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업계가 심상치 않다. 실적 하락으로 잇따른 적자 사태를 맞은 것으로도 모자라 신용등급까지 줄줄이 강등됐다. 국제신용평가사 S&P는 지난해 3월 GS칼텍스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 바로 윗단계인 BBB-로 하향 조정한 것에 이어 12월에는 등급전망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무디스도 SK이노베이션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 직전까지 강등했다. 유가 하락만이 문제가 아니다. 급변하는 세계 석유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미 몰락은 시작됐다.
정유업계뿐 아니라 석유화학 부문 역시 사상 최대의 불황을 맞이했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매출은 65조9000억 원. 그러나 주력사업인 정유 부문에서 9조919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실질적으로는 2241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3년 만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시가총액 23조6000억 원(2011년 4월 25일 기준)으로 KOSPI 상장사 중 8위를 기록하던 기업 가치는 4분의 1 토막이 났다. 지난해 말 기준 SK이노베이션의 시가총액은 8조3000억 원(2014년 12월 26일 기준)으로, 기업 순위 역시 31위로 급락했다.
비단 SK이노베이션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쓰오일 역시 지난해 2589억 원 적자를 기록하며 1980년 사업 시작 이래 최초의 영업적자 사태를 맞았다. GS칼텍스도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두 번째 적자가 예상되고, 국내 정유사 모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지난해 초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인건비가 전체 비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정유업계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는 것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떠밀렸다는 방증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들은 “더는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처음으로 사원 공채 선발을 중단했다.
최근의 유가 급락은 미국과 중동 산유국 간의 에너지 패권 다툼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미국이 자체 정유한 셰일(shale)오일 생산량을 늘리면서 원유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을 시도하자 위협을 느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공급과잉과 유가 하락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OPEC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의 치킨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저유가 시대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산유국들의 재정 압박 심화와 셰일오일의 공급 둔화로 올 하반기부터는 국제 유가가 완만한 상승세로 전환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글로벌 원유시장의 전반적인 공급과잉 이 해소되지 않는 한 유가가 반등세를 타기란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셰일가스와 같은 비전통 자원의 생산 원가 하락, 선진국의 수요 감소, 중국의 수요 증가세 둔화 등으로 원유공급의 과잉이 지속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글로벌 원유시장의 가격 하락은 국내 정유업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지리적 입지상 국내 정유사가 원유를 도입해서 생산, 판매하기까지 35~40일이 소요되는데 최근의 유가 하락 사태로 재고평가 손실은 물론 매출과 매입의 시차에서 오는 정제 마진 하락으로 인한 손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유 4사는 지난해 4분기에만 1조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두바이유를 주원료로 사용하는 아시아 지역 정유사들은 두바이유가 주로 거래되는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을 수익성 지표로 삼는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배럴당 10.29달러로 정점을 찍은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2013년 10월 3.49달러까지 떨어졌다가 지난해 4∼6달러로 반등했다. 1월 현재 6.36달러를 나타내지만 이는 정유사가 마진 6.36달러에서 기본 운영비 등으로 지출되는 5달러를 빼면 겨우 1배럴에 1.36달러만을 수익으로 남겼다는 의미다.
일부에서는 저유가가 소비자의 구매력을 상승시키고 기업의 원료비 절감 효과를 가져와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될 것이라 예측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반대였다. 정유 업계의 내수 매출은 유가급락 이후에도 여전히 답보상태다.
공급-수입 균형 무너져
국제 유가 하락으로 국내 주유소들 간 가격 인하 경쟁이 뜨겁다.
유가 급락세가 멈춰도 정유업계 위기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정유업계가 맞은 구조적 위기는 2012년 아시아의 역내 석유수급 균형이 무너지면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제유가는 산유국의 생산량 조정과 저유가에 따른 수요 증가 등으로 점진적으로 안정 추세를 보일 것”이라면서도 “중국과 중동 등 지금까지 국내 정유사들의 주요 수출시장이던 아시아 국가들의 자급률이 급등함에 따라 글로벌 수요 부진 등 구조적 한계에 부닥쳤다.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계속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영국 석유회사 BP의 세계 에너지 통계에 따르면 아태 지역의 석유 소비는 2009년 하루 평균 2624만 배럴에서 2013년 3047만 배럴로 1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석유 소비가 30%가량 증가한 덕분이다.
그러나 같은 기간 아시아 역내 정제설비 규모 또한 하루 2768만 배럴에서 3128만 배럴로 13% 증가했다. 중국의 정제설비 규모는 하루 947만 배럴에서 1259만 배럴로 33% 늘어났다.
아시아 지역의 석유 소비 증가세는 차츰 둔화되지만 중국의 석유정제설비 는 무서운 속도로 증설된다. 중국의 석유 수요 증가 속도는 이미 3% 내외(30만 배럴 수준)로 둔화돼 2013년 한 해에는 38만 배럴이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그해 중국에서 증설된 정제설비는 그 2배 수준인 66만 배럴을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정유시설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중국은 2017년까지 매년 50만~60만 배럴 규모의 설비 증설을 추가로 예상한다. 정유 자급률이 100%에 육박하면서 정유 수입국이던 중국은 지난해부터 석유제품 순수출 국가로 처지가 바뀌었다. 사정은 인도도 마찬가지다. 최근 정유설비 증설에 박차를 가하는 인도의 정유 자급률은 90%에 육박한다.
원유 생산국인 중동마저 위기를 가속화한다. 국내 정제설비 규모와 맞먹는 283만 배럴의 설비가 중동 현지에서 가동을 눈앞에 뒀기 때문이다. 중동의 정유 자급률도 이미 89~90%에 달한다. 정유 시설이 없어 원유를 생산하고서도 정유를 수입해야 했던 과거와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재편되는 글로벌 정유 시장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석유시장은 4강 체제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셰일 붐으로 최고의 정제 마진 효율을 누리는 미국과 세계 최대의 석유시장을 가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또한 막대한 오일 머니를 기반으로 기존 원유 수출에서 석유제품 수출로 석유자원을 고부가화하려는 중동 국가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로부터 짧은 기간에 원유를 공급받아 내수는 물론 아프리카, 유럽, 동남아 등지로 수출할 수 있는 인도의 위력도 여전할 것이다.
아시아 신흥 정유국들은 내수시장의 공급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등 얼마 남지 않은 동남아시아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이 가진 대규모 설비와 기술, 유리한 입지 조건 등은 낙후된 시설과 불리한 입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국내 정유사들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미 국내 정유사들은 수출 판로의 급격한 축소로 과거 유럽과 호주 정유사들이 걸었던 몰락의 과정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유가 급락 직전인 지난해 3분기, 두바이 유가가 평균 104.03달러 수준이었을 때도 정유업계의 석유사업은 이미 적자를 기록하며 내림세로 돌아섰다. 현재의 상황이 유가 급락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작년 중반에는 정제 마진의 급격한 추락으로 이미 공급 과잉으로 넘쳐난 정유가 아시아 역내에 쏟아져 나와 국내 정유업계는 마진율을 포기하고 국제 석유 거래 시장에 정유를 덤핑으로 넘기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신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한국 정유업계가 상대적으로 값비싼 원유 수송 비용까지 부담하면서 원가경쟁력을 갖추기란 불가능하다.
업계에서는 이미 2년 전 원유를 정제설비에 넣는 순간부터 마이너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익성이 악화일로를 걷는다며 불안에 떤다. 정제 마진 개선이라는 국내 정유산업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실질적인 실적 개선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고유가 정책으로 정유업계 부담 가중
국내 정유 시장 재편도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상황이다. 더 이상 수출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4개의 국내 정유사가 좁은 내수 시장만을 바라보고 생존 경쟁을 계속하기 힘들 것이란 판단에서다. 어느 쪽이 먼저 무너지느냐만 남았다는 것이다.
정유업계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는 것은 결국 정부다. 2011년 유가 상승으로 정유업계는 공정거래위원회 담합조사만 2~3차례 받았다. 심지어 공정위에서 유가 담합 자진신고를 한 기업에 대해 자진신고자 감면제(리니언시) 혜택을 주겠다고 하자 가장 많은 과징금을 부과받은 GS칼텍스는 홀로 담합 신고를 해 과징금까지 면제받았다.
그런데 최근 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 SK이노베이션 등 나머지 3사가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명령 취소 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으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실적 하락에 허덕이던 정유사들에 과징금 환급은 가뭄의 단비같이 반갑지만 정부는 물론 ‘나 홀로 담합’의 아이러니에 빠진 GS칼텍스도 몹시 난처해진 상황이다.
정부가 난처해진 이유는 또 있다. 알뜰주유소, 전자상거래, 혼합판매 허용 등 정유사들의 폭리를 막겠다며 내놓은 고유가 시대의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는커녕 정유사들의 발목만 잡는 천덕꾸러기가 됐기 때문이다. 2011년 지식경제부는 정유사들의 회계장부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겠다며 감사에 착수했으나 결과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알뜰주유소와 전자상거래 등의 정책은 정부가 난처한 상황을 타개하려 내놓은 그 나름의 묘수였다.
하지만 알뜰주유소의 경우 세금 감면을 비롯한 각종 특혜에도, 소비자 가격인하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한다는 평가다. 게다가 그 혜택이 알뜰주유소 운영자에게만 돌아가는 실정이다. 전자상거래 세금 지원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경유, 휘발유 등 대한민국의 수출품목 1~2위를 다투는 제품을 제쳐두고 운송이용 부담금 등이 추가돼 국내 경유보다도 가격이 높은 일본의 경유를 수입해 쓰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정 경쟁을 통해 합리적 시장가격을 형성하겠다는 본래의 취지는 간 데 없고 정부가 일본 아베 정권의 경제정책을 지원하는 형국이다.
우리나라는 수입 원유에 3%의 관세를 부과한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산유국 중 원유에 관세를 붙이는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과거 원유에서 추출한 납사(나프타)를 화학제품 생산 기업에 납품하는 조건으로 정유사들의 관세를 일정 기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지만 지난해부터는 그 조건마저 폐지된 상황이다. 한 푼이 아쉬운 국내 정유사들이 볼멘소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입 납사에는 관세가 면제되기 때문이다.
넥슬렌 울산 공장. 넥슬렌은 국내 기업 최초로 촉매·공정·제품 생산 등 전 과정을 100% 독자기술로 개발한 고성능 폴리에틸렌 브랜드다.
지금과 같은 역차별적 상황이 계속될 경우 한국의 정유산업 역시 유럽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시설이 노후해 경쟁력을 잃은 유럽 정유사들은 줄줄이 폐쇄 수순을 밟으며 몰락을 선언했다. 수송비를 제하고도 미국산 값싼 디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때 유럽에 디젤을 수출하는 것으로 재미를 본 국내 정유사들 역시 미국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국내 정유업계 일각에서는 정부가 지금이라도 실책을 인정하고 정부 주도의 석유산업 합리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글로벌 정유 시장의 변화에 정부가 나서서 내수 시장을 정비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더 이상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가 주도해 경쟁력 없는 시설을 폐쇄하고 내수 시장을 탄탄하게 운영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정유산업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우리 정부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