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위기에 더 빛난 ‘평등 파트너십’

네덜란드 ‘컨센서스 경제’ 다시 보기

  • 이종우 |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chongwoo.lee@lgeri.com 이혜림 |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hllee@lgeri.com

    입력2015-02-23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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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초 고임금-고실업-고복지의 악순환에 빠져 있던 네덜란드는 1983년 바세나르 협약을 계기로 1990년 이후 20년간 고성장을 이뤄 ‘네덜란드의 기적’을 일궈냈다. 저성장을 탈피하기 위한 구조적 개혁이 시급한 우리에게 네덜란드의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몇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인구 규모가 비교적 작고, 천연자원이 부족하며, 강국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럼에도 양국 모두 눈부신 경제성장의 경험이 있고, 구조적 제약 요건하에서도 고성장을 통해 세계경제에서 입지를 굳혔다. 네덜란드의 1인당 GDP는 2014년 기준 5만2000달러로 독일, 영국, 프랑스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다.

    네덜란드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간에 걸쳐 견고한 성장을 이뤘지만, 1980년대 들어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 10%가 넘는 실업률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경제주체 간 협력을 통해 경쟁력을 끌어올림으로써 저성장을 극복하고 1990년대에 다시 3% 성장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 이후 약 20년간 유럽 평균을 상회하는 연평균 2.9%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네덜란드의 기적을 가져온 원동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컨센서스(consensus)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컨센서스 경제란 정책 수립 시 정부와 노사단체 대표 간에 사전 이견 조율이 제도화한 경제를 말한다. 한국 경제는 경제 발전 단계의 다음 행보를 찾아서 성장세를 잇기 위해 다시 드라이브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와 그 안에서의 사회경제적 정책 결정 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과도한 복지로 인해 근로 의욕이 급격히 저하되고 고실업이 지속되며, 사회보장 비용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정부와 기업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고비용에 시달리는 ‘고용 없는 복지’ 현상을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 한다.



    1959년 네덜란드 북부 해안에서 천연가스 유전이 발견되면서 네덜란드 정부는 막대한 추가 수입을 얻게 됐다. 이를 이용해 1960~70년대에 공공지출을 크게 늘렸고, 복지지출 역시 대폭 확대해 복지 수준이 과도할 정도로 향상됐다. 그 결과 실업자가 다시 일할 유인이 없어지면서 1970년대 62% 수준이던 경제활동참가율은 1982년 57%까지 하락했다. 천연가스 수출에 따른 경상 흑자는 길더화 가치를 절상시켜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1973년과 1979년 글로벌 오일쇼크는 경제침체를 가져왔다. 1960년대 연평균 5.4%를 기록하던 국내총생산 (GDP) 증가율은 1970년대 2.9% 수준으로 낮아졌고, 1980년대에는 연평균 1.9%까지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번 늘어난 복지 지출은 줄어들지 않아 1970년 11% 수준이던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이 1985년 20%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도 계속돼 노동비용은 197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의 3배에 달하는 8.7%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했다. 결국 고임금-고실업-고복지의 악순환에 접어든 네덜란드는 고용이 매년 3.1%씩 감소해 실업률이 1970년 1.4%에서 1975년 4.3%, 1983년 10%까지 치솟았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1982년에 출범한 루드 루버스(Ruud Lubbers) 내각은 경제위기 탈출이 시급한 과제였다. 특히 과도한 임금 수준이 경쟁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 판단했다. 정부는 노사 간 임금협상을 통해 임금상승률을 끌어내리지 못할 경우 일방적인 임금억제정책을 펼치겠다고 압박했고, 이에 대표 고용주연합회와 노동조합은 합의하기로 결정한다. 이 협약이 1982년 11월 체결된 바세나르 협약이다.

    협약의 주요 메커니즘은 ‘정부의 최소한 개입하에 노사 간 긴밀한 협력을 통해 이뤄진 컨센서스(의견 조율)에 기반을 둔 정책 결정 조정’이다. 협약의 핵심 내용은 임금 안정으로, 노사는 임금인상 억제에 대한 협약을 통해 고비용 구조를 타파하고,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 차원의 근로시간 단축, 파트타임 기회 양산, 조기 은퇴 장려 정책 등을 추진함으로써 경제 회복과 고용 창출의 기반을 닦는 것이었다. 또한 임금인상 억제 원칙을 지키는 선에서 노사에 임금 교섭의 직접적 책임을 지게 하고, 정부는 임금 교섭에 최소한으로 관여하기로 했다.

    바세나르 협약으로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위협하던 임금 고공행진이 멈췄다. 1983년부터 임금-물가 연동제 단계적 폐지, 1984년 공공부문 임금 3% 삭감 등이 추진되면서 1970년대 연평균 8.7%씩 증가하던 단위당 노동비용은 협약 이후 2년 동안 -3.4%로 하락했다. 글로벌 경쟁력 개선에 따라 1980년부터 3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수출은 1984년부터 반등하기 시작해 1980년대 말에는 연평균 10% 수준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들어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네덜란드 경제는 협약 이듬해인 1983년부터 경기회복세를 되찾게 된다.

    노동시장 개선이 이끈 기적

    임금 안정과 함께 추진된 노사정 합의에 의한 근로시간 단축 노력으로 주당 노동시간은 1983년 37시간에서 1993년 33시간으로 단축됐다.

    또한 주당 30시간 미만 시간제 근로가 활성화하면서 전체 고용에서 시간제 근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1980년대 초 16%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36%로 확대됐다.

    일자리 나누기 정책의 효과는 고용기회 증가로 나타났다. 1990년대 네덜란드는 매년 2.2%의 고용 증가를 기록해 유럽 평균 수준을 크게 상회했다. 한때 10%에 육박하던 실업률은 1980년대 후반에는 7%대, 1990년대에는 평균 4%까지 하락했다.

    시간제 근로는 특히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촉진했다. 1970년대 초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29%에 불과했지만, 바세나르 협약 이후 유연 근로의 활성화에 따라 1990년에는 60%까지 상승했으며, 여성이 총 시간제 일자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5%까지 높아졌다.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과도한 복지에 따른 근로의욕 상실로 하락을 거듭하던 경제활동참가율이 1985년을 기점으로 반등하면서 경제성장 잠재력도 상승세로 돌아섰다. 선진국 대부분이 고령화로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네덜란드는 1980년대 초 1%대에서 1990년대 3%까지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럽 평균인 1.1%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노동시장 개선은 내수 확대에도 기여했다. 취업자 수 확대로 소득 기반이 높아지고, 시간제 근로 확산으로 근로시간이 줄어들면서 소비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늘어났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육아 서비스 등 가사 관련 서비스 수요가 급증했다. 의료, 사회 서비스 등 여성 근로자 비중이 높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전체 취업자 중 서비스업 종사자 비중은 1980년대 초 50% 수준에서 1996년에는 74%로 확대됐고, 서비스업의 활성화는 내수경기 회복을 촉진했다.

    확대일로를 걷던 공공지출로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국가 재정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실업자 수 감소에 따른 실업급여 축소, 경기 회복에 따른 세수 증대 효과 등에 따라 1980년대 초 GDP의 7.2%에 달하던 정부 재정적자는 1990년대 중반 2.2%로 줄어들었다.

    노사정이 힘을 합친 개혁의 성공으로 1990년대 유럽연합(EU) 전체 연평균 성장률이 2.1%에 그친 동안 네덜란드는 3.1% 성장했고, 유럽의 강소국으로 변모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병’ 대신 ‘네덜란드의 기적’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Social Partner

    네덜란드가 ‘컨센서스 경제’로 불리는 이유는 노사 간의 협약이 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가 부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바세나르 협약은 임금 안정과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1장 남짓한 문서에 불과하지만, 이를 기반으로 이후 노사 간의 임금 안정과 고용 창출에 관한 사회협약이 지속적으로 수립됨으로써 컨센서스 경제를 이룰 수 있는 노사 합의의 기반이 갖춰졌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로 첫째, 노사정 간의 긴밀한 협조체제(Consensus Process)가 잘 갖춰져 있었다는 점. 둘째, 노사정 간의 관계가 동등한 파트너십에 근거했다는 점. 셋째, 노사 간 협약과 권고사항이 정책에 수용되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노사가 임금 및 유연근로와 같은 이슈에 대한 합의에 이르도록 압력을 넣은 정부의 리더십을 꼽을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라의 재건은 한 집단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고용주와 근로자 그룹 간 긴밀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퍼졌다. 이 시기에 컨센서스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두 기관이 설립됐다.

    1945년 설립된 노동재단과 1950년 설립된 사회경제평의회는 주요 고용주연합회와 노동조합이 중요한 사회 경제정책의 이슈를 논의하고 정부에 권고사항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제공해왔다. 두 기관의 구성 멤버인 고용주연합회와 노동조합은 경제 발전에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트너(Social Partner)’로 불린다.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에서 노동재단과 사회경제평의회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두 기관에서 제안한 견해와 권고사항은 사회적 파트너 간의 통합적인 분석과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이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대부분이고, 이는 사회경제 정책 논의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는 두 기관이 제시한 견해를 사회경제 정책 입안 때 대부분 수용한다. 어떠한 정책이라도 컨센서스에 기반을 두는 것이 중요하며, 정책이 성공하려면 사회 전체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세나르 협약을 비롯해 사회적 파트너들이 준비하고 서명한 모든 사회적 협약이 사실은 이 두 기관 내에서 사전 논의가 이뤄진 것이었다.

    노동재단이나 사회경제평의회와 같은 기구가 네덜란드에만 있는 독특한 조직은 아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 경제정책 결정 과정의 각 단계에서 노사정 3자가 집합적으로 관여하는 수준이 상당히 높으며, 이것이 네덜란드 컨센서스 경제가 작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위기에 더 빛난 ‘평등 파트너십’

    1980년대 경기침체를 극복한 네덜란드 국민.



    뿌리 깊은 협력 전통

    기관의 구조 자체에 동등한 파트너십이라는 개념이 적용돼 있다는 점도 이들이 잘 작동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노동재단의 경우 3대 고용주연합회와 3대 노동조합의 대표가 각각 8명씩 이사회 멤버를 구성한다. 최대 고용주 연합회 대표와 최대 노조 대표가 이사회의 공동의장으로 임명된다. 모든 의사 결정은 투표를 거쳐 3/4석 이상의 찬성을 받도록 정관상 규정돼 있었지만, 주요 이슈에 대해 만장일치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투표가 생략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회경제평의회는 노동재단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데, 사회적 파트너들에 더해 네덜란드 국왕이 지정한 전문가들이 구성원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노동재단과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사회경제평의회는 33명의 멤버로 구성되는데, 11명의 고용주연합회 대표와 11명의 노동자협회 대표, 그리고 내각 추천인 중 왕이 지명한 11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가 포함된다. 네덜란드 중앙은행과 중앙계획국의 대표는 국왕이 지정한 멤버로서 사회경제평의회에서 상임석을 갖는다.

    노동재단과 사회경제평의회의 설립으로 노사정이 사회경제적 이슈를 논의할 수 있는 협조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는 기업과 노조가 균형 잡힌 사회경제 정책 형성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네덜란드 컨센서스 모델의 성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치로 노조파업 일수를 들 수 있다. 임금근로자 1000명당 파업으로 인한 근무손실 일수는 2000~2004년 평균 10.7일로, EU 평균 61.2일이나 OECD 평균 78.5일에 비해 매우 적다.

    네덜란드 컨센서스 모델에서 사회적 파트너 간의 평등한 파트너십은 고용주와 노동자의 참여를 도출하는 시스템화한 프로세스만큼이나 중요한 기능을 한다. 전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사회적 파트너들은 노동시장의 개선이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집단의 선(善)을 위해 협력하는 전통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네덜란드 국토의 절반은 바다와 강을 피와 땀으로 개척해 일궈냈다. ‘물’과의 사투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인의 협력 전통은 기원전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사투 과정은 서로 간의 긴밀한 협력을 요했다. 집단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협력하는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동등한 파트너십이 핵심 요인으로 포함되는 컨센서스 모델에서 나타난다.

    정부에 대한 믿음

    특히 바세나르 협약과 1993년 체결한 신노선 협약에서 보듯이 노동조합은 기업의 성장이 고용안정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했고, 임금인상 억제와 기업의 경쟁력 회복을 위한 협력에 합리적인 태도를 취했다. 노사 양측 모두 기업의 재무상황을 고려해 노동시장 개혁을 통해 기업의 고비용 구조를 타파하는 데 협력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양측 모두 기업 실패의 결말은 피하고 싶어 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집합적 이해관계와 합리적인 담론은 네덜란드 컨센서스 경제를 특징짓는 요소다.

    컨센서스 모델에선 네덜란드 정부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회적 협약 뒤에는 사회적 파트너들이 합의하지 않을 경우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을 강요하겠다는 압박이 있었다. 정부의 결정을 강요받는 대신 자신들이 룰을 결정하기 위해 사회적 파트너들은 서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1997년 바세나르 협약 15주년 기념식에서 루버스 전 총리는 정부가 임금 정책을 펼치겠다는 압박이 바세나르 협약 성립의 최소 요건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정부의 압력 없이는 노사 간 합의 도출이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부 및 정책 입안자들의 또 다른 기능은 사회적 파트너들의 사회적 협약 과정에 협조하고 협약 내용을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바세나르 협약 논의 때 약속한 대로 사회적 파트너들이 직접 임금 수준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거나, 1999년 노동유연성과 안정성법을 제정함으로써 노동유연성 협약에서 사회적 파트너들이 만들어낸 권고사항을 실행에 옮기는 등 정부는 사회적 파트너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바꿔 말하면 사회적 파트너들은 그들의 협약과 권고사항이 실행에 옮겨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처럼 정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사회적 파트너들은 집단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한 것이다. 바세나르 협약을 통해 보여준 정부의 공정성과 결단력은 국민의 신뢰를 얻었고, 이는 이후 신노선 협약, 노동유연성 협약 등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파트너십이라는 관계는 민간기업과 노동조합 사이뿐만 아니라 정부와 사회적 파트너 사이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모델은 경제 모델이라기보다, 컨센서스에 기반을 두고 제도화한 메커니즘의 경제정책 결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는 위기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경제위기는 그 심각성이 클수록 대책도 극단적일 필요가 있으며, 이처럼 과감한 대책이 실제로 집행될 수 있으려면 종합적인 시각에서 사회경제를 바라보는 판단과 함께 폭넓은 지지 기반이 필요하다.

    ‘폴더 모델’의 여러 얼굴

    위기에 더 빛난 ‘평등 파트너십’

    네덜란드는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할 부분이 많다. 한국의 전문가들이 헤이그 시 고용복지센터를 방문해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네덜란드 컨센서스 모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바세나르 협약은 임금 조정에 성공했다는 측면에서 특히 찬사를 받았다. 임금 조정을 뜻하는 ‘Loonmatiging’이라는 용어는 바세나르 협약의 성공 사례를 언급할 때 늘 동반되는 수식어다.

    바세나르 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모든 이해집단이 경제 재건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서로 힘을 모아 협력하면서 생겨난 네덜란드 컨센서스 경제(Overlegeconomie)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컨센서스 모델이 갖는 집단적 협력이라는 측면은 네덜란드 경제체제를 얘기할 때 ‘폴더 모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폴더’는 간척지를 뜻하는 말로, 역사적으로 바다와 물과의 사투에서 살아남으려 협력해온 네덜란드인의 전통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나온다. 컨센서스 모델을 비판하는 이들의 주요 논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조합주의(Corporatism)로, 사회적 파트너들이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행사하는 막대한 영향력이 전체 노동자나 기업을 대표하는지의 문제다. 네덜란드의 노동조합 가입률은 계속 떨어지는 추세로, 2011년 기준 노조 가입 인원은 전체 노동력의 20%에 불과하다. 이와 유사하게, 고용주연합회의 대표성 역시 고용주연합회에 소속된 기업의 수만으로는 완전히 정당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임금 조정이라는 폴더 모델의 목표가 1982년, 1993년, 2003년에 이뤄진 사회적 협약 당시에는 유효했으나, 현재 시점에서 같은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창조경제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이테크 산업에서 임금 수준이 전 산업 평균보다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금 조정 정책은 창조경제 발전에 상당히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컨센서스 경제를 도모할 때 네덜란드식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바세나르 협약 이후 네덜란드에서 폴더 모델이라는 용어는 임금 조정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나, 지금 시점에선 다양한 경제 목표에 적용 가능하다.

    아베 일본 총리는 디플레이션 탈출과 경기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면서 바세나르 협약을 벤치마크해야 할 사례로 들었다. 여기서 바세나르 협약은 임금조정이라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쓰였다. 아베 총리는 일본 기업과 노동자들이 임금 및 상여금 ‘인상’에 대해 합의해야 하며, 이 이슈에 관한 컨센서스에 도달하는 과정의 바람직한 사례로 바세나르 협약을 들었다.

    폴더 모델과 그의 상징인 바세나르 협약은 이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컨센서스를 형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 기반이 형성되고 나면 이어지는 정책은 급조한 것보다 포괄적인 동시에 넓은 지지 기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것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컨센서스에 도달하기 위해 쏟는 시간이 정책의 빠른 실행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제자리걸음 노사정위원회

    네덜란드의 임금 안정과 복지개혁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84년에는 공공부문 임금 3% 삭감에 대해 공공부문 및 건설 부문에서 전후 최대 파업이 있었고, 1991년 헤이그 대규모 시위 등 국민적 저항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노사정 3자 간의 협력과 협의라는 기본 틀 내에서 소화됐다. 네덜란드 사례는 컨센서스 경제가 잘 작동하려면 경제사회적 정책결정 과정 전반에 걸친 협력과 협의를 위한 플랫폼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폴더 모델의 성공은 정부, 민간, 노동조합 당사자들 간의 집합적인 관여와 협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플랫폼이 있기에 가능했다.

    1945년 이후 네덜란드 경제는 이러한 컨센서스를 다져갈 플랫폼을 유지해왔다. 기업 차원 혹은 특정 산업 내에서는 노동재단이 그 기능을 했고, 국가 차원에서는 사회경제평의회가 정부와 사회적 파트너에게 플랫폼을 제공했다. 이러한 협력 플랫폼을 마련함으로써 효율적 프로세스를 가능케 하는 제도를 갖춘 것이다. 협력이 생겨난 뿌리 역시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 경제 발전에 있어 고용주와 피고용인은 경제호황의 결실을 나누고, 어려울 때는 함께 짐을 지는 동등한 파트너로서 인식됐다.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는 중요한 정책 개혁을 앞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경우, 협의의 플랫폼으로서 노사정위원회가 존재하지만 당사자 간 합의 방식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노동개혁에 관한 논의가 수년째 제자리걸음 하는 등 노사정 협의기반은 취약한 실정이다. 지난 연말 노동시장 구조 개선의 기본 원칙과 방향에 노사가 합의하기는 했으나 구체적 방안에 관해서는 협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저성장을 탈피하기 위해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황에서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구조조정에 성공하려면 주요 경제주체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 과제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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