 청년 마투조크가 판문점으로 단체관광을 왔다가 분계선을 뛰어넘어와 미국망명을 요청한 것. 그러자 20~30명의 인민군 경비병이 그를 데려가겠다며 분계선을 넘어와 총을 쏘고, 우리 장병들도 응사해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국군 병사 한 명이 전사하고 미군 병사 한 명이 큰 총상을 입었다(인민군 피해는 파악 안 됨).

    여러 정보기관은 합동신문조(합신)를 만들어 마투조크를 신문(訊問)했다. 얼마 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이 그를 불러 신문에 참여하라고 했다. 서강대 교수로 위장해 합신에 참여한 그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여자 친구가 있느냐”는 등 부드러운 얘기로 그의 마음을 열었다. 그러자 서투른 러시아어와 영어 질문에 신물을 내던 그가 반색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청년은 그해 카피차 소련 외무차관이 육로를 통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보조 통역을 했다고 했다. 그가 “차관을 따라 함께 온 이들이 누구였느냐”고 묻자, 청년은 상장 계급을 단 군인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통역해준 내용을 기억해보라”고 하자, 청년은 ‘T-72 전차와 항공기 등을 북한군에 제공한다’는 대화가 오갔다고 대답했다. 소련이 외무차관 방북을 내세워 비밀리에 북한과 군사회담을 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20여 명의 합신조가 뽑아내지 못한 정보를 그가 잡아내자 윤 장관은 물론이고 CIA 한국 거점장인 딜레니 씨까지 깜짝 놀랐다. 신문을 마친 후 한국은 그 청년을 유엔난민문제고등판무관실(UNHCR)로 보내 난민 판정을 받게 한 후, 원하던 미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공(功)으로 윤 중령은 필리핀 무관 후보로 추천됐지만 소련 분석관이 필요하다는 실무진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권영해(국방차관)가 선공, 윤종구(해군무관)가 마무리

    러시아가 북한에 ‘자동 군사 개입을 보장해준 우호조약을 폐기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도한 동아일보 1995년 7월 24일자.

    대신 2년 뒤 스웨덴 무관으로 보내주겠다는 언질을 받았지만, 서울올림픽이 다가오자 ‘소련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 또 못 나가게 됐다. 올림픽이 열리자 소련은 문화예술단과 응원단 등을 ‘고요한 돈강’의 저자인 미하일 솔로호프의 이름을 딴 여객선에 태워 인천항으로 보냈다. 예술단원 등은 솔로호프호(號)를 숙소로 사용하며 출입했는데, 그는 그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올림픽이 성공리에 끝나자 정보본부장은 고생했다며 그에게 누구나 선망하는 영국 무관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는 임시로 대령 계급을 달고 영국으로 출국해(1988) 동유럽 민주화와 한-소 복교라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고 1991년 귀국했다. 그리고 ‘심각한 가슴앓이’에 빠져들었다. 해군은, 하버드대학원로 유학간 뒤로는 전혀 해군 일을 하지 않게 된 그를 진급에서 계속 누락시켰기 때문이었다. 대령 보직인 영국 무관을 하고 왔으니 진급시켜줄 만도 한데 제외한 것이다.

    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1992년 초 용영일 정보본부장이 그에게 “러시아의 초대 해군무관으로 나가라”고 했다. 러시아 초대 국방무관이 된 육군 대령이 러시아어를 하지 못하니, 해군무관으로 가서 보좌하라는 것이었다.

    권영해 차관의 부름

    러시아행을 준비하던 1992년 2월 그는 권영해 국방부 차관의 부름을 받았다. 권 차관은 초대 주한 러시아 무관으로 서울에 와 있던 니콜라이 우소프 대령을 함께 불러들였다. 우소프 대령은 러시아 해사를 1등으로 졸업하고 인도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 엘리트였지만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권 차관은 그와 중요한 대화를 하고 싶어 통역으로 윤 중령을 부른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불곰사업이라는 암호명으로 ‘조용히’ 러시아로부터 방산물자를 도입하려고 하고 있었다. 소련과 수교하면서 빌려준 차관을 심각한 경제난에 빠진 러시아가 갚지 못하게 되자, 정부는 러시아산 무기를 도입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에 대해 국방부는 “우리 군 무기체계는 미국식이라 러시아 무기는 쓸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다 정부 방침을 수용해 북한군 역할을 대행하는 대항군(對抗軍)의 장비나 산림청의 산불 감시용 헬기 등으로 활용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산 물기를 도입하는 불곰 사업을 검토하게 되었다.

    방산물자 도입은 도입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방산물자를 운영하려면 정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투기를 도입한다면 전투기를 운영하고 정비하는 기술, 그리고 그 전투기로 공격할 적에 대한 정보도 함께 받아야 한다. 이러한 정보는 비밀로 관리되는데 이 비밀도 함께 줘야, 도입한 나라는 그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사전에 두 나라는, 제공받은 정보는 절대로 누설하지 않는다는 ‘군사기밀보호협정’을 맺는다. 이는 상대국이 제공한 기밀을 자국의 기밀과 똑같이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와는 절대로 맺지 않고, 무기를 거래할 정도로 친한 나라와만 맺는다. 한국과 중국은 아직 이 협정을 맺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을 넣어 협정보다 낮은 약정(MOU) 형태로 이 약속을 맺었다.

    외교관계를 열어 무관부를 설치하는 것은 ‘두 나라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약속에 해당한다. 그런데 군사기밀보호협정을 추가했다면, 이는 군사동맹 다음으로 진득한 군사협조를 하겠다는 뜻이 된다. 권 차관은 한국과 러시아가 복교해 무관부를 설치하고 군사기밀보호협정까지 맺으려 한다는 사실을 우소프 대령에게 상기시켰다.

    “권 차관은 ‘한국과 러시아는 조만간 군사기밀보호협정을 맺고 불곰사업으로 방산물자를 거래하려고 하니 양국은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되는 친구가 됐다. 그런데 러시아는 한국의 적인 북한이 전쟁을 하면 자동으로 북한에 군사 지원을 한다는 우호조약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가 한국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 조약에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 말을 통역해주자 우소프 대령은 깜짝 놀라 받아 적고는, 권 차관과 내게 보여주며 러시아어와 영어로 ‘차관이 한 말씀을 제대로 적었느냐’고 누차 확인했다. 그는 이를 러시아 국방부에 보고했는데, 그 후 잘나가던 한·러 관계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주러 해군무관으로 나가게 됐다.”

    북·러우호조약은 러시아 외교부가 담당하는 것이라 권 차관이 제기한 문제는 즉각 한·러 간, 북·러 간 외교문제가 됐다. 무관은 주재국의 국방부는 방문해도 외교부는 방문할 수 없다. 러시아 외교부는 한국 국방부의 뜻을 알기 위해 윤 대령을 불러들였다. 그는 우리 외교부에서 나온 참사관을 ‘따라 가는’ 형태로 러시아 외교부를 방문해 한국 국방부의 뜻을 설명했다.

    두 손 든 러시아 외교부

    그는 대운(大運)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가 러시아로 떠나기 직전인 1992년 가을 국회가 군인사법을 개정했다. 그는 그 법의 첫 번째 수혜자가 돼 러시아에서 활동을 시작한 1993년 초 ‘학수고대’하던 대령 진급에 성공했다. 유례없는 7차 진급이었다. 군에서 진급은 1차가 선두, 2차가 대세, 3차가 막차다. 4차 이후는 거의 없는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힘을 받은 그는 러시아 외교부와의 담판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무렵 우소프 대령이 한국 근무를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는 우소프 대령의 집을 방문하며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오로지 명분만 갖고 지루하게 다투는 전형적인 외교전에서 한 명의 협조자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그는 놓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러시아가 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권 장관(권영해 씨는 1993년 3월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했다)과 그의 지적을 반박할 변명거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러시아 외교부는 김일성 사망 이듬해인 1995년 8월 북한에 우호조약 폐기를 정식으로 통보함으로써, 1996년 이 조약을 실효시켰다. 북·러 군사동맹이 와해된 것이다. 그와 권 부장(권영해 씨는 1994년 12월 안기부장으로 옮겨갔다)은 고려의 서희가 담판으로 소손녕이 이끈 거란 군을 퇴각시킨 것과 맞먹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북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길고 긴’ 고난의 행군에 들어갔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어기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1995년 10월에 귀국해 권영해 안기부장의 정보보좌관을 맡았다.

    주요 국가 무관은 대령을 보내지만, 4강 무관으로는 ‘스타’를 보낸다. 1997년 그는 드디어 ‘제독’이 되었다. 별을 단 그는 그해 10월 다시 러시아로 가게 되었다. 한국군을 대표하는 러시아 주재 국방무관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러시아에 주재하는 모든 나라 무관단의 대표를 맡았다. 그는 러시아로부터 최고 무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무관으로는 최고봉에 오른 것이 된다. 이러한 그를 북한 무관부는 매우 미워했으나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를 잘못 건들면 러시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해외 체류 경험이 많은 ‘틴에이저’ 두 아들이 모스크바에서 국제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캐나다 학생 행세를 하던 푸틴의 두 딸과 어울렸다(경호 목적상 캐나다인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두 딸은 그의 두 아들보다 한두 살씩 어렸다. 아이들은 매우 가까워져 양쪽 집을 오가며 놀았다. 그는 아이들이 푸틴 대통령 딸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이들 일’로 보고 모른 척 했다. 2002년 3월 그는 4년 6개월간의 러시아 무관 임무를 끝내고 귀국해 전역했다. 그의 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인 2000년 2월 9일, 북한은 ‘러시아와는 그래도 특별관계를 맺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듯, 자동 군사 개입이 없는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내정 간섭하는 중국 국방부장

    그는 이러한 말을 했다.

    “권 차관이 주한 러시아 무관을 불러 북·러우호조약의 문제를 지적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아일보는 ‘왜 국방부 차관이 외교 문제를 지적하는가’라고 비판하는 논조의 사설을 실었다. 그때 러시아 외교부는 물론이고 우리 외교부도 권 차관이 북·러우호조약의 문제점을 제기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반영한 것이다. 두 나라 외교부는 권 차관이 그들의 밥그릇을 건드렸다고 보고 발끈한 것인데, 동아일보가 그쪽을 편들었다.

    언론이 모든 걸 바르게 볼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국익 문제에서만큼은 부처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시각을 가졌으면 한다. 2월 4일 한국에 온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은 한민구 국방장관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중 관계 훼손’을 운운하며 사드(THADD) 배치를 반대한다는 말을 했다. 창 부장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이 말을 집어넣은 걸 보면 한국과는 사전에 논의하지 않고 그 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발언은 엄밀히 따지면 내정간섭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방부는 입을 다물고 양국 국방부 간에 핫라인을 설치한다고 합의(MOU)했다. 국방부 장관의 상호방문을 정착시키고 핫라인까지 설치하기로 한 것은 양국이 군사기밀보호협정 체결 다음가는 친구 관계를 구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중국은 우리의 적인 북한과 자동 군사 개입을 보장한 우호조약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모순인데, 왜 우리 국방부와 외교부는 이를 중국 측에 지적하지 않는가. 정부 부처가 몸을 사린다면 동아일보가 나서서 외교부와 국방부를 질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른 언론이다. 내 아들이 푸틴 딸과 결혼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대한민국의 국익부터 생각해달라는 것이다.”

    러시아가 북·러우호조약을 폐기하기로 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안 기자는 국방부를 출입하던 동아일보의 황유성 기자였다. 그는 정보를 제공해준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문명호 모스크바 특파원이 쓴 것으로 꾸며, 1995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 2, 3면의 톱기사로 이를 보도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즉각 이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북한에 이 조약을 폐지한다는 통보는 했지만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러시아 처지를 인정한 듯 우리 국방부와 외교부는 그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동맹을 페지하기로 했다는 것을 누구도 확인해주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다른 매체들이 보도하지 않아, 황 기자와 동아일보는 냉전 종식 후 최대의 특종을 했지만, 특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소련과의 우호조약에 서명한 닷새 뒤인 1961년 7월 11일,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북·중 우호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 2조에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국은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자동 군사 개입을 보장한 것이다.

    그리고 3조를 ‘체약 쌍방은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집단과 어떠한 행동 또는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라고 해놓았다. 그렇다면 중국이 펼치는 한중 군사외교는 명백히 이 조항을 위반한 것이 된다. 그런데도 중국이 우리와 외교관계를 유지한다면, 우리 국방부와 외교부는 중국에 이 조약을 폐기하라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넣어야 한다.

    “대박 통일을 하겠다면서…”

    중국은 북핵 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의 의장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북한의 핵 개발을 눈감아주고 있다. 중국의 외교 모순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우리 외교부는 ‘숨죽인 대중(對中)외교’ ‘밥 먹는 대중외교’만 거듭한다. 북러 군사동맹을 와해 노력을 지휘한 권영해 씨는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외교관들은 주재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외교만 하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국익을 도모하려면, 지도자는 외교관들에게 구체적인 과업을 주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가장 잘한 지도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인데,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왜 못하고 있는가. 대박을 만드는 통일을 하겠다고 해놓고….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것에서 멈추고 말겠다는 것인가. 박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중국을 리드하는 과업을 외교관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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