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는 ‘선전속도’라는 말이 있다. 광둥(廣東)성의 경제특구 선전(深?)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 강도와 속도를 감내하기에 생겨난 말이다. 덕분에 광둥성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자본주의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다.
꼬마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유치원에서 무술수업이 한창이었다. 전설의 무술가 황비홍과 엽문의 고향, 광둥성다운 광경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공원에는 말 타며 활 쏘는 조각상이 놓여 있다. 중국 남방의 거친 야성과 상무 정신이 오롯하게 전해졌다.
광둥성의 약칭은 ‘땅이름 월’이다. 옛 중국인들은 장강 남쪽에 살던 이들을 월족(越族)이라고 불렀다. ‘월’은 ‘월(越)’과 발음과 뜻이 같은 이체자(異體字)다. 광둥성은 남월의 땅이었다. 남월은 월남(越南), 즉 베트남을 가리킨다. 이름 자체가 개척지란 뜻을 가졌을 정도로 광둥성은 이질적인 곳이었다.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손권은 광둥성과 광시성을 개척하며 ‘새롭게 넓혀진 땅’이라는 의미에서 ‘넓을 광(廣)’ 자를 붙였다.
광둥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지리적 특성을 살펴봐야 한다. 광둥성은 중원과 매우 먼 데다 다섯 개의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척박한 땅은 아니다. 중국에서 세 번째로 긴 주강(珠江)이 풍요로운 삼각주를 만들며 바다로 이어진다. 농사와 무역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다. 험한 산이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고 토양이 비옥하니 독자적인 나라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마천은 ‘사기’에 “반우는 큰 도시로서 진주, 코뿔소, 바다거북, 온갖 과일과 삼베가 모이는 곳”이라고 기록했다. 반우는 광저우(廣州)의 옛 이름으로 가깝게는 동남아, 멀게는 로마까지 상인들이 오가던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오랑캐가 부처가 되겠다고…”
유치원 꼬마들의 무술수업.
조타의 남월은 위만조선과 닮았다. 조타는 한족이지만 베트남식으로 상투를 틀고 남중국과 북베트남을 아우르며 두 문화를 조화시켰다. 그는 유방의 외교관 육가에게 “내가 중원에 있었다면 어찌 한나라 황제만 못했겠는가”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베트남은 조타를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황제 찌에우 다로 숭상한다. 베트남 역사가 레 반 흐우는 ‘대월사기(大越史記)’에 “진정한 베트남의 역사는 찌에우 다의 남월로부터 출발한다”고 썼다.
훗날 한무제는 남월을 멸망시키고 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중앙의 감독이 제대로 미치지 않고 지방 관리들이 착취를 일삼아 반란이 잦았다. 후한 광무제 때에는 북베트남 지역에서 쯩 자매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복파장군 마원의 진압으로 끝났지만, 베트남은 오늘도 쯩 자매의 난을 중국의 폭압에 맞선 항쟁으로 기리고 있다.
남월의 광둥성 지역과 북베트남 지역은 점차 다른 길을 걸었다. 광둥성은 중국에 동화해갔고, 북베트남은 남부를 정벌해 오늘날의 베트남이 됐다. 고구려가 만주 일대를 잃고 남하해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격이다.
광둥성이 중원과 동화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중원인들에게 광둥인은 오랑캐에 불과했다. 당나라 때 광둥성의 한 소년이 불법(佛法)을 닦으러 중원의 홍인대사를 찾아가자 홍인은 소년에게 면박을 준다. “남쪽의 오랑캐가 어찌 감히 부처가 되겠다고 하느냐?” 이에 소년은 당차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불성은 개미에게도 가득하거늘, 어찌 오랑캐에게만 불성이 없겠습니까. 오랑캐의 몸이 스님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불성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귀족과 천민이 엄격하게 나뉘던 시대였다. 중원인과 오랑캐가 섞일 수 없는 때였다. 그러나 소년은 불법을 제대로 닦기 전부터 이미 깨우침을 보여줬다. 구분과 차별이란 애초부터 무의미하고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소년의 말은 혁명적 선언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불세출의 선승 혜능대사다. 홍인은 다른 제자들의 반발이 두려워 혜능에게 밤에 몰래 의발을 물려주며 “도망쳐 숨어 살다가 때를 보아 불법을 전하라”고 했다. 혜능은 야반도주한 지 15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광저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불법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 승려들조차 이토록 광둥인을 차별했으니, 일반 대중의 차별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광둥인’ 쑨원
선전의 덩샤오핑 동상.
광둥성이 변혁의 중심이 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대 무역이 활발해지자 중국 유일의 대외무역항 광저우는 외국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떠올랐다. 일찍부터 무역으로 해외를 출입하다 현지에 살게 된 광둥성 출신 화교들은 고향의 가족, 친구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중국 밖 세상 소식을 전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평화로운 교류만 있을 순 없었다. 광둥성은 중국과 서양이 충돌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전쟁, 청나라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알린 태평천국의 난이 이곳을 휩쓸었다.
사상가들은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분투했다. 서양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캉유웨이,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한 쑨원은 모두 광둥인이다. 캉유웨이는 영국령이 된 후 급속히 성장한 홍콩을 보며 서구 시스템에 눈을 떴다. 쑨원은 하와이 화교이던 형 덕분에 영국 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주주의를 익혔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군웅할거 시대가 되자 외부와 고립된 수도 베이징은 정부의 살림을 제대로 꾸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둥성은 풍요로운 물산, 활발한 무역, 부유한 화교의 지원으로 능히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쑨원은 광저우를 근거지로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이 됐고, 후계자 장제스는 북벌에 성공해 중국을 장악했다.
광저우는 국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훗날 공산당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을 재통일하지만,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살림꾼 덩샤오핑은 광둥성에서 시장경제체제를 실험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했다.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편 지 불과 30여 년 만에 G2로 우뚝 섰다. 이처럼 중국 근현대사의 중요 사건과 인물들은 광둥성과 얽혀 있다. 그러니 광둥성의 근현대사는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촌은 어머니와 같다는 말 못 들었어?”
“마오쩌둥 주석이 가족보다 가깝다는 말만 들었어요.”
영화 ‘도협’에서 홍콩 삼촌이 광둥성 조카 주성치와 주고받는 대화로, 1990년대 홍콩과 광둥성의 의식 차이를 풍자하는 대목이다. 홍콩과 광둥성은 한집안이나 다름없지만 체제가 다르니 의식도 크게 달라졌다. 긴 세월 동안 광둥성은 중국과 완전히 동화해 이제는 중국적인, 너무나 중국적인 곳이 됐다. 아래는 필자가 선전박물관에서 중국인 가이드와 주고받은 대화다.
“중국엔 부동산 소유의 개념이 없습니다. 부동산을 70년 동안 국가로부터 빌려 쓸 뿐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아직까지는 임대기간이 만료되지 않아서 아무도 모릅니다. 기간을 연장해줄 수도 있고, 거액의 임차료를 다시 내야 할 수도 있죠. 그래서 우리 중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풍요로운 광둥성이지만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불안함이 읽혔다.
가이드는 큐큐(QQ) 펭귄 마스코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국에서는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겐 그와 비슷한 큐큐, 웨이보, 유큐 등이 있죠.”
“왜 중국에서는 페이스북을 쓸 수 없나요?”
“좋은 질문이지만 저는 답변할 수가 없군요. 중국에서는 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뉴스도 정부로부터 내보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후에 보도할 수 있습니다.”
선전과 홍콩은 지하철로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맞붙어 있다. 오늘날 선전의 외양은 홍콩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중후장대한 건축물이 중국의 부유함을 뽐내며, 중국에서 평균연령이 가장 낮은 도시답게 거리에는 젊고 화사한 여성이 많다. 그러나 허용되는 언론 자유의 폭이 매우 다르다. 경계 하나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포산시 황비홍 생가의 사자춤 공연(왼쪽)과 광둥성 서민들의 일상 풍경.
시간은 돈, 효율은 생명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광둥성 선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바쁜 도시 선전에서 느긋한 도시 청두로 오자 여유로워 좋다며 “마음이 너무 편해!”를 연발했다. “선전은 엄청 바빠. 빨리빨리,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
‘시간은 돈이요, 효율은 생명’이라고 강조하는 선전은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다. 중국 정부가 1978년 외국 기자들을 경제특구 선전에 초대했을 때 기자들의 눈에는 진흙뻘 위의 17가구만 보였다. 그러나 개혁개방 30여 년 만에 선전은 인구가 1000만이 넘는 대도시로 거듭났다. 거리는 깔끔하고 젊은이가 넘쳐나며 여자들은 세련됐다. 1982년 국제무역센터 빌딩을 지을 때 사흘에 한 층씩 올리더니, 1990년대 지왕(地王)빌딩을 세울 때는 9일에 4층씩 올렸다. 그 결과 ‘선전속도(深?速度)’라는 말이 생겼다.
짧은 시간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선전의 모습. 선전박물관 자료사진.
오바마가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미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지 묻자 잡스는 “이제 그런 일자리는 미국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중국 노동력은 싸다. 그리고 가혹한 노동 강도와 속도를 기꺼이 감내한다.
2007년 아이폰 출시 한 달 전, 화면 내구성 결함을 발견한 잡스는 6주 안에 흠집이 나지 않는 유리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기존 협력업체는 잡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선전의 회사는 인력과 실험 재료를 24시간 내내 거의 공짜로 제공했다. 이 회사는 유리 개발을 마치자마자 아이폰 제조사 폭스콘에 보냈다(폭스콘도 광둥성 기업이다). 그때가 자정 무렵이었지만 폭스콘은 직원 8000여 명을 작업에 바로 투입해 96시간 만에 4만 대의 아이폰을 생산해냈다. ‘선전속도’가 없었다면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 더 늦어졌을 것이다.
선전속도는 분명 고속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대신 사람들은 극도로 피곤하고 바빠졌다. 삶은 팍팍해졌고, 과도한 노동강도가 생명을 위협할 지경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폭스콘이다. 이 회사에선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노동자 24명이 자살을 시도해 19명이 사망했다. 2010년 한 해에만 14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춘남녀였다. 그럼에도 폭스콘의 CEO 테리 고우는 당당하다. 폭스콘의 처우가 다른 기업보다 더 낫다는 이유에서다.
빈말은 아니다. 광둥성의 주강삼각주 지역은 제일 먼저 문호를 개방한 까닭에 의류, 신발, 장난감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융성해 임금과 복지 수준이 낮다. 상하이, 장쑤(江蘇)성, 저장(浙江)성 등 장강삼각주 지역은 광둥성보다 늦게 개발된 대신 후발주자의 이익을 얻었다. 기술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뤄 임금과 복지 수준이 광둥성보다 높다. 노동자들이 어디로 몰려갈지는 자명하다. 광둥성은 2004년부터 농민공이 부족해져 현재 일자리에 비해 노동력이 30% 가까이 부족한 형편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노동자 권리의식은 높아지고 있지만, 광둥성의 노동 여건은 여전히 열악하다. 노사 갈등이 첨예하고 파업도 자주 벌어진다. NGO 중국노공통신(中國勞工通信)에 따르면, 2011~2014년 중국에서 발생한 노동쟁의 2601건 중 광둥성에서 발생한 건수가 30%에 가까운 752건으로 압도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둥인들의 집요한 이익 추구는 황당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가 전자쓰레기 밀수다. 폐기되는 전자제품에선 많은 유해물질이 발생하는데, 광둥인들은 이를 기꺼이 사들인다. 산터우(汕頭)시 구이위(貴嶼)진은 세계 최대의 전자쓰레기장이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5000만t의 전자쓰레기가 발생하는데, 그중 70%가 이곳으로 모인다. 후유증은 막심하다. 구이위 일대의 암과 백혈병 발병률은 다른 지역 평균의 5배가 넘는다. 혈액이 굳는 혈전증 발생률은 산터우 시내에 비해 두 배나 높다.
가장 먼저 깨어났지만…
이에 비하면 ‘섹스도시’라는 광둥성 둥관(東莞)은 차라리 애교로 보인다. 둥관의 성매매업 시장은 종사자 30만 명, 500억 위안(8조8000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둥관은 한때 ‘둥관에 차가 막히면 전 세계에 부품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제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나 임금과 토지 비용이 상승하면서 공장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바로 성매매업이다. 가장 먼저 자본주의 성과를 맛본 동시에 가장 먼저 그 폐해를 입고 있는 것이 개혁개방의 선두주자 광둥성의 현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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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쇄국시기 중국의 유일한 무역항. 광둥성은 가장 먼저 열리고 가장 먼저 깨어난 땅이다. 예부터 광둥인들은 고난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다른 세상을 꿈꿨고,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다. 변화의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고통을 겪었다. 광둥인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풀과 같다. 중국의 내일을 한발 앞서 말해온 광둥인들이 급속한 발전의 후유증을 앓는 중국의 숙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