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은 제사장…大 위해 小 희생해야 감동
- 民心 즉각 반영해 ‘살아 있는 정치’ 펼쳐야
- 국민은 맹수, 틈 보이면 조련사 공격
- ‘통일대박’은 天元의 한 수…700만 베이비부머 활용하자
- 주일대사직 항의하자 MB 왈 “나를 의심하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한일관계, 추락하는 대통령 지지율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고자 기대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마침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출간된 터. 책 내용에 대해 물었을 때도 “출간 전에 원고 내용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이 없었다”며 피해 갔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도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나 모임 이후에도 거듭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다. “도시빈민운동을 벌였고, 외교 현안에 밝은 분이 지금 침묵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질의서를 먼저 보내보라”며 한발 물러섰다.
권 전 대사는 여당 출신으론 드물게 1970년대 초반 고(故) 제정구 의원, 김진홍 목사 등과 서울에서 도시빈민운동을 벌였고, 동아대 교수 재직 시절에도 흥사단, YMCA 등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한 인물이다. 부산 사상구에서 15~17대 내리 당선해 3선(選)의원이 됐고, 국회교육위원장, 한나라당 대변인, 이회창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이름을 날렸다. 이후 주일대사와 세종재단이사장을 지냈고,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후임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2월 12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골든타임’ 놓쳐 성과 한계”
▼ 근황은.
“강연하고, 등산하고. (실)업자도 바쁘게 지낸다(웃음).”
▼ 국정운영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몇 차례 말했지만 정책에 반영이 안 되더라.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결혼한 대통령’이다. 나도 선대위원장으로 열성적으로 앞장섰고, 국민의 기대도 그만큼 컸다.”
▼ 지금 시점에선 어떻게 평가하나.
“지난 2년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통일대박론’이다. 통일 이슈를 단번에 국정 중심으로 끌어왔다.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했고, 주변 4강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통일 논의가 무성해졌고, 통일 준비도 탄력을 받고 있다. 방향을 정확히 잡았다. 바둑으로 말하면 가장 중앙점, 천원(天元)에 한 수를 둔 것이다.”
▼ 기대감은 컸지만, 국정 수행 지지율은 30% 아래로 떨어졌다.
“국정 동력을 하나로 모아 성과를 창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경제와 일자리 창출 문제가 심각했고 세월호 참사 영향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국민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 50~60대 지지자들이 돌아서고 있다. 일대 전환이 필요한 상황이다.”
▼ 왜 민심이 돌아섰다고 보나.
“‘골든타임’을 살리지 못하고 지난 2년을 보냈기 때문 아닌가. ‘통일대박’으로 통일에 대한 열망과 불씨를 되살렸지만, 살기 팍팍한 국민의 손에 무엇을 쥐여줬는지는 돌이켜봐야 한다. 국민은 손에 쥐여주는 결과, 성과를 보고 지도자를 평가한다. 그런데 지난 2년간 인사는 구성과 운용 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지도자의 비전을 구현하는 인적 체제가 구축되지 못했고, 효율적으로 가동시키지도 못했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 결국 인사 문제라는 건가.
“총리 인사는 거듭 실패했고, 국정 운영에서도 ‘대통령만 보인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지 않나. 머리와 몸, 팔다리가 따로 움직인다. 유능한 인적 체제를 갖추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해 구체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개선 기미도 없어 보이니 국민이 화가 난 거다. 인사 실패가 확인되면 즉각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결단과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가 지지도 하락으로 나타났다. 생각해보라.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한 총리가 해를 넘겨 일하면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하겠나. 지도자의 말과 행위를 믿을 수 있겠나. 국민은 맹수와 같다. 조련사가 평소 잘하다가도 틈을 보이면 무섭게 공격한다.”
2008년 5월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일시 귀국한 권철현 당시 주일대사.
▼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권 내에서도 나온다.
“거듭된 실패에도 친박(친박근혜) 일부가 대통령을 감싸고도는 한 국민은 등을 돌린다. 그런데도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인사를 맡긴다. 공과 사가 엄정함을 잃고 친소(親疎) 관계에 좌우될 때 기강이 설 자리는 없다. 그 연장선에서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과 권력의 사유화, 암투, 측근 일탈행위가 일어나는 거다. 인사가 바로 서지 않는데 정책인들 온전하겠나. 대통령은 이런 징조를 바로 읽고 깨달아야 한다. 때를 놓치면 반드시 ‘비용청구서’가 날아든다. 이는 역사의 교훈이다. 나라 전체에서 인재를 구하고, 과감하게 일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감동하고 대통령과 국민이 하나 되어 ‘위기의 강’을 건널 수 있다.”
잠시 천장을 응시하던 권 전 대사는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오는 한고조 유방(劉邦)과 한신(韓信)에 관한 고사를 꺼냈다.
유방이 “과인과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군대의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한신은 “폐하께선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는 장수에 불과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유방이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한신은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라고 했다. 유방이 다시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됐는가”라고 묻자 한신은 이렇게 답했다. “폐하께서는 병사를 거느리는 장수는 될 수 없으나 장수들의 우두머리는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입니다.” 권 전 대사가 얘기를 이어갔다.
“통치권자인 유방은 자기보다 유능한 장수를 선발해 ‘장수를 부리는 일’에 집중하고, 장수는 오로지 ‘병사를 지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유방이 직접 병사를 지휘하려들면 장수가 많은들 무슨 소용이며 어떻게 전쟁에 이길 수 있나.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萬機親覽)’ 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한다.”
▼ 박 대통령이 모든 정사를 챙긴다지만 소통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했다. 국민의 소리를 듣고 배우는 걸 부끄러워해선 안 된다. 정보화 사회에서 국민은 거의 실시간으로 세상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전문가들의 견해도 쉽게 접한다. 똑똑하고 현명하다. 지도자가 나라를 독단 경영하는 시대가 아니다. 따라서 국민의 요구를 정확히 수렴하고, 이를 즉각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는 ‘살아 있는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 지도자가 어려움에 봉착하면 ‘내 탓이로소이다’ 하는 정신과 자세로 자신을 살피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찾아 이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다.”
왕과 제사장 겸직
▼ 잘된 인사는 없나.
“세월호 참사 때 진도 팽목항에 가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격려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보니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현장에서 유가족들과 숙식하며 구조활동을 지휘하더라. 국민과 함께할 수 있는 인사를 다수 발탁해 자리를 맡기고, 일단 맡겼으면 그의 책임 아래 일을 추진하도록 전권을 주면 된다. 대통령은 결과에 대한 평가를 하고 신상필벌하면 되고.”
▼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으로 여권 내에서도 청와대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대통령은 옛날 왕과 제사장의 임무를 겸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행정수반이면서, 동시에 백성의 원망을 대신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다.”
▼ 갑자기 제사장은 왜….
“비가 오지 않거나 역병이 창궐하면, 왕은 목욕재계하고 희생을 바치며 제사를 지냈다. 이때 희생은 죄가 없고 순결한 대상을 택했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었다. 국가지도자에게도 죄 없는 ‘소’를 희생의 제물로 바쳐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온다. 이때 사(私)를 뒤로하는 것이 공(公)이고, 지도자의 숙명이다. 죄가 없더라도, 아끼고 사랑하는 측근을 제물로 바칠 수 있을 때, 하늘과 사람이 감동한다. 순도 높은 자기희생과 헌신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 ‘제사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비서실장은 어떠해야 하나.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편하게 모시려 하다가 대통령을 실패로 이끄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조언하고 설득하는 참모 노릇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더 멀리 보고, 더 높게 보고, 외부와도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아주 특별한 능력’도 있어야 한다.
누가 되든 친박 중심으로 인사를 해서는 또다시 실패다. 담을 두르면 담장 안이 내 집이지만, 담을 허물면 천하가 다 내 집이다. 널리 인재를 구하고 망설임 없이 천거해야 한다. 최고 인재들을 얼마나 발탁하느냐, 여기에 박 대통령 명운이 달렸다.”
▼ 권 전 대사도 차기 비서실장 후보로 거론됐는데.
“가끔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전화해 ‘언질’이 있느냐고 물어본 정도다. 특별한 기대 안 한다.”
독도 문제는 ‘비례 원칙’으로
▼ 이회창 전 총재의 비서실장을 할 때는 종종 쓴소리를 하지 않았나. 2007년 대선 때는 이 전 총재의 세 번째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단식도 했다. ‘쓴소리 비서실장’ 이미지와 국내외 현장 경험 때문에 이번에도 하마평에 올랐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가. 나도 잘 몰랐다. 이회창 후보 출마 반대 단식은 10년간 내준 정권을 보수가 가져와야 하는 상황이라 한 것이다. 2007년 8월 이 전 대통령이 보수 단일후보로 선출됐는데, 11월 이 전 총재가 출마 의사를 밝혀 보수세력이 혼란스러웠다. 분열하면 정권 교체가 어렵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일 이후 내가 이 전 총재와 사이가 나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지난 연말에도 우리 부부가 함께 인사를 드렸다.”
▼ 지난해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부터 개헌 논란, 복지 논쟁에 이르기까지 당청(黨靑) 관계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있었다. 여당은 대통령 지지율이 낮으면 선거를 앞두고 늘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당청은 공동운명체이고 부부 사이다. 부부는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다툴 수도 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상호 금도가 있다.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당청은 부부처럼 공동 책임의식을 가지고 함께 대처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해 코너에 몰리니까 함께 책임지자고 하면 되겠나. 얼마 전 김무성 대표가 만나자고 했는데 김기춘 비서실장이 거절했다는 기사가 났더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서실장은 국회와 정부 부처, 기업인, 언론인 등과 언제든 원활하게 소통해야 한다. 당청은 총선과 대선을 통해 함께 평가받고 책임을 진다.”
권 대사는 “책임과 권한을 청와대가 움켜쥐고 있을 게 아니라, 행정부로 과감히 이양해야 한다”며 “일본대사를 지내면서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맞다는 걸 확인했다”고 부연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일관계로 흘렀다.
▼ 올해는 광복 70주년, 한일협정 50주년인 해인데 일본 시마네현은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대대적으로 연다고 한다. 일본의 우경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국제법상으로도 우리 영토다. 이게 ‘팩트’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언론은 ‘실효적 지배’라고 한다. ‘실효(實效)’라는 말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닌데 어쨌든 내가 점령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내가 이 문제를 누차 제기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쓴다. 이건 바꿔야 한다.
독도 문제는 일본이 문제를 하나씩 일으킬 때마다 비례해서 한 단계씩 독도에 대한 주권 강화 조치를 높여가면 된다. 그래서 일본이 새로운 문제 제기를 꺼리게 만들어야 한다. 국내 정치의 수단으로 삼아 야단을 떨 일이 아니다. 일본의 속셈은 독도 문제를 시끄럽게 해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는 거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인적 구성 등을 보면 일본에 유리하다. 말려들 이유가 없다.”
▼ ‘조용한 외교’가 아니라 ‘비례의 원칙’이다?
“그렇다. 2004년 일본은 외무성 홈페이지에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라고 공포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조용한 외교를 강조하다보니 대응이 미흡했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교과서 해설서 개정 등이 꼬리를 물었다.”
“대사는 마지막에 떠나야”
2007년 11월 권철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에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 시도에 대해 이제 미국에서도 공식 문제화하기 시작했다. 역풍을 만난 거다. 이제는 한·중·일 3국이 공동 역사연구와 공통의 역사교과서 편찬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걸 협의할 때가 됐다. 어려운 문제는 별도의 그릇을 만들어 거기에 담아 풀어가고, 협력이 가능한 것부터 해가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 안보를 생각해도 한일관계 악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일이 힘을 합쳐 동북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회복하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감정 문제가 아닌 생존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방문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회고록에서 “조용한 외교는 더 이상 의미 없다.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킬 행위가 필요했다”고 했는데, 이것도 생존 문제로 접근한 사례인가.
“참 답하기 곤란한 문제인데…. 내가 그때 주일대사를 마치고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때여서 독도 방문 사실은 사전에 몰랐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이어진 일왕 사죄 요구 발언으로 결과적으로 일본 내 반한(反韓) 현상이 심각해졌고, 지한파 인사들의 세(勢)는 축소됐다. 내가 MB의 독도 방문 계획을 알았더라면 부적절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회고록도 남기는 것은 좋은데, 애매모호한 것은 당사자 확인을 거치고, 현직에 있는 사람들은 언급 안 하는 게 좋다. 혹시나 잘못된 내용이 있더라도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나.”
▼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는 많은 우리 국민이 일본을 응원했다.
“당시 한국 국민의 성원은 일본인들도 잘 알고 감동받았다. 그런데 이후 교과서 해설서 문제와 우경화로 다시 관계가 나빠져 안타깝다.”
▼ 당시 대사관 직원들의 동요도 컸을 거 같은데.
“일본 전체가 큰 혼란에 빠졌고, 재일 외국인들은 탈출하기 바빴다. 우리 교민 사회와 대사관도 거의 패닉 상태였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각에 집사람이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 김포공항에 막 내리고 있었다. 급히 전화해서 ‘바로 돌아오라’고 했다.”
▼ 부인을 오라고 했다?
“생각해보라. 대사 부인이 재난지역을 떠나 있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본에 있던 며느리가 ‘아이는 방사능에 더 취약하다’며 두 살짜리 손녀와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하길래 못 가게 설득했다. ‘대사가 가족부터 피신시켰다’고 알려지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급박한 상황이 온다면 탈출 1순위는 교민과 학생들이고, 그다음이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이다. 대사와 대사 가족은 가장 마지막에 떠나야 한다. 대사관 직원 165명을 강당에 불러 이러한 내 생각을 전했다. 그러고 나서 원전사고 피해 지역인 센다이 총영사관에 물자를 공급하러 가는 등 직원들과 혼연일체가 돼 위기 수습에 나섰다.”
MB에게 “왜 일본에…” 항의
▼ 그래서 ‘간 큰 대사’라는 별명이 붙었나.
“따지고 보면 기본에 충실했던 건데 그런 내게 ‘간 큰 대사’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우연찮게 생긴 별명이지만 이제는 그 이름을 당당히 지켜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권 전 대사는 2011년 11월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 일본과의 300억 달러 스와프협정, 조선왕실의궤 등 일본이 약탈한 국보급 보물 1205책 환수 등 주일대사 시절의 일화를 담은 저서 ‘간 큰 대사, 당당한 외교’를 펴낸 바 있다.
3선 의원으로 잘나가던 그가 18대 총선 공천에서 배제된 뒤 느닷없이 일본대사가 된 연유가 궁금해졌다. 18대 총선 공천 당시 부산 사상구에서 그의 지지율은 50%를 넘었다. 지지율만 보면 압도적이었지만, 그는 장재원 후보에게 지역구를 내줬다. 권 전 대사는 지금까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도 정치인이니 국회의장, 대통령 꿈까지 다 꿔봤을 것 아닌가. 그런데 주일대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사명대사 원효대사 같은 대사(大師)는 알지만 대사(大使)는…. 참 황당했다.”
2013년 7월 22일 경기 파주시 적군묘지에서 권철현 전 주일대사(오른쪽)와 가수 설운도 씨(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 북·중군묘지평화포럼 회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따로 만났다. 이 대통령이 ‘(공천 배제했다고) 나를 (주도자로) 의심하느냐’고 하더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왜 날더러 일본에 가라고 하냐’며 항의했다. 나는 국회의원 4선 해서 더 큰 정치를 하려는 꿈도 있었다. 그런데 대사가 됐다. 그때 어느 지인이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봉투에 담아주며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하더라.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그는 즉석에서 굵은 목소리로 시를 암송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그래서일까. 주일대사를 마치고 귀국한 뒤 그는 다시 ‘꽃자리’를 맡았다. 외교안보통일 민간 싱크탱크인 세종재단 이사장이 됐다. 동시에 그는 ‘준비된 통일론자’가 됐다.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통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각 분야 최고전문가들로부터 통일 문제에 대해 배우고 토의하면서 북한 개발계획과 통일 전문인력 양성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 종합개발 10개년 계획
▼ 북한 개발계획이라면?
“나는 평소 ‘준비된 통일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준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통일이 곧 재앙이 될 수 있다. 먼저 ‘북한 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계획을 들고 주변국 4강을 만나 그들의 국익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설득하고, 북한 개발자금의 상당부분을 지원받아야 하다. 그리고 북한 당국과 주민들을 설득해 통일 협력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북한 개발의 주체로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 통일 인력 양성은 어떻게 하나.
“‘통일전문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 북한 개발에 필요한 모든 인력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에게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베이비부머 700만 명이라는 최고 정예인력이 있다. 이들은 새터민들과 함께 북한 개발에 필요한 주력 인적 자원이 될 수 있다.”
▼ 경기도 파주의 적군묘지를 재단장하자고 주장한 것도 통일 노력의 일환이었나(*권 전 대사는 2012년 9월 8일 동아일보에 ‘적군묘지에 서서 통일을 생각한다’는 칼럼을 실었다. 천도재에 참석해 느낀 감상을 적은 글에서 그는 “이제는 적군의 영혼을 위로할 때가 됐다”며 “적군묘지를 재단장해 북한·중국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자”고 썼다. 이 글의 영향력은 컸다. 묘지는 재단장됐고, 중공군 유해 송환이 이뤄졌다).
“과거에는 총을 맞대고 싸운 적군이지만, 이제는 ‘영혼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칼럼이 나간 뒤, 폐허처럼 버려졌던 적군묘지는 공원처럼 재단장됐다. 이후 박 대통령은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군 유해송환을 제의해 성사됐다. 이제는 북한군 유해 (769구)만 남아 있다. 나는 변함없이 적군묘지를 찾아 위로의 꽃을 드린다. 지금 바치는 꽃송이 하나가 머지않아 민족을 하나로 잇는 큰 강물로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 그런데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 건립위원장을 맡아 지난해 6월 추모비를 건립했다. 북한의 테러를 상기시키는 추모비와 북한군 묘지를 재단장하는 게 일견 모순되는 듯한데.
“추모비 건립은 북한 공작원 테러 이후 30년 만에 숙원을 이룬 거다. 미얀마 역사상 최초로 세워진 외국인 추모비다. 그들의 성소(聖所)인 아웅산 장군 묘역에 터를 얻어 추모비를 건립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웅산 장군의 딸인 수치 여사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뜻을 받아들였다. 국가가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했다. 추모비 건립과 파주 적군묘지, 언뜻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한 뿌리에서 출발한 거다. 운명은 소리 없이 통일 물결의 앞자리로 나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