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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은하선이 본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내 모습 그대로 사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은하선이 본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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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은하선, 섹스를 하고 글을 씁니다
    ● ‘청록이’가 달걀 받아 들었을 때 눈물이 쏟아졌어요
    ● ‘갑자기’ 사랑에 빠진 ‘그녀’와 6년째 연애 중
    ● 내 삶에 다가온 상처들, 그것을 통해 숨 쉴 것
[홍중식기자]

[홍중식기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셰이프 오브 워터)이 3월 초 열린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주인공이 됐다.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 등을 휩쓸며 올해 최고 화제작으로 떠오른 것이다. 신비한 능력을 가진 괴생물체와 인간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를 섹스칼럼니스트 은하선(30) 씨와 같이 관람했다. 

은씨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자기소개란에는 ‘섹스를 하고 글을 씁니다’라고 적혀 있다. ‘은하선’은 그런 사람이다. 2015년 여성의 욕망을 다룬 책 ‘이기적 섹스’를 펴냈고, 최근에는 여러 신문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양성애자다’ ‘섹스를 좋아한다’ ‘매일 자위를 한다’ 같은 말로 여러 번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자유로움, 솔직함, 거침없음 등을 대표 이미지로 가진, 이 시대의 젊은 논객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뒤부터 은씨가 앉은자리 쪽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약한 떨림과 조용한 훌쩍임. 그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괴생물체와 사람의 사랑 이야기

영화를 보며 많이 우시더군요. 

“오늘은 두 번째라 좀 덜한 거예요. 며칠 전 처음 봤을 때는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고요.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질 때까지 한참을 더 앉아 있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건가요. 



“아름다워서 그런 것 같아요. 중간중간 슬프고 가슴 아픈 대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다 아름다워요. 처음 영화를 보고는 얼마나 좋던지 만나는 사람들한테 매번 ‘셰이프 오브 워터’를 꼭 보라고 말하곤 했어요. 오늘 두 번째 본 느낌도 처음과 다르지 않네요. 앞으로 두 번은 더 볼 것 같아요(웃음).” 

은씨는 “음악,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참 좋다”며 아직 채 눈물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싱긋 웃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초반. 미국과 소련이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때다. 그 무렵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한 우주연구소에 인간을 닮은 괴생물체가 잡혀온다. 과학자들은 땅 위와 물속 양쪽에서 호흡할 수 있고 사람과 기본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 존재를 우주 탐사에 이용하려 한다. 반면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를 위시한 군 세력은 소련이 알아채기 전 ‘그것’을 해부해 관련 정보를 독점하고자 한다.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여성 ‘엘라이자’는 위기에 처한 생명체를 탈출시켜 원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는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엘라이자 곁에는 그와 함께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친구 ‘자일스’와 ‘젤다’가 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격인 괴생물체는 자신을 연구하고 길들이려는 사람들에 의해 온갖 수난을 당한다. 아마존 지역민들이 ‘신’으로까지 여겼다는 이 존재를 연구소 사람들은 ‘괴물’ ‘짐승’ 또는 ‘잡힌 지 일주일 지난 생선’ 따위로 부른다. 은하선의 호칭은 달랐다. 그는 온몸이 청록색 비늘로 덮여 있고 손과 발에 물갈퀴가 달린 이 양서류를 ‘청록이’라고 불렀다. 친근하고 귀여운 호칭을 통해 비참한 운명에 놓인 듯 보였던 한 존재가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는 게 느껴졌다. 

청록이라니, 정말 귀여운 이름이에요. 

“영화 시작 부분에 이런 내레이션이 나오죠. ‘이것은 사랑과 상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다.’ 저는 영화가 시작되고도 한참 동안 청록이가 바로 그 괴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 괴물은 어떤 고민이나 죄책감도 없이 엘라이자와 청록이의 세상을 파괴하려 한 백인 남성 스트릭랜드잖아요. 청록이를 그들이 사용하는 괴물이라는 단어로 지칭하고 싶지는 않아요.” 

영화 속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청록이를 괴물로 여기고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죠. 오직 한 명, 엘라이자만 그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요. 

“엘라이자도 처음엔 호기심 또는 연민을 갖고 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달걀을 나눠 먹고 음악을 같이 들으며 조금씩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거죠. 사실 제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게, 엘라이자가 청록이한테 달걀을 건네던 장면부터예요. 청록이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홀로 붙잡힌 뒤 이유 없이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긴 시간을 지냈잖아요. 큰 상처를 받고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됐을 때 불쑥 한 여성이 다가와 달걀을 건넨 거예요. ‘저 존재를 믿어도 될까’ 망설이다 재빨리 달걀을 잡아채고 수조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청록이의 모습을 보는데, 그 외로움과 슬픔이 온몸으로 느껴졌어요.”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연구소 야간 청소를 담당하는 엘라이자는 매일 밤 10시 45분 깨어나 출근을 준비한다. 알람시계를 끄고 일력을 한 장 뜯어낸 뒤 그가 늘 하는 일은 작은 냄비에 달걀을 삶는 것이다. 그 소박한 자기 몫의 식사를 청록이에게 건네면서 두 존재는 처음으로 얕게나마 감정 교류를 하게 된다. 영화는 이 대목을 동화처럼 아름답고 조금은 코믹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눈물이 나올 만큼 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장면이다.

[홍중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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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이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느껴진 때가 있었던 건가요.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친구를 두루두루 많이 사귀는 편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대학에 가서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제게 등 돌리는 경험을 했고, 그런 기억이 제 속 어딘가에 지금도 남아 있겠죠.” 


그렇게 영화 이야기는 은씨의 삶으로 이어졌다. 2008년의 일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오보에를 배운 은씨는 예중, 예고를 거쳐 그해 서울 한 대학 관현악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3월 초, 학과 선배들이 은씨와 동기들을 한자리에 부르더니 3시간에 걸쳐 기합을 줬다. 이유도 없었다. 체벌에 준하는 힘든 자세를 취할 것을 강요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고성과 욕설을 쏟아부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학장을 맡고 있는 교수가 또 학생들을 꾸짖었다. ‘신입생 학부모에게서 어제 일에 대한 항의 전화를 받았다. 누가 이런 일을 집에 가서 고자질하는 거냐’는 내용이었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 은씨는 의문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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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항의하셨나요.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 게시판에 글을 썼어요. 그걸 읽은 누군가가 제 글을 학교에 알렸고, 저는 입학과 동시에 아웃사이더가 됐죠.” 



부당한 폭력을 고발했다는 이유로요? 

“당시 제 글에 두 가지 내용이 있었어요. 좀 전에 말씀드린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두세 줄 정도,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에 올 때까지 악기를 배운 한 선생님한테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죠. 그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이 공공연하게 학생 몸을 더듬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말을 안 했어요. 제가 ‘너무 힘들다’고 고민을 털어놓은 또 다른 선생님은 저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지금 그 선생님한테 따지는 건 아예 음악을 그만두겠다는 얘기’라고 하셨고요. 왜 세상은 우리한테 입을 다물라고만 하는가, 제가 그 글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그거였어요.”

은하선의 #MeToo

2018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MeToo’ 운동을 은씨는 꼭 10년 전 혼자 시작했던 셈이다. 그 좁은 음악계에서 은씨가 누구를 지목하는지는 금세 알려졌고, 당시 은씨가 다니는 대학에 출강하던 ‘가해자’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러나 사건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해당 강사가 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은씨도 맞고소를 하면서 법정 공방이 시작됐다. 그때 은씨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뻔히 아는 사람 상당수가 강사 편에 서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은씨가 당시 사건에 대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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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에게 나랑 같이 배우던 학생들은 경찰 조사에서 ‘딸 같아서 만지신 걸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아 증언했다. 선생님이 만지는 거 정말 싫다며 매번 울면서 레슨실을 뛰쳐나오던 언니들도, 내가 카메라를 설치해야겠다며 욕하던 걸 본 동기들도 나를 위해 증언하지 않았다. 날 그나마 응원하던 사람들은 가해자가 내 몸 어딜 만졌는지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난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받은 알량한 응원에 기대어 12시간씩 대질심문을 했고, 학교를 다녔다. 나는 성상납을 한 주제에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꽃뱀이었다.” 


은씨에 따르면 사건 초기 ‘오픈된 공간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느냐’며 범행 자체를 부인하던 ‘가해자’는 이후 ‘(은하선이) 중학생 때까지는 만졌지만 고등학생이 된 후론 안 그랬다’고 입장을 바꿨고, 다른 학생들의 증언을 받아와서 ‘얘네는 만져도 성폭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는데 유독 쟤만 저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교수, 선배, 같이 음악하던 친구 등 수많은 사람이 은씨에게 ‘왜 내내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거냐’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냐’ ‘지금이라도 고소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 사건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비는 가해자’에 대한 고소를 은씨가 취하하면서 1심 도중 끝이 났다. 그때 이미 은씨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완전한 아웃사이더인 상태였다. 

왜 다들 ‘선생님’ 편에 섰을까요.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레슨 선생님은 정말 큰 존재거든요. 예중·예고를 거쳐 음대에 진학하기까지, 심지어는 졸업 후 오케스트라 등에 취업할 때도 누구한테 배웠는지가 계속 따라다녀요.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들이 ‘이윤택한테 찍히면 다시는 연극을 못 하게 될 것 같아 그동안 말하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음악계에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게다가 음악은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분야잖아요. 성폭력을 고발하면 그동안 쌓아온 것을 모두 잃게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요. 오죽하면 저의 ‘작은 선생님’(은씨는 그가 조언을 구한 레슨 교사를 가해자인 ‘큰 선생님’과 구분해 ‘작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이 겨우 중학생인 저한테 ‘너 지금까지 음악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니. 지금 그 얘기하고 다 포기할래’라고 했겠어요. 그 말씀이 어린 저한테는 정말 큰 위협이었어요. 엄마 아빠께조차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만큼요. 돌아보면 지금은 음악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해서 잘 먹고살고 있는데(웃음). 그때는 이런 인생도 있다는 걸 몰랐죠.” 

은씨는 싱긋 웃으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한 장면을 이야기했다. 엘라이자네 집 달력 뒷면에 ‘삶이란 부서진 계획의 잔해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던 부분이다. 엘라이자는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을 사용하는데, 각 종이 뒷면에는 생각해볼 만한 경구가 하나씩 적혀 있다. 그중 특히 이 글귀가 은씨의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삶이 정말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니까요.”

“굴하지 않다”

은씨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어린 시절 꿈꿨던 전문 음악인의 길은 걷지 않았다. 종종 직접 작사·작곡하고 가창까지 한 노래를 개인 홈페이지에 업로드하긴 하지만, 현재 그의 직업은 ‘연주자’가 아닌 ‘칼럼니스트’인 것이다. 

수조 안에 홀로 갇혀 있는 청록이를 보면서 과거의 상처들이 떠올랐나요. 

“글쎄요. 바로 그렇게 연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저는 청록이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게 혐오와 학대의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세상에는 자신과 다른 존재한테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도 제가 그들과 좀 다르다는 이유로 저를 이유없이 공격하는 사람들 때문에 혼란스럽고 힘들던 시간이 있었어요.” 

은씨는 자신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한 스무 살 때,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남자친구와 5년째 사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은씨를 보고 ‘중학생 때부터 원조교제를 해놓고 무슨 성폭력 타령이냐’고 비난했다. ‘레슨 강사한테 성상납을 했는데 원하는 대학에 못 가니 저러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엔 제가 있지도 않은 일을 얘기한다고 주장하다가 실제로 성추행이 있었다는 게 드러나니까 ‘착하고 순결한 애라면 모를까, 너 같은 애는 그걸 문제 삼을 자격이 없어’라는 식으로 몰고 간 거예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섹스를 한 것, 섹스를 좋아하는 건 다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게 잘못인가요? 성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대우받아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도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 입에는 어떤 음식이든 강제로 처넣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지요.” 

은씨는 인기 칼럼니스트답게 논리정연한 말솜씨를 갖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느낌을 얘기할 때는 “아, 정말 좋아요. 너무 너무 너무 좋아요”같이 감성적인 말투를 쓰곤 했지만, 자신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지적할 때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은씨에 따르면 스무 살 때도 그랬다. 그는 자신을 성추행한 ‘선생님’과 잘잘못을 가릴 때도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아픔을 토로하기보다는 또박또박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저렇게 말 잘하는 애가 그런 일을 잠자코 당했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잖아요. 순결하고 약하고 의지할 데 하나 없는 존재. 제가 그 기준에서 벗어나니까 저를 미워한 거예요. 그런데 바로 이게 저거든요. 사람들 눈에 들자고 제가 아닌 척하며 살 수는 없잖아요.” 

은씨가 ‘셰이프 오브 워터’의 청록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는 “청록이가 가혹한 매질과 전기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포자기하고 고분고분해지기는커녕, 빈틈을 노려 자신을 공격하는 스트릭랜드의 손가락을 물어뜯어버리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청록이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남으려 분투한다. 그리고 엘라이자는 청록이의 이런 본성조차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성급하게 그의 벽을 부수려 하지 않고 처음엔 달걀 한 개로, 그 뒤엔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면서 조금씩 청록이 곁으로 다가섰다.

함께 사랑하는 순간

자, 이제 은씨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장면들이 나온다. 엘라이자가 청록이를 ‘꼬시는’ 부분이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볼 때 엘라이자는 빛나는 사랑을 하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성은 ‘에스포지토(Esposito)’. 이탈리아어로 ‘고아’라는 뜻이다.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의 배경을 알아차리고, 그를 한없이 하찮고 불쌍한 존재로 간주해버린다. 부모도 알지 못한 채 고아원에서 자라난 이 중년 여성 목에는 심지어 무언가가 할퀴고 간 듯한 크고 울퉁불퉁한 흉터가 있다. 언어 장애 때문에 말도 못 한다. 외부에 드러나는 엘라이자의 특징은 이처럼 하나같이 안타까운 것들뿐이다. 

그러나 그 외피를 벗기면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엘라이자의 또 다른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엘라이자의 앞집에는 수화를 할 줄 아는 화가 친구 자일스가 산다. 회사에도 자신이 지각하지 않도록 늘 챙겨주는, 역시 수화를 할 줄 아는 친구 젤다가 있다. 아내와 섹스를 할 때조차 입을 막으며 ‘말하지 마라’고 하는 스트릭랜드보다 어쩌면 훨씬 더 많은 대화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또 엘라이자는 매일 밤 출근 전 달걀 냄비를 불 위에 올리고는, 달걀이 익기까지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자위를 한다. 출근길에는 조용한 복도에서 뮤지컬 영화 속 배우들의 춤 스텝을 따라 하고, 텅 빈 거리를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조용히 휘파람도 분다. 이처럼 소통에 익숙하고 여러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엘라이자의 내공은 청록이 앞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표현하는 것이다. 

“달걀을 처음엔 하나, 그 뒤부터는 점점 더 많이 청록이한테 가져다주기 시작하죠. 그다음에는 집에서 이동식 턴테이블을 챙겨가 음악을 들려주고요. 청록이가 음악에 관심을 보인 뒤엔 LP 음반을 여러 장 들고 가 듣고 싶은 노래를 직접 고르도록 하기도 해요. 마지막에는 물통 안에 갇혀 있는 청록이를 바라보며 그를 유혹하는 춤까지 추고요.” 

은씨는 두 존재가 말 한마디 없이도 차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교감과 소통을 통해 신뢰와 사랑의 단계로까지 나아가던 이 장면들을 떠올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모든 일을 연구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완벽하게 해낸 엘라이자는, 해부가 결정된 청록이를 몰래 빼돌려 자신의 집에 숨기는 일도 역시 주도적으로, 빈틈없이 수행해낸다. 은씨가 “엘라이자는 정말 멋있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감탄하는 이유다. 

그리고 마침내 청록이와 섹스를 하죠? 

“문틈을 수건으로 막아 욕실 전체를 물로 가득 채운 공간에서 둘이 사랑을 나눴을 때, 욕실 문을 연 자일스를 향해 엘라이자가 보여주는 그 표정 있잖아요. 행복감으로 충만한 미소,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그렇게 꼭 안고 있는 두 존재를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아주는 자일스의 모습도 참 아름다웠죠. 이 영화의 배경이 1960년대인데, 엘라이자를 둘러싼 환경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어 보여요. 사람들은 다 수화를 할 줄 알고, 서로 다른 존재의 사랑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물론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도 있긴 하지만요(웃음).”

자연스럽게, 나답게

은씨는 독신 여성의 자위, 이종 간의 사랑, 장애와 동성애 등 세상이 편견을 갖고 바라볼 수 있는 온갖 주제를 대수롭지 않은 듯 다룬 그 태도에 이 영화의 진짜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하긴 은씨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매일 자위를 한다’고 했다가 집중포화를 맞은 일이 있다. 같은 ‘사람’끼리 섹스를 했는데도 ‘파트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역시 적잖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와 현실은 좀 다르죠? 그런 일이 생기면 상처를 받나요? 


“비난은 주로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해요. 자위가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과 즐거운 섹스를 하는 것도요. 제 삶에서는 자위도, 섹스도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엘라이자가 매일 달걀이 익는 동안 자위를 하듯, 그렇게 일상적으로 하는 거고요.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그래서 가볍게 얘기했고, 마침 옆자리에 있던 봉만대 감독에게 ‘감독님은 매일 안 하세요?’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관련 기사가 엄청나게 쏟아지더군요. 제 직업이 섹스칼럼니스트이고 자위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저는 음탕하고 음란한 사람 취급을 받았고요. 이 영화에서 자일스가 청록이를 보며 ‘내가 너무 빨리 태어나거나 또는 너무 늦게 태어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하는데, 그 부분을 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는 한 파트너와 꽤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다면서요. 

“6년 전 여럿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에요.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한 달쯤 지났을 때 갑자기 생각이 났죠. 연락을 했더니 우리 집 앞으로 저를 보러 왔어요. 그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참 잘 맞는다는 걸 알았고, 금세 사랑에 빠졌죠. 얼마 안 지나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떨어지고 싶지 않게, 너무 좋았거든요.” 

은씨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그가 이 순간을 떠올리며 만든 노래 ‘갑자기’가 올라와 있다. 플레이어를 클릭하자 기타 반주와 함께 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 전 번개에서 만난 그녀가 갑자기 보고 싶네. 갑자기 연락해봤죠. 오늘 저녁 시간 어떠세요. (중략) 갑자기 만난 우리는 청하 8병을 마셨고 우리 집 앞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입을 맞췄지.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네.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그녀가 보고 싶네.’ 

노래하는 은씨의 목소리는 인터뷰할 때와 또 달랐다. 기타 줄을 튕기며 노래하는 내내 그가 싱긋 웃고 있었을 것 같다. 마치 ‘청록이’와 사랑을 나눈 뒤 온몸에서 웃음이 뿜어 나오는 듯 보이는 엘라이자처럼.

상처를 통해 숨 쉬다

‘갑자기 보고 싶었죠 왜 갑자기 보고 싶었나요 갑자기 보고 싶었죠 왜 갑자기 보고 싶었나요’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은씨는 말했다. 그 언니가 그냥 갑자기 좋아졌다고. 그래서 노래에서 자기 자신에게, 혹은 파트너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왜 우리는 갑자기 서로를 보고 싶어 했는지를. 어쨌든 여성인 은씨와, 또한 여성인 그의 파트너에게 사랑이 찾아왔고, 그들은 이후 6년째 같이 살고 있다. 은씨는 “둘이 함께 적잖은 시간을 보내온 지금은 감정이 처음과 조금 달라진 듯하다. 옷을 갈아입었다고 해야 할까. 고양이 두 마리를 같이 키우면서 안정감을 많이 느낀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앞으로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섹스하고 글을 쓰며 사는 것이다. 그동안 세상에 받아온 상처 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보면 마지막 순간 엘라이자가 자신의 목에 있던 오랜 상처를 통해 숨을 쉬잖아요. 상처를 감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드러냈을 때 더욱 잘, 어쩌면 좀 더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그 장면이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아요.” 

은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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