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은 정조 이전에는 대여섯 가구가 자연에 의탁해 살아가던 들판이었다. 200여 년 전 마련한 토대 위에서 불안이 가득한 21세기의 일상이 건사된다.
수원 화성 창룡문에서 본 연무대 앞 잔디밭.
사람들은 근면하고 성실해 “지난 20여 년 동안에 수공업자에서 공장주로 탈바꿈한 사람이 더러 있”을 정도로 물질적 만족을 웬만큼 획득했고 저마다의 품성 또한 따사롭고 다정하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견실하고 행복”했으며 대개 “교양 있는 척하면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물론 인간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듯이 약간의 실수와 죄악과 뉘우침이 없지는 않으나 오랜 근대적 습속과 관계가 이를 해소하거나 억눌러버리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속 깊은 얘기는 더 깊은 속으로 밀어넣고 익숙한 공동체의 규칙 안에서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야심이 있으니 자식들만은 이 작은 마을의 “치유할 수 없는 고루함”에서 벗어나서 큰 도시로, 대처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살기를 바랐다. 그러자면 공부를 잘해야 했다. 공부만이 살길이었다. 아쉽게도 이 마을의 소년들은 하나같이 부모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낙제를 거듭한 끝에 겨우 졸업하는 수준”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그야말로 “이 좁은 세계 너머로 눈을 돌리거나 영향을 끼칠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한 소년만이 여느 평범한 아이들과 눈빛조차 달랐다. 소년이 얼마나 남다른지는 “다른 아이들 틈에 끼여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지한 눈망울과 영리해 보이는 이마, 그리고 단정한 걸음걸이”를 가진 소년은 한 집안의 기대를 넘어 마을 전체의 열망을 일찌감치 짊어지게 됐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음에도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가족과 친구와 마을 사람들을 늘 정중하게 대했고 고전 그리스 서사시에서 중세의 신학과 현존의 철학까지 몰입했던 이 소년에게 마을 전체가 기대를 걸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이야기다. 총명하고 기품 있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독일 남부 지역에서 성장한 헤세의 성장기와 일치한다.
건릉.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나서 ‘혹시 이거, 내 얘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실은 그 때문에 ‘수레바퀴 아래서’로 이 글을 시작한 것이다.
요즘이야 서울이나 부산,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 나고 자라고 그 대도시가 강렬하게 요구하는 일그러진 교육 열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원하는 대학 입학을 꿈꾸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만, 20세기 중엽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신화가 곳곳에서 작성된 바 있다.
내 가까운 사람 중에도 그러한 이력을 지닌 이가 적지 않다. 전남 목포, 전북 부안, 경북 영주, 경남 함안, 제주 서귀포, 강원 인제 등지에서 그야말로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 말이다.
방금 목포, 영주, 인제 이렇게 큰 도시 지명을 적었지만 내 아는 사람들은 그런 도시조차 중고교 때나 구경해봤을 뿐이고, 나고 자라기는 목포에서도 연락선을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외딴섬이거나 영주나 인제에서도 깊고 높은 산속으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궁벽한 산촌 출신이다. 아침 일찍 산골짜기 마을에서 걷고 또 걸어 면소재지 버스 정류장에 가서 하루에 한 대밖에 오지 않는 시골 버스를 타고 영주나 인제로 나가서 그곳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의 고명한 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러 가던 소년들, 그들이 이제는 마흔이 넘고 쉰이 넘어 한국 사회의 중추로 일한다. 흔들리는 고속버스나 새벽기차를 타고 홀로 대도시로 나와 이를 악물고 공부한,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아침 일찍 마을을 나설 때, 가족은 물론이고 더러는 마을 사람들까지 송별의 길에 나섰다. 약국댁 큰아들이 서울로 간다 해 나오고, 윗마을 어른 둘째 손자가 부산에 좋은 대학 입학하러 간다 해 나오고, 여자애가 공부가 다 뭐냐며 낡은 참고서를 불태울 때 담장 너머로 혀를 차며 구경하던 사람들도 서울의 최고 좋은 여자대학에 공부하러 떠나는 달밝골 큰 여식을 송별하러 나온다. 이런 풍경이 저 산업화 시절에는 결코 드물지 않았다. 그렇게 입신양명의 큰 꿈을 품고 대도시로 나선 사람들은 가족의 꿈이었고 마을의 자랑이었다.
좌절된 시대
그랬는데 한스 기벤라트는 자살하고 만다. 독일 남부 슈바벤의 작은 도시 칼프에서 신앙심 깊은 신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세는 자신이 청소년기에 겪은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기벤라트의 죽음으로 토해냈다.
헤세는 명석한 소년들만 지원하는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고작 7개월 만에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왔고 그로부터 3개월 후에는 신학교에 자퇴원을 제출한다. 신학 교리와 라틴어 문법책에 사로잡힌 그의 영혼은 학교 밖으로 탈출하면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비록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를 짓거나 소설을 구상하는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헤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켰다.
다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분신 기벤라트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소설 앞부분을 보면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각 지역의 우수한 두뇌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경쟁을 하는 시험에 참여하고자 소년 한스가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한스를 배웅하는 것이다. 기차역까지 따라 나온 이도 있었다. 일찌감치 한스의 탁월함을 알아본 교장과 목사는 마치 자기 집안의 일인 듯 온 정성을 다해 한스를 보살피고 격려한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못다 이룬 드높은 꿈을, 한스라는 총명한 소년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는 심각한 정신적 갈등과 방황을 겪다가 그만 학교를 벗어나고 만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허드렛일을 하거나 자유분방한 친구와 함께 낚시에 몰두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 특히 그를 각별히 아끼던 지역 유지들은 서서히 기대와 열망의 시선을 거두고 차츰 냉대하고 책망한다. 한스는 그렇게 조금씩 파멸의 길로 간다.
나는 지금 경기도 수원에서 오산으로 빠지는 국도변의 융건릉을 걸으며 한스 기벤라트, 곧 헤세의 좌절된 시대를 생각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지난해 12월은 그야말로 북풍에 한설로 매섭고 추운 날씨였으나 해가 바뀌면서 추위도 누그러들었고 입춘도 지나 융건릉 권역은 잔설조차 녹아버린 따스한 풍경이다. 아마도 오뉴월이며 볕 좋은 가을에는 이 권역에 적지 않은 인파가 역사도 공부하고 숲 속으로 산책도 하기 위해 모여들건만, 평일의 겨울 낮에는 미세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도 생생하리만치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 이 권역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융릉)을 조성하고 그 왼쪽 뒤편으로 자신의 무덤(건릉)을 조성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소중한 곳이다.
정조의 삶에 대해서는 수많은 문헌과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갖은 방식으로 증명한 바 있어서 이 지면에 일일이 옮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 능선에서, 그리고 정조가 야심 차게 일구고자 했던 수원 화성 일대를 순례하면서 오늘날 우리 삶의 어떤 양상을 복기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다음의 극적인 순간만큼은 이 융건릉과 수원 화성을 살피려면 잠시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정조는 일곱 살 때 세손에 책봉됐고 열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겪었다.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 1권’, 곧 즉위하던 해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776년 3월 10일,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한 이후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며 물이나 미음도 들지 않았고, 상사(喪事) 이외의 일”을 멀리했으며 이윽고 대소신료들이 왕위를 이어받기를 간청했으나 여러 날 동안 울며 허락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즉위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시(午時)에 대신들이 어보(御寶) 받기를 청하니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되지 않자, 면복(冕服·면류관과 곤룡포)을 갖추고 부축을 받으며” 마침내 즉위식이 거행됐으나 막상 경희궁 숭정문으로 들어선 이후에도 “울먹이며 차마 어좌(御座)에 오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대소신료와 종친들이 좌우에서 눈물로 청하였으되 “왕이 울부짖기를, ‘이 어좌는 곧 선왕께서 앉으시던 어좌이다. 어찌 오늘 내가 이 어좌를 마주 대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했다. 대신들이 해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들어 누누이 우러러 청하자, 왕이 드디어 어좌에 올랐는데 백관들이 예를 행하니 면복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즉위식을 마친 후 정조는 “지극한 애통을 스스로 견딜 수 없는데 차마 더욱 굳어지는 당초의 뜻을 늦출 수 있겠느냐마는 대위(大位)를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찌 막을 수 없는 대중의 심정을 헛되게 하겠느냐?” 하며 왕으로서의 첫 과업을 실시하는데, 그것은 대사면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널리 사면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니, 어둑새벽 이전의 잡범 가운데 사죄(死罪·사형에 처할 범죄) 이하는 모두 용서해 면제해주라. 아! 오늘날은 처음으로 즉위한 참이기에 마땅히 널리 탕척하는 인(仁)을 생각하였고 나의 일을 끝맺기를 도모하니, 거듭 밝은 아름다움을 보게 되기 바란다”고 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남겼다.
이윽고 수많은 역사 소설과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조의 실질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첫 번째 정치 행위가 시작된다. 즉위식을 마치고 사면령을 내린 후 정조는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정조의 꿈
정조는 곧장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호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또한 자신의 자리도 스스로 마련했으니 융릉(隆陵) 옆에 조성된 건릉(健陵)이 곧 정조의 능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능이며, 건릉은 정조와 효의황후(孝懿王后) 김씨가 합장된 능이다. 조선의 역대 왕릉이 어디나 그렇듯 융건릉 또한 평안하고 그윽한 구릉에 경건하게 조성돼 있다.
자료를 살펴보니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천하를 품고 노니는 형상, 즉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라 한다.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 즉 융릉에서 그윽하게 가라앉는 오른쪽 능선 끄트머리에 여의주 모양의 연못을 파서 그곳이 용의 머리가 가 닿는 형상으로 조형하라고 엄명한 것도 이 야트막한 능선의 기품 때문이다. 일컬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할 만하다. 연못이 없다 해도, 이 기품 있고 부드러운 능선은 더없이 거룩한 형상이건만 용이 여의주를 품는다는 결정적인 공간 조형, 즉 연못으로 인해 더욱 아름답고 경건하다.
정조는 1776년 8월 17일 아버지 사도세자를 더욱 추존하고 드높게 존호를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슬프게도 음용(音容·음성과 용모)을 받들 수 없으니, 어찌 나를 낳아 준 덕을 갚겠는가. 내가 새로 즉위하기에 미쳐서는 고독(孤獨)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 아! 저 흉악한 무리들은 어찌 다만 성조(聖祖)에게만 무함(誣陷)이 미쳤겠는가. 밝게 엄토(嚴討)한 것은 대개 선친(先親)이 슬퍼하신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이미 융성한 전례(典禮)로 종사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 극진히 하였으니, 저 사사로운 은혜라 하여 어찌 근본을 갚는 데에 소홀히 하겠는가.” 이런 마음의 결정판이 융건릉 조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불안의 시대
1789년 7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조선 왕조의 마지막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용주사(龍珠寺)를 중창했다. 융릉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숲을 따라가면 곧 보게 되는 사찰로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됐고 병자호란 때 소실돼 숲 속에 방치된 곳인데, 정조가 이를 중창해 능침사찰로 삼은 것이다. 정조는 1790년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를 용주사로 보내 대웅보전과 칠성각의 탱화를 지휘하도록 했는데 그 기간이 2월부터 9월까지, 216일 동안 이어졌다.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아버지를 찾아 능행길에 오른 정조는 어느 날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륭원(융릉의 이전 이름) 근처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소원대로 그는 융릉 동편에 묻혔으나 그 자리가 원만치 않다는 설이 자주 제기돼 효의왕후가 사망하자 지금의 서편 자리로 옮겨 합장했으니, 건릉이다.
정조가 근대적인 조선을 열망한 문예부흥의 군주였음은 두루 확인된 바와 같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인 장서 3만여 권의 규장각을 설치하고 주조활자와 목활자 80여 만 자를 만들어 이를 통해 수많은 책자의 간행을 도모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우문지치(右文之治·학문을 중심으로 한 정치), 작성지화(作成之化·발명과 발견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이룸)’, 곧 규장각의 슬로건이다. 숙종 이래 완전히 패퇴한 남인의 선비들을 등용하거나 규장각 검서관직(檢書官職) 네 자리를 모두 서민 출신으로 등용하면서 남북·노소론의 당파를 벗어나 천하의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고자 한 점도 뚜렷하다.
물론 이 문화통치는 곧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행위이기도 했다. 그가 근대적인 조선을 열망했다는 것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평가한 것이고, 정조 자신은 왕권 강화를 위해 서학(천주교)을 지속적으로 탄압했고 문체반정을 통해 왕권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위반이 되는 글월을 입에 올리는 자를 엄벌했다. 당대 최고의 수재 이옥(李鈺)을 문체가 난삽하고 이질적인 사유가 스며들어 있다 해서 거듭 지방으로 좌천시킨 일이 대표적이다. 연암 박지원은 정조로부터 문체와 사유의 흠결에 대해 지적을 받고는 곧 참회하는 글을 올렸지만 이옥은 이를 마다해 중앙 권부에서 밀려나 세상 밖으로 떠돌았다.
이런 점을 두루 검토할 때, 이 시대를 제대로 읽으려면 연암의 기록이나 다산의 문집에 더해 전 5권으로 출간된 ‘이옥전집’ 또한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즘으로 치면 사상이 불순해 제도권에 오르지 못한 재야의 천재적인 사상가가 그 나름대로 세상을 살피고 준열하게 비판과 풍자를 더한 것이 ‘이옥전집’이다.
‘교양시민’은 누구인가
역사라는 기찻길에는 수많은 레일이 깔려 있어 설령 종착역이 엇비슷하다 해도 그에 이르는 역사의 행로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서구의 경우 ‘근대’라는 종착역에 도착하기 위해 ‘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이라는 이중혁명(에릭 홉스봄)을 대체로 거쳤으나 그것을 제대로 완결한 곳이 있는가 하면(영국, 프랑스) 독일처럼 그것이 한없이 지체되거나 실패해 결국 비스마르크의 국가주의와 히틀러의 파시즘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곳도 있다. 포르투갈, 체코, 핀란드 등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선 영국, 프랑스, 독일과는 또 다른 과제(특히 강대국에 맞선 독립운동)를 수행했어야 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의 비극적인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근세 초기에 경제적으로 주권을 확보한 영국의 근대인이나 대혁명으로 정치적 주권을 획득한 프랑스의 근대인과 달리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지 못해 내적인 갈등과 번민에 시달린 독일의 근대인을 표상한다.
이를 문화사적으로는 ‘독일 교양시민 계층’이라고 한다. 경제권력(영국)과 정치권력(프랑스)을 획득하지 못한 독일의 중산시민 계층은 문학, 예술, 교육 등에 진력한다. 그러나 도처에 창궐하는 국가주의와 비스마르크 체제 이후의 강력한 압력으로 인해 이 교양시민 계층은 몰락한다. 그 몰락의 예술적 징후가 구스타프 말러(음악)였고 토마스 만(문학)이었으며 현실적으로 그 몰락이 처참하게 확인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이 혼돈의 시기를 보낸 헤르만 헤세도 1차대전의 참호 속에서 소설 ‘데미안’을 썼으니, 이는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독일 교양시민 계층의 번민과 몰락을 다룬 것이다. 또한 자전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는 그러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해가는 기벤라트를 통해 독일 교양시민 계층의 내적 불안을 그려냈다.
이 그림판을 우리 사회에 투영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우리의 초상화 역시 대서양을 누빈 활달한 영국 시민이나 왕의 목을 자르며 근대의 문턱을 넘어선 프랑스의 시민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왕조의 폐단, 일제의 엄습, 그리고 냉전 체제에 강제 편입된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우리의 초상화는 독일 교양시민 계층과 많이 겹쳐 보인다.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온 가족이 장남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고 온 마을까지 기대를 걸던 지난 세대의 풍경 말이다.
그렇게 하여 일정하게 근대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21세기의 광풍은 이 허약한 토대를 휩쓸고 있다. 어렵사리 중산층에 편입한 기성세대의 사회·심리적 불안감은 갈수록 증대하고 있으며, 그 아랫세대는 이를 악물고 공부해 온갖 스펙으로 무장해도 어엿한 일자리 하나 갖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럭저럭 중산층에 편입하고 나름대로 스펙까지 갖췄다 해도 그 내적인 불안과 공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군림하는 통치, 실종된 정치,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안전망, 파탄 지경의 공교육 등이 거의 모든 세대를 불안과 불만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가 최근 목소리를 높이는 ‘교양시민론’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좀 더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는 “유럽에서 19세기 중후반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사회의 기본 가치가 잡혔는데, 그게 교양시민의 역할이었어요. 우리는 그걸 놓치고 오로지 성장을 위해 돌진해왔죠. 이제 그 빈 곳을 채워야 할 때입니다. 민주화를 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소홀했던 게 뭐냐 하면 독립된 개인이 되는 것, 교양시민이 되는 것이었죠. 이념투쟁, 권리투쟁에만 몰입했던 것 같아요. 교양시민은 사회의 핵심가치를 배양하고 내면화하는 시민이란 뜻”(중앙일보 2011년 11월 9일자)이라고 주장하는데, 국가와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양시민 계층이 과연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오히려 불안이 가중될수록 시민은 스스로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배타적인 사회적 행위에 의지하는 경우가 역사에서 반복됐고, 그 극단적 파탄이 파시즘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는 자신이 속한 교양시민 계층이 몰락 대신 파시즘을 선택했다고 본 현자들이다.
화성 동북공심돈.
발걸음을 수원 시내로 돌렸다. 수원은, 정조 이전에는 대여섯 가구가 자연에 의탁해 살아가던 들판이었다. 이 들판이 정조 18년(1794) 2월 시작해 2년 6개월 만에 완공한 화성으로 인해 근대적인 신도시로 바뀐 것이다.
본래 수원 일대의 행정청은 현재의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에 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송산리 일대의 관청과 민가를 지금의 팔달산 쪽으로 대거 이전한다. 그 대대적인 작업을 마친 후 읍명을 화성(華城)이라고 불렀다.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근대적인 개혁을 지지한 채제공이 신도시 창건의 총책임을 맡았고 경향 각지의 인재가 대거 참여했으되 특히 다산 정약용이 축성 과정을 기획하고 그 지휘 책임을 맡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우선 사대문을 형성하고 그 사이에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 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烽墩) 1개,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등을 배치했으며 특히 성내에 행궁(行宮)을 조성해 임금이 국사를 돌보며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완비했다. 이 신도시를 조성하기 이전에는 겨우 대여섯 채의 집이 있을 정도로 한가로웠던 들판이 전문 장인 1280명이 69만5000장의 벽돌을 바탕으로 일군 화성으로 인해 순식간에 한수 이남의 최대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수원성이 완성된 이듬해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나는 수원성 남문, 곧 팔달문을 거쳐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둘러보고 화성의 북문이면서 정문이자 관문이 되는 장안문을 살핀 후 수원성 동쪽 창룡문에 올라섰다. 6·25전쟁 때 문루와 홍예가 허물어졌으나 1975년에 복원했다. 밑으로는 서울과 오산을 잇는 산업도로가 나 있고 그 양편으로 연무대와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 풍경은 아름답다. 200여 년 전에 마련된 기본적인 토대 위에서 오늘의 일상이 건사되는 풍경이다. 차량은 창룡문과 공심돈을 끼고 유유히 지나가고 사람들은 산책이나 답사 공부를 위해 자연스럽게 잔디밭으로 모였다가 흩어진다. 근대를 이룩하면서 동시에 근대의 폐단을 극복해야만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21세기 시민의 하루 일상이 200여 년 전의 설계도 위에서 이뤄지는 풍경이다. 나는 그 양상을 한참이나 보다가 한국 전통 건축 문화의 백미라고 하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향해 서편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