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자찬, 합리화, 사실 왜곡…“해도 너무한다”
- “북한은 뒷돈 요구 않고 모욕적 협상 임했다”
- “통일부가 北 더 누르려 추가 요구해 협상 결렬”
- 軍 통수권자가 응전 실패 책임 군에 떠넘겨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장관, 수석들은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구술 내용을 토론해 사안을 교차 검증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 등 정치 비화는 2~3년 후 따로 정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회고록의 백미는 남북관계와 관련한 서술이다. 알려진 사실과 그간 알려지지 않은 잔상이 버무려져 무용담처럼 읽힌다.
MB와 참모들의 집단기억
‘대통령의 시간’ 5장 ‘원칙 있는 대북정책’에는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 9분 능선까지 갔으나 불발한 과정이 담겼다. 류경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23일) 직후 서울로 밀행했다(2010년 12월 5일) 평양으로 돌아간 후 처형된 영화 같은 얘기도 실렸다. MB는 ‘원칙을 지켰기에 정상회담을 안 한 것이 업적’이라고 주장한다.
5장과 관련한 토론에는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 김태효 전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이 참여했다. 작가가 정리한 최종 원고를 김태효 전 기획관이 감수했다. MB, 현인택 전 장관, 천영우 전 수석, 김태효 전 기획관 등의 집단기억인 셈이다.
5장은 회고록의 하이라이트면서 거센 비판을 받는다. 자화자찬, 합리화, 왜곡이 적지 않다는 것. 남북관계는 ‘현재진행형의 생물(生物)’이다. 잘못된 기록이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는 2월 6일자 칼럼(‘품격 잃은 대통령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해도 너무한다.’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대한 고위 정책당국자의 강도 높은 비판이다. 고위 관리의 이 말은 이명박 회고록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경계심을 표현할 뿐 아니라 남북관계가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2009년 10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 김양건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비밀협상을 벌인 부분의 묘사는 특히 ‘사려 깊지 못한 이명박’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다. 회고록에는 북한이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과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나와 있다. 앞뒤 맥락 없이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처럼 썼다. 그러나 실상 북한의 그런 요구는 우리 측에서 바라던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고향 방문 간의 교환조건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100억 달러도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경우 한국이 북한의 개발은행 설립에 필요한 외자 유치를 돕겠다는 취지였다.”
통쾌하게 읽히지만…
‘대통령의 시간’ 몇 대목을 읽어보자.
나는 접견을 마치고 나가는 김 비서(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 좀 잘하세요.’
통쾌하게 읽힌다. 김양건 북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과 관련한 대목의 서술은 이렇다.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
2012년 1월 10일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와의 만찬 대화도 인상적이다. MB가 “김정은이 50~60년은 집권할 것이 걱정된다”고 말하자, 원자바오는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중국 총리가 김정은 체제가 오래가지 않으리라고 예견한 것을 고스란히 옮긴 것을 두고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 협상에 관여한 박철언 전 정무제1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도 내 회고록(‘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쓰면서 당시 김일성 주석과 만난 일에 관해 얼마나 쓰고 싶은 말이 많았겠나. 그러나 그것을 백서로 만들어 보관했을 뿐 회고록에는 다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기남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제 앞으로 좀 잘하세요”라고 말한 대목과 관련해서는 “말도 안 된다, 회사 부하도 아닌데,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월 30일 출간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2월 6일 강연에서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썼는데 그 뒤에 있는 내용은 제가 다 알고 있다”며 “(이 전 대통령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이례적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MB는 ‘남북 정상회담 5번 거절, 값진 일’이라고 정리했다. 사실은 ‘거절’이 아니라 ‘결렬’이 적확한 표현이다. 북한만 정상회담을 원한 게 아니라 우리도 원했기 때문이다. MB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남북관계를 올바르게 관리하지 못해 발생한 일에 대한 반성도 서술하지 않았다. 김정일 집단의 도발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책임은 군에 떠넘긴다. 관련 대목은 이렇다.
전후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우리 군 본연의 자세가 느슨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물론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다. 회고록에서 ‘나’에게 해야 할 비판을 군에 돌린 꼴이다.
앞서 언급했듯 MB는 대남 밀사(密使)의 비극적 최후를 공개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류경의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다)가 서울을 방문했다 돌아간 후 처형됐는데, 자신과의 면담 불발 때문에 숙청됐다는 데 무게를 뒀다.
북측 인사는 ‘장군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 대통령이 왜 우리를 만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확인한 바로는 김정일의 서한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들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
류경은 장성택과의 권력투쟁에서 처형됐다는 게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한다. 첩보 수준의 내용이 회고록에 담긴 것이다. 이렇듯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 또한 적지 않다.
MB는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의 싱가포르 비밀 접촉 과정에서 북측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고 서술했다.
북한이 제시한 문서에 의하면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의 식량을 비롯해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한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무슨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 같은 느낌이었다.
‘관여파’-‘원칙파’ 정책 다툼
‘노태우 회고록’의 내용 검토와 출간을 책임진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북이 쌀이나 비료를 내놔라, 그랬다고 하는데, 사실 북은 크고 작은 규모의 회의를 열 때마다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이번에 공개된 그런 요구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기 위해 여러 번 만나고 협의한 우리(6공화국)는 어땠겠나. 그거 하나에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회고록에도 서동권 안기부장을 특사로 보낸 얘기는 적었지만 북이 반대급부로 요구한 내용은 일절 쓰지 않았다. 그건 역사 앞에, 국민 앞에 당장 밝혀야 할 내용이라고 보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사’와 ‘김정일의 특사’가 비밀리에 만나 협의한 내용을 5년여 만에 공개해버렸다. 퇴임 18년 후 나온 ‘노태우 회고록’의 입이 ‘무거웠던’ 것과 비교된다.
또한 북한이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 100억 달러 등 대가를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신동아’는 비밀 협상 당사자인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증언을 최초로 공개한 바 있다(남북 정상회담 비밀접촉 주역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2013년 2월호) “관료, 학자 출신이 공 세울 욕심에 남북 정상회담 망쳐”(2013년 3월호) 제하 기사 참조). 임 전 실장이 언급한 ‘학자 출신’은 현인택 전 장관, 김태효 전 기획관이다. 앞서 언급했듯 ‘원칙 있는 대북정책’의 집단기억은 이들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관료 출신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다.
관여 정책(Engagement Policy)을 펴려 한 임태희 전 실장 등 정치인 출신 참모의 견해와 학자 및 관료 출신 참모의 의견 사이에서 MB가 오락가락했다는 게 당시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의 평가다. ‘관여파’와 ‘원칙파’의 견해 다툼이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원칙파는 ‘신동아’ 보도가 나온 후 사석에서 임 전 실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인사는 “임태희 전 실장은 싱가포르 접촉 이후 남북관계에서 완전히 배제됐다”면서 자신과 임 전 실장의 악연을 소개했다. 그는 “북한의 전략적 목표에 봉사하느니 정상회담을 안 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남북관계가 불편하더라도 북한의 앵벌이나 갈취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 언론은 원칙파 인사의 입을 빌려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로 현물 5억~6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밝혔다.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 등을 합하면 5억 달러가량이다. 한 원칙파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상회담은 조건이 맞지 않았다. 쌀 갖고 와라, 기름 갖고 와라 하면서 북한이 구체적 요구조건을 들고 왔는데, 우리는 그런 조건에서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원하는 조건대로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북한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북한이 어느 언론 보도처럼 5억~6억 달러의 현금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 환산하면 그 정도가 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시간’이 발간된 후 임태희 전 실장 측에 회고록과 관련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다투는 모습이 될 수 있다. 과거 증언으로 대신하라”고 밝혔다.
임태희, 회고록 집필서 배제
임 전 실장은 ‘대통령의 시간’ 출간 과정에서 배제됐다. 회고록이 출간된 후 실린 내용을 알았다고 한다. 5장 ‘원칙 있는 대북정책’에 담긴 것과는 크게 다른 임 전 실장의 증언 몇 대목을 소개한다.
“내가 북측과 접촉하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다른 얘기가 사실처럼 알려져 우려된다. 당시 일은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안다. 북측에서야 당연히 쌀, 비료를 요구한다. 예전엔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조건으로 쌀, 비료를 줬다. 북측이 원하는 게 있듯 우리도 원하는 게 있으니 그것을 연계해서 하자는 것이었다. 북측이 우리가 원하는 조치를 시행하려면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쌀과 식량이었다. 두 정상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해 해법에 합의한 후 북측이 조치를 취하는 것에 따라 남측이 경제지원을 하는 게 협의의 골자다. 정상회담을 여는 대가로 얼마를 주기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남북대화를 아예 안 할 거라면 몰라도 앞으로 남북이 대화할 때 이 문제와 관련한 팩트가 매우 중요하다. 김양건은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다.”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북측의 인도적 조치에 상응해서 우리가 식량이나 물품을 지원하는 프라이카우프 방식으로 협의가 이뤄졌다. 노무현 정부 때 한 해 남북협력기금이 7000억 원가량이었다. 북한에 쌀, 비료 주던 예산이다. 해마다 쌀 30만~40만t을 북한에 보냈다.
이명박 정부는 한 번도 집행하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은 이 예산 범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고향 방문을 실시하면 ○t, 상봉을 실시하면 △t, 서신 교환을 하면 ◇t 이런 식으로 인도적 지원을 하자는 것이다. 북한 처지에서 쌀이 급하면 고향 방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고향 방문이 이뤄지지 않으면 쌀을 덜 주거나 안 주면 된다.”
“이것저것 더 얻어내려다 깨져”
“핵 문제를 포함해 6개 항목에서 협의를 완료했다. 실무만 남은 상황에서 깨졌다. MB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후 납북자·국군포로 ○명과 함께 돌아왔을 것이다. 협상이 깨지는 과정에서의 팩트를 분명히 해두는 것은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남북이 다시 대화를 시작할 때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북한 문제에 경계심을 가진 사람들은 나와 얘기할 때는 명분이 달려서 ‘해보자’고 해놓고, 내가 없을 때는 나만 빼놓고 같은 소리만 냈다. 노동부 장관이 아닐 때는 나를 향해 뭐라고 못했는데 내가 장관 신분이 되니까 문제 삼을 게 생긴 거다. 국회의원 신분이었다면 대통령 특사로 협의를 끝내도 되는데, 노동부 장관은 특사라고 하기엔 어색했다. 노동부 장관이 최종 합의를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 것이다. 시샘한 거다. (결과물을 더 얻어내거나 결렬되더라도 나중에 자신들이 회담을 성사시켜) 공을 차지하려고 했다. 이것저것 더 얻어내려다 북측에서 ‘이건 깬다는 얘기구나’ 해서 깨진 거다.”
MB 정부에서 대통령통일비서관을 지낸 정문헌 의원이 한 언론에 밝힌 내용도 임태희 전 실장의 견해와 같다.
“그때 북의 손을 잡아줬어야 하는데 (통일부가) 더 누르려고 했다. 통일부가 전임 정부처럼 비선으로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협상을 (임태희에서 통일부로) 넘겨줬다. 통일부에서 추가 요구를 했다. 안 그래도 됐는데 무리하게(요구해서 정상회담을 못 했다). 그때 남북관계를 풀었으면 참 좋았다. 우리 처지에서는 핵 문제가 어젠다 세팅이 됐다. 대통령이 가서 비핵개방 얘기하면서 풀도록 돼 있었다. 우리가 주는 것도 없었다.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인도적 지원을 대가로) 납북자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관여파의 상황 인식은 대통령과 원칙파의 집단기억인 MB 회고록 5장의 내용과는 180도 다르다. 임태희 전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이산가족 문제, 인도적 지원 문제,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을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삼기로 김양건과 협의했다. 두 사람의 협의 내용을 정리한 문건에는 “이명박 대통령 평양 방문 시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 ○명의 고향 방문을 실시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가리킨다. 납북자, 국군포로의 고향 방문이 정상회담 전제조건이었고 이를 북한이 받아들인 것이다.
‘협력’이 ‘요구’로 둔갑
‘북한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는 회고록의 문장은 그간 공개되지 않은 얘기다. 이 문장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임 전 실장과 김양건이 작성한 문건에는 ‘북측 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제금융과 거래할 수 있는 국가개발은행 설립을 위해 책임 있게 협력한다’고 돼 있다. 100억 달러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외자유치 등을 돕겠다는 취지다.
서면으로 정리된 내용에는 정상회담 10일 후 쌀 2만t을 북한에 지원하는 것으로 돼 있다. 2만t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 비교하면 미미한 지원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t, △월 ○t 식으로 단계별로 지원하는 것으로 돼 있다.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지원하는 것이다. 북한이 약속을 안 지키면 지원하지 않으면 됐다.
천안함 폭침은 싱가포르 비밀회동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도발이라고 봐야 한다. 싱가포르 비밀접촉→통일부 통일전선부 협상 결렬→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및 국정원-보위부 비밀접촉→북한 국방위 비밀접촉→북한의 비밀접촉 폭로 등으로 이어지는 양상은 MB가 무용담처럼 서술한 것과는 다르다.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라기보다는 참모 간의 견해 차이 등으로 인한 ‘난맥’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MB는 ‘대통령의 시간’ 말미에 회고록 기술 원칙을 설명했다. ‘사실에 근거할 것, 솔직할 것, 그럼으로써 후대에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것.’ 그런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안이며 현 상황에도 영향을 미치는 남북관계 관련 서술의 경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이 발견된다. 솔직하기보다는 자화자찬 경향이 있고, 후대에 실질적 참고가 되기엔 미흡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