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항공 ‘솔섬 판결’ 비판 전시 개최
- “풍경 사진엔 저작권 없다? 창작성 과소평가”
- ‘Photo Poet’ 작품을 한국에선 ‘공모전 사진’ 취급
- “그제는 경주, 모레는 굴업도…” 활기찬 65세 현역
그런데 이들이 처음으로 함께 여는 전시회 제목이 ‘흔해빠진 풍경 사진의 두 거장 展’이다(3월 8일까지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 흔해빠진 사진을 찍는다면 거장이라 할 수 없지 않나. 모순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이다. 다분히 ‘대한항공 솔섬 판결’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읽힌다.
케나의 한국 에이전시인 공근혜갤러리는 케나가 2007년 발표한 강원도 삼척 솔섬 사진과 실질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공모전 당선작을 TV광고 등에 활용했다며 대한항공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케나 측은 지난해 3월 1심과 12월 항소심에서 모두 패했다. 법원은 풍경사진에는 저작권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 판결문의 한 구절은 이렇다. ‘솔섬과 같은 고정된 자연물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할 경우 누가 촬영하더라도 같거나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어….’
이에 대해 미술 관련 법률 전문가인 김형진 변호사(법무법인 정세)는 “사진예술의 창작성을 과소평가한 판결”이라며 “오늘은 사진이 보호받지 못하지만, 내일은 회화나 조각 등으로 같은 논리가 번져 전체 예술 분야가 커다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배병우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사진 하는 후배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사진작가가 이럴 때 말 한마디 안 하면 얼마나 비겁한 일이냐’고 했다”며 “이번 기회에 사진예술의 창작성을 이슈로 만들어보자 싶어서 전시에 응했다”고 했다. “나라고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 없겠나…”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전시 오픈을 하루 앞둔 2월 5일, 경기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경주에도 ‘짝퉁’ 소나무가…
▼ 한진그룹이 운영하는 ‘일우스페이스’의 개관전 초대작가인데도 대한항공 관련 이슈에 뛰어들었습니다.
“나설 만하니까. 또 케나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예요. 연배도 비슷하고. 둘 다 평생 자연을 쫓아다닌 사람들이라 통하는 게 많아요. 정당한 얘기인데 내가 피할 이유가 없지.”
그는 항소심 재판에 자필로 쓴 2장의 소견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썼다. ‘저를 모방한 유사 작품이 순수 혹은 광고 작업에 등장했을 때 허탈감이 옵니다. 32년 넘게 소나무와 한국의 풍경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한 작가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유사 모방 작품은 한 작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 모든 창작자의 의욕 상실과 국가적, 국제적 망신입니다….’
▼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도 무단으로 모방된 적이 있나요.
“왜 없겠어요. 모 자동차회사가 광고 배경으로 제 작품과 비슷한 걸 쓴 적 있어요. 그걸 보고 어느 변호사가 ‘돈 벌게 해드릴까요?’ 하더라고요. 제가 30년 넘게 경주 남산에서 소나무를 찍고 있잖아요. KTX 신경주역이 개통할 무렵에 제 사진이 얼마냐고 연락 왔어요. ‘너무 비싸다’고 하더라고. 그 후에 신경주역에 가봤더니 제 작품과 비슷한 소나무 사진을 벽에 발라놨더군요.”
▼ 문제삼지 않았나요.
“하이닉스가 TV 광고에 제 소나무 작품과 비슷한 걸 사용해 재판 절차를 밟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하이닉스가 깨끗이 승복해서 중단했지.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이기는 선례’를 남겨놨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전남 여수 향일암에서 뛰어놀며 자란 그는 최근 고향 근처에서도 비슷한 ‘모멸’을 겪었다. 신안의 섬 사진으로 책을 내달라는 박우량 전 신안군수의 의뢰를 받아 섬들을 촬영해왔는데, 지난해 7월 군수가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요지는 ‘공모전을 하면 더 좋은 사진도 나오는데 왜 이런 데 돈을 쓰느냐’는 거였죠. 제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려고 하니까 ‘약속이 있다’면서 가버렸어요. 젊었을 땐 그런 수모를 겪으면 으름장을 놓기도 했는데….”
마이클 케나의 ‘Pine Trees’(2007·왼쪽)와 대한항공이 2011년 TV 광고에 사용한 솔섬 사진.
배병우는 “풍경 사진이니까 저작권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건 너무 단정적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냥 잠자고 있죠. 프랑스에서 신안 섬 사진집을 내기로 하고 평론가도 선정해놨는데 스톱됐어요. 다음에 다른 군수가 나오면 그때 다시 일하려고요. 섬이 미운 건 아니잖아요.”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그는 바다와 섬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2~3년 간 틈나는 대로 신안으로 내려가 섬을 찍으러 다녔다. 요트를 빌려 무인도를 돌았고, 바위섬에서 새우잠을 잤다. MBC에선 그의 신안 섬 순례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2013년 방영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을 10개 꼽는다면 4~5개는 신안에 있다고 자신합니다. 지중해 섬은 바다 빛깔이 예쁘고 물고기도 알록달록하지만, 우리 갯벌에서 나는 낙지며 꼬막,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 것까지 포함하면 우리 바다와 섬이 훨씬 더 풍요롭고 아름답죠.”
“아이디어 자체가 창작성”
▼ 대한항공의 솔섬 광고가 케나의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봅니까.
“솔섬은 케나가 찍어서 유명해졌습니다. 정식 명칭은 ‘속섬’인데 케나가 자기 작품에 ‘Pine Trees’라고 제목을 붙인 뒤부터 솔섬으로 통용됐어요.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케나를) 따라 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닮게 찍기 힘들어요. 대한항공 측이 케나 사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정황도 나왔지 않습니까.”
판결문에 따르면 일우스페이스는 2010년 8월 케나에게 사진전을 제안했으나 10월 협상이 결렬됐다. 그 무렵 대한항공 여행사진 공모전은 솔섬 사진을 입선작으로 뽑았다. 대한항공은 이 입선작을 사용해 광고를 제작, 이듬해인 2011년 5월 TV 등에 내보냈다. 법원은 이런 관련성은 인정하면서도 ‘케나 사진을 광고에 사용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공모전에서 솔섬 사진을 선정해 광고에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 판결문은 ‘풍경 사진은 창작적 표현 범위가 매우 제한된다’고도 했습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라는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어요. 대형 카메라 에이바이텐으로 경기장, 증권거래소, 명품 매장 등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장소만 찍는 작가예요. 거스키 이전에는 아무도 대형 카메라로 그런 장소를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찍을 생각을 못했어요. 현대를 상징하는 거대 풍경을 대형 카메라로 찍는 것. 이게 거스키의 콘셉트입니다. 그가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노순철 작가도 아리랑 공연을 찍은 적 있고요. 이 둘이 같나요? 아니거든요.
한때 ‘Staged Photo’라고, 작가가 피사체를 만들어 찍는 게 유행했습니다. 그 시절에 제가 소나무만 찍고 다니니까 모두들 미쳤다고 했어요. 저는 겸재 정선이 그린 소나무를 사진으로 표현하고자 동양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198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 지금도 경주 남산에 한 달에 한 번은 내려가요. 저 이전에 경주 남산 소나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수묵화 같은 소나무 사진을 계속 찍는 사람은 제가 유일합니다. 유럽에선 저를 ‘사진으로 시를 쓰는 사람(Photo Poet)’이라고 합니다. 이게 배병우의 콘셉트예요.
제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아무리 잘 찍으면 뭐합니까. 안셀 애덤스라고, 요세미티에 살면서 그곳 풍경을 흑백으로 찍은 유명한 사진작가가 이미 있는 걸요. 사진예술은 아이디어 자체가 콘셉트이고 개별 작가의 창작성입니다. 그걸 인정해줘야죠. 풍경 사진이니까 저작권을 보호해줄 수 없다? 아무리 법이라도 이건 너무 단정적이지 않나요?”
열변을 토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집 하나를 가져왔다. 하늘, 풀, 나무, 흙…. 흑백사진 속에는 자연 풍경이 고요하게 담겨 있었다. 그가 프랑스 루아르 지역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4년 전 프랑스에서 배병우에게 샹보르 성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오는 9월 샹보르 성에서 그의 전시회가 예정돼 있다.
▼ 스페인 알함브라 성을 찍은 적도 있죠.
“스페인이든 프랑스든 그들이 요구하는 건 딱 한 가지예요. 배병우만의 스타일로 찍어달라는 것. 제 스타일을 인정하면서, 자신들이 타인의 시각에서 재해석되길 원하는 거죠. 궁의 건축물을 찍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에요. 이미 도서관에 가면 잔뜩 있으니까. 나는 그곳의 자연을 내 시각에서 봐야죠.”
“‘따라 찍었다’고 하면 그만”
배병우는 국내보다 세계가 먼저 알아본 예술가다. 사진 컬렉터로도 유명한 영국 팝가수 엘튼 존과 벨기에 국왕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최근에는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 감독이 그의 사진 3점을 사갔다고 한다. 세계적인 음악 축제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2011년 90주년 페스티벌의 포스터 이미지로 그의 소나무 사진을 사용했다. 그는 “작품 사용료를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페스티벌에 초대해 두어 주가량 VIP 좌석에서 공연을 볼 수 있게 예우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는 시대에 기생한다”고 강조했다. 작가가 후원 없이 지속적으로 예술활동을 하기가 불가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예술은 그 시대 중요한 인물이나 기관의 도움으로 꽃을 피운다”라며 “김홍도나 소동파도 국가의 지원을 받은 예술가”라고 했다. 그 역시 여러 기업의 후원을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해 화제가 된 그의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2005)는 아모레퍼시픽의 후원으로 발간됐고, 1990년대 후반에 종묘를 2년간 촬영한 것도 삼성문화재단의 후원이 있어 가능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여러모로 배려해줍니다. 소나무와 관련된 좋은 책이 있으면 보내주고, 소설가 김훈 선생과는 서로 알고 지내는 게 좋겠다고 소개해줬어요. 김훈 선생이 여기 와서 대낮부터 대취해서 간 적이 몇 번 있지요(웃음).”
▼ 대한항공은 어떻게 처신했어야 한다고 봅니까.
“아마추어는 프로의 사진을 따라 찍을 수 있어요. 그 사실을 밝히면 그만입니다. 케나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풍경 사진의 대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에요. 그를 따라 찍은 작품이 있는데, 제목이 ‘브레송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대한항공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케나 사진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깨끗하게 사과했어야 해요. (솔섬 광고는) ‘일우사진상’을 제정해서 상을 주는 큰 기업이 할 만한 일이 아닌 거죠. 이렇게 자꾸 회자되는 것부터가, 재판에선 이겼어도 기업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 아닙니까.”
예술가는 대개 늦잠을 잔다는 생각은 편견인가보다. 그는 새벽 1시에 e메일을 보내고, 오전 8시에 작업실 주소를 문자메시지로 보내왔다. 기자가 작업실에 도착한 정오 무렵, 전기밥솥이 칙칙폭폭 소리를 내고 있었다. 민어와 청국장으로 차려낸 밥상 앞에 앉아 “TV 육아 프로그램에 나오는 추성훈의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하자 “요즘 그런 얘기 많이 듣는데, 나도 유도선수 출신”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소나무를 찍으며 청춘을 보내고 어느덧 이순(耳順)을 훌쩍 넘겼지만, 그는 여전히 ‘그제는 경주에 있었고, 모레는 굴업도에 가는’ 현역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졸작만 남겨 신과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며 “소나무도 더 깊게 들어갈 여지가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 솔섬 판결로 촉발된 이번 이슈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면 좋을까요.
“사실 요즘 사진이나 회화 가릴 것 없이 외국 작가로부터 영향 받은 수준을 넘어 모방이라 할 것이 굉장히 많거든요. 작가들에겐 반성의 계기가, 기업엔 작가와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흔해빠진 풍경 사진의 두 거장 展’에 나온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 경주 남산에서 촬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