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매량 급감 이어 영상매체 종속
- TV의 부록 혹은 파생상품으로 전락
- 독자가 ‘매개물’ 없이 책 만나야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5위 안에도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꾸뻬씨의 행복여행’‘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두근두근 내 인생’ 등 6종의 미디어셀러가 포함돼 있다. 지난해 말 드라마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만화 ‘미생’은 누적 판매부수 200만 부를 돌파했다. 역시 미디어셀러 약진의 대표사례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젠 완연히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미디어 효과가 일시적 판매 신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0주 이상 이어진다. 책의 영상 및 인터넷 종속 현상이 가시화한 셈이다.
‘오발탄’에서 ‘국제시장’으로
미디어셀러가 베스트셀러가 된 사연은 제각각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나 ‘미생’은 원작을 영상화한 뒤에 비로소 원작이 뜬 경우다. ‘창문 넘어…’는 2013년 출간 직후 잠시 반짝하다 곧 집계 순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2014년 영화의 개봉과 함께 되살아나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정상을 차지했다. ‘미생’은 웹툰(인터넷 웹에 게재되는 만화)으로 시작했다. 이어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가 뜨자 만화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미 비포 유’는 출간되고는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TV 책을 보다’에 소개된 후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미국에서도 TV ‘오프라 윈프리 쇼’에 소개된 책이 종종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우리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다 죽어가던 책들의 운명을 반전시킨 이러한 사례들은 영상 미디어의 강력함, 그리고 책의 미약함을 입증한다.
최근엔 간접광고 방식인 PPL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10년 전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모모’라는 책이 등장했다. 이 책은 그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스테디셀러가 되어 2010년 밀리언셀러에까지 등극했다. 2010년 TV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이 소개된 뒤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지난해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선 ‘에드워드 툴레인의 이상한 여행’이 화면에 비쳤다.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출판업계 인사는 “출판계로선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웃픈’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출판업계 인사는 “영상 미디어의 발달과 인터넷·스마트폰의 일상화로 세계적으로 책의 판매량이 줄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판매량 감소세가 너무 가파르다. 급기야 영상매체에 종속되는 ‘책의 굴욕’을 맞고 있다”고 했다.
미디어셀러는 출판가에 양날의 검이다. 지난해 영화 ‘인터스텔라’가 국내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러자 ‘코스모스’ 같은 우주과학서 판매가 늘었다. 이는 영상 미디어와 책의 선순환 사례다. 그러나 대부분의 PPL은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출판사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출판인들이 무엇보다 걱정하는 것은 활자 텍스트와 영상 텍스트의 헤게모니가 역전됐다는 점이다.
TV가 보급되기 전, 한국 영화의 전성기엔 문학작품을 영상화한 이른바 문예영화가 유행했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소설가 이범선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런 전통은 TV시대에도 이어졌다. 1980년대 KBS의 ‘TV문학관’이 대표적 사례다. 이 시기 콘텐츠의 핵심은 단연 종이책이었다. 영상물은 책의 파생상품이었을 뿐이다.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책이라는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관계가 완전히 역전돼 영상으로 성공한 콘텐츠가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변호인’ ‘명량’ ‘국제시장’처럼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나 ‘응답하라 1994’와 같은 인기 드라마가 속속 소설로 재탄생한다.
한국문학의 위기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2014년은 ‘소설의 해’라고 불린다.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0위권 내에 소설이 6권이나 포진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소설은 조정래의 ‘정글만리’가 유일하게 턱걸이했을 뿐이다. 소설 분야 통계에서도 상위 15위권 내에 한국 소설은 ‘정글만리’에 김진명의 ‘싸드’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추가된 게 전부다. 한국 작가가 쓴 문학 책은 안 팔리고, 안 팔리니 창작열이 식기 마련이고, 그러니 더 안 팔리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2004년 일본의 지한파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에 관한 논쟁이 촉발됐다. 일부 문학인들은 한국에서 일본 소설이 득세하고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는 점을 들어 한국이 근대문학의 정점에 도달한 적도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곧장 영상과의 융합이 시도되는 것은 근대가 여물기도 전에 이를 허물고 탈근대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책과 담 쌓은 젊은 세대
그렇다고 탈근대 시도에서 앞서가는 것도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 일본 소설이 인기를 끄는 한가운데에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추리작가가 있다. 한국은 1970~80년대 김성종이라는 걸출한 추리작가의 등장 이후 거의 대가 끊기다시피 했다. 리얼리즘과 순수문학만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자유로운 장르문학이 뿌리내릴 수 없었다. 한국문학은 지금 실리도 명분도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5년 콘텐츠산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출판시장은 2010년을 정점으로 매출액 규모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반면 2014년 상반기 발행 종수는 전년도 동기 대비 3.1% 늘었다. 요컨대 다양성은 더해졌지만 독자 이탈은 심화하는 형국이다. 여기에다 TV나 영화를 보고 책을 고르는 현상이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셀러의 득세에 대해 일부 평론가는 “정보과잉 시대가 초래한 선택장애 상황에서 영상 미디어가 결정권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영상 미디어가 출판 콘텐츠의 수요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향후 출판시장의 다양성은 보장되기 힘들 것이다.
지난해 도서 구매 고객 통계도 주목할 만하다. 인터넷 서점 YES24의 통계에 따르면 30대 중 책을 구매한 사람의 비율은 2013년 36.1%에서 2014년 33%로 하락했다. 반면 40대는 35.7%에서 39.7%로 증가해 최대 구매층을 차지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책과 단절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통계에서 20대는 2013년 16.3%에서 2014년 14.5%로 줄었다. 30, 40대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목받지 않지만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기록하는 책은 토익과 같은 영어 수험 서적이다. 이미 대학 도서관 열람실은 교양서적도 전공서적도 아닌 영어 수험 서적이 차지한 지 오래다. 초중고교생은 물론 대학생도 책과 담을 쌓고 지내는 셈이다.
미디어셀러 현상의 가장 큰 문제는 ‘젊은 세대는 책을 거의 읽지 않고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능력조차 잃어가고 있으며, TV에 나온 책만 마지못해 읽는다’는 점이다. 이젠 독자로서 직접 책과 만나지 않는다. 시청자에서 독자로 간혹 유입될 뿐이다. 그것도 1년이나 2년에 한 번 정도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감정수업’, ‘정의란 무엇인가’.
사정이 이러니 출판 기획자 처지에선 영상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인물을 저자로 섭외하는 것이 베스트셀러의 지름길이라고 여길 수 있다. 실제로 연예인이 출판계의 인기 저자로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높은 인지도 덕에 팬 사인회만 몇 차례 열어도 기본 판매부수는 충분히 채운다고 한다.
이적, 타블로, 차인표, 구혜선 등은 소설을 펴냈다. 소설은 아마추어의 진입장벽이 높은 장르다. 콘텐츠에 대한 호불호도 뚜렷하게 갈린다. 신인이 펴낸 소설이 베스트셀러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이제 연예인들은 쉽게 소설을 쓴다.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인지도가 판매량을 좌우하는 쪽으로 풍토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연예인은 비소설 분야엔 더 쉽게 접근한다. 최근에는 부업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출간하는 경우도 있다. 이혜영, 전혜빈, 유진은 패션·미용 관련 책을 냈다. 조혜련, 김영철은 어학 관련 책을 냈다. 양희은, 이현우, 알렉스는 요리책을 냈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자기계발서 분야다. 자기계발서는 강연 시장과 긴밀히 연동돼 있다. 미국은 수사학이 발달한 서구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래전부터 강연 시장이 활성화했다. 한국에선 강연 시장이 커진 게 불과 수년 전이다. 진보진영이 ‘○○콘서트’ 형식의 강연회를 연 것이 일반 대중의 참석을 활성화했다고 한다.
강사들의 ‘몸값’을 보면 시장이 왜곡돼도 한참 왜곡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강사는 주로 개그맨이다. 이들은 저서도 내면서 대중을 ‘힐링’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이들의 몸값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같은 석학의 2배 이상이라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단지 강연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개그맨을 능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만담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국 미디어셀러와 마찬가지 구조다. 콘텐츠가 좋아서 잘 팔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영상 미디어로 뜬 유명 인사라 잘 팔리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 금언은 아마 지금의 한국 출판시장에서도 통용되는 진리일지 모른다.
100만 부의 이면
출판업계가 ‘단군 이래 최대 불황’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출판인들은 줄곧 양적 빈곤을 한탄해왔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질적으로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드는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몇 년간의 베스트셀러를 분석해보면, 책 내용의 질적 수준보다는 저자의 명성이나 유명세가 책의 판매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2010년 출간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인문서적으로는 드물게 100만 부 이상 팔렸다. ‘인문학의 위기’ 시대에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책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10배 이상 나갔다. 가장 열렬하게 반응한 사람은 30대 남성들이었다.
이 책은 미국 하버드대의 학부 교양과목 강의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대학에선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콘텐츠의 탁월함 때문인가, 아니면 젊은 시절 교양 쌓기를 등한시한 이들의 뒤늦은 분발 덕일까. 이 책은 갓 성년이 된 젊은이를 위한 윤리 개론서 수준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혹세무민 힐링?
TV 예능 프로그램의 파워는 인문학 분야에서도 입증됐다. 지난해 2월 SBS ‘힐링캠프’에 철학자 강신주가 출연했다. 이는 정치인의 출연과는 다른 방식으로 출판계에 충격을 줬다. 힐링캠프 출연 이후 그의 책 ‘감정수업’은 판매량이 급증했다. 지난해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5위에 오르며 인문학 분야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지난해 출간된 ‘도쿄대학 불교학과’라는 책은 일본 유학 중인 저자가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공부하며 겪은 도쿄대의 엄격한 학풍을 전한다. 글자 하나 함부로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 이해하기 전까지 결코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강신주의 저서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대학…’은 대승불교 경전인 ‘중론’의 한 구절을 언급하면서 강신주의 책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대한 이해 없이 잘못된 2차 해석본을 그대로 인용했을 가능성을 거론했다.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대중지식인을 자처하는 것이 문제 될 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의 올바름이다. 그것이 선결되지 않은 소통은 사회적 미신을 양산할 뿐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휩쓴 힐링 열풍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으로 대중을 혹세무민한 일부 인사들에게도 유명세를 안겼다. 대중은 그런 유명세를 높은 지적 수준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숭배하기에 바빴다. 영상 미디어가 이런 악순환을 부추겼다.
좋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정석이다. 그러려면 저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 독자는 좋은 책을 골라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독자가 중간의 매개물 없이 책을 직접 만나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책은 안 팔린다. 별것도 아닌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TV가 중간에서 독자의 선택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TV는 때로는 책 자체를 띄우고 때로는 저자를 띄운다. TV에 떠야 팔리는 미디어셀러의 시대가 됐다. 한국의 지식산업은 본격적으로 황폐화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