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1월 21일 세상에 태어난 주민등록증
‘110101-100001’ 주민번호 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인권침해’ 첨병에서 ‘국가공인 성인식’ 상징으로 탈바꿈
정보화 사회 이후 악용 사례 빈발
주민등록번호(주민번호)에 주민번호를 부여한다면 앞 여섯 자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꼭 50년 전인 1968년 11월 21일, 이 땅에 주민번호라는 존재가 처음 태어났다.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태어남과 동시에 받는 열세 자리 일련번호다. 앞 여섯 개 숫자는 출생 연월일, 뒤 일곱 개는 각각 성별, 지역, 등록순서 등을 표시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에 대해 “개인에게 특유한 번호 하나가 부여되고(전속성) 부여 방식이 전국적·전국민적으로 통일된 체계를 이루며(통일성), 결코 중복되지 않고(유일성), 일생 동안 변하지 않는데다(종신성), 모든 정보 관리의 기본 식별자로 활용되고(범용성),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강제성)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열세 자리 번호가 말해주는 것들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가 담겨 있는 점(개인정보성)도 한 교수가 밝힌 주민번호의 주요 속성 중 하나다. 여권번호나 운전면허증번호, 은행계좌번호를 보고 ‘주인’의 특징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주민번호는 다르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열세 자리 숫자만으로 소지자의 나이, 성별을 인지한다. 출신지를 알아내기도 어렵지 않다.최근 경기도 부천 한 편의점주는 아르바이트생 모집 공고를 내면서 ‘주민등록번호 중 8번째, 9번째 숫자가 48~66 사이에 해당하시는 분은 죄송합니다만 채용 어렵습니다. 가족 구성원도 해당될 경우 채용 어렵습니다. 이 점 확인하시어 지원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주민번호가 123456-abcdefg라고 할 때 bc에 해당하는 대목을 특정한 것이다.
현행 체계에서 이 자리에는 해당 주민번호를 발급한 지방자치단체 고유번호가 들어간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출생신고를 하면 해당 숫자가 00~08 사이가 된다. 이 ‘법칙’을 아는 사람은 주민번호만 봐도 소지자의 출생 당시 주거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편의점주가 콕 집어 채용 불가 의사를 밝힌 ‘48~66’은 어느 지역일까. 48~54는 전라북도, 55~66은 전라남도 및 광주광역시 고유코드다. 해당 편의점주는 채용 공고가 논란이 된 뒤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예전에 해당 지역 출신 직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걸 피하고 싶어) ‘서로 힘 빼지 말자’는 생각에 제한을 둔 것”이라고 ‘해명’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bc자리 숫자가 반드시 소지자 출신지를 가리키는 건 아니다. 서울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전남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면 전남 코드를 받는다. 그러나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것으로 유명한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 숫자를 ‘지역감별’의 절대 수단으로 여기는 이가 적잖다. 한 네티즌은 지역별로 bc자리에 해당하는 코드를 게시한 뒤 “외우고 다니다가 ‘고향 세탁’ 하려는 놈들 (있으면) 민증 보자고 해라”라고 썼다.
대통령은 100001, 영부인은 200002
박정희 전 대통령(앞쪽 가운데) 부녀가 1978년 5월 18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대 대의원선거 투표에 앞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신분을 확인하고 있다(위). 박 전 대통령 내외 주민등록증 발급 소식을 전한 1968년 11월 21일자 동아일보 지면. [동아DB]
그렇다면 주민번호는 50년 전, 무슨 이유로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먼저 밝혀둘 것은 주민번호가 1968년부터 지금 형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해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서울 종로구 자하동사무소에서 우리나라 1호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당시 도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박 대통령 주민번호는 110101-100001, 육 여사 번호는 110101-200002였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출생일을 임의로 붙인 게 아니다. 당시엔 주민번호 앞 여섯 자리가 등록지역, 뒤 여섯 자리는 성별과 주민등록 순서를 각각 의미했다. 박 대통령 주민번호에서 앞자리 11은 서울, 01은 종로구, 다음 01은 자하동을 가리킨다. 뒷자리 1은 성별(남자), 그 뒤 00001은 해당자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민등록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개인정보가 이보다 훨씬 많이 담긴 현행 체계로 주민번호가 개편된 건 1975년 8월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제도의 큰 틀은 1962년, 1968년, 1975년 세 차례의 법률 제·개정으로 만들어졌다. 1962년 주민등록법(법률) 제정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주도했다. 단, 이전에도 우리 국민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사실상 ‘주민등록’을 하고 있었다. 1413년(태종 13년) 도입된 호패제 또한 내용적으로 주민등록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법률 제정 당시 사회적 논란이 크지 않았다.
1965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부가 법률을 개정해 주민등록증 발급과 휴대를 강제하려 한 것이다. 그해 10월 29일 동아일보는 ‘내무부가 ‘주민등록을 한 자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하고 이를 소지하지 않는 사람에겐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 규정을 신설하려 한다’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일인데다 의무와 벌칙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보도했다. 비판 여론이 일었고 정부 계획은 무산됐다. 12월 11일 동아일보는 ‘정부가 10일 오후 국무회의에 주민등록증 휴대 강제규정 등이 담긴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으나 심의가 보류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국민 기본권을 침해할 요소가 있다는 강한 반대여론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個人에 永久番號”
주민등록번호로 식별되는 특정 지역 출신자는 지원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채용 공고. [인터넷캡쳐]
‘인구 동태 파악, 간첩 은신 방지가 주민등록제를 새로 만들려는 근본 목적이라고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웠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가운데서 하나도 납득되는 것이 없다. 먼저 전자는, 지금도 전입신고, 퇴거신고제가 각 동사무소마다 정해 있으니 그것으로 인구의 이동을 알 수 있는 일. 다음에 후자는, 원래 간첩들의 신분증 위조 방법이란 기기묘묘하다. (중략) 더욱이 한 술을 더 뜬 것은 지문등록이란 괴상망측한 것까지 태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마치 국민을 요시찰인 또는 우범자로 다루려는 것 같은 극히 불쾌한 인상, 심하게 공포심까지 갖게 한다.’
반대가 잦아들지 않자 1967년 9월 정부는 개정안에서 주민등록증 발급과 휴대규정을 삭제했다. 이듬해 1월 21일 김신조를 위시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은 이 흐름을 반전시켰다. 정부가 2월 16일 곧바로 주민등록증 발급 방침을 밝히고 법률개정안을 마련,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간첩이나 불순분자의 색출, 병역기피자의 징병 관리’를 이유로 밝혔다. ‘방첩’에 대해 누구도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에서 만 18세 이상 지문등록, 주민등록증 발급 및 휴대 의무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8월이 되자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갔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모든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붙이기로 한 것이다. 동아일보 8월 29일자 ‘개인에 영구번호’라는 제목 기사 골자는 이렇다.
‘새로 실시되는 주민등록은 모든 주민등록자에게 평생 불변의 번호를 부여하고 행정구역과 개인을 기호(숫자)로 파악 기록도록 돼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지역표시번호, 성별표시번호와 개인표시번호를 연결해 구성한다.’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사상 유례없는 이 제도를 입법 절차 없이 대통령령 개정을 통해 도입하려 했다. 거센 반대가 일어났다. 동아일보 9월 13일자 사설이다.
‘정부는 국민을 일련번호로 정리하는 주민등록을 기어코 시행하려는가. (중략) 사무 착오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등록자에게 개인별로 일일이 번호를 붙이기로 한다는데 (중략) 헌법이 가장 중히 여기고 있는 개인 권리를 단지 행정사무 기술 때문에 도구처럼 희생시켜야 되겠느냐는 말이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 ‘우리가 더욱 주목하는 문제점은 지금까지 지적한 사안들이 과연 위임입법 사항으로 정부가 마음대로 뜯어고쳐 대통령령으로 공포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라고도 꼬집었다. ‘지난 5월 개정된 주민등록법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경우의 서식과 절차를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대목만 갖고 이렇듯 상식에 벗어난 확대해석을 일삼는다는 것은 입법권에 대한 도전이요 침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야당 신민당도 ‘민주사회에는 있을 수 없는 악법’이라며 폐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주민번호는 각계 반대 속에서 끝내 태어났다.
편리함의 덫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광주 금남로 길거리 응원에 나선 청소년들이 히딩크 당시 감독 이름을 ‘히사강’으로 표시한 주민등록증 모양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이종승 기자]
주민번호를 둘러싼 환경이 다시 바뀐 건 정보화 이후부터다. 1991년 경찰관이 ‘채권해결사’들과 짜고 주민조회전산망에서 빼낸 정보로 채무자를 추적·협박해 금품을 갈취하다 적발됐다. 당시 언론은 ‘경찰이 전국적인 전산망으로 갖고 있는 주민 조회 등 각종 개인별 전산 자료가 무단 유출돼 범죄 등에 악용될 위험’에 대해 앞다퉈 보도했다. 정부는 철저 단속을 약속했지만 1994년 공무원이 광고우편발송(DM) 업체와 공모해 주민번호 292만 건을 유출했다 구속되는 등 관련 범행이 이어졌다.
초고속 인터넷 확산 이후 범죄 규모와 피해 범위는 더욱 커졌다. 2014년 2월 국회에서 열린 ‘주민등록제도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 세미나에서 김영홍 ‘함께하는시민행동’ 정보인권국장은 “1991년부터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주민번호 유출 건수만 3억7400만 건에 달한다. 유출된 주민번호는 다른 개인정보와 연계돼 심부름센터의 사생활 조사, 불법채권추심, 대출사기, 대부업체 마케팅, 이동통신사 가입자 모집 마케팅 등에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국회가 움직였다. 민병두 당시 민주당 의원은 2014년 2월 국민이 원할 경우 주민번호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며 “‘권위주의 시대 주민번호’가 ‘정보화시대의 부작용’과 만나면 문제가 커진다. △불법으로 한번 확보하면 ‘평생’ 활용할 수 있고 △불법 정보의 대규모 축적이 안정적으로 진행돼 △불법정보의 대량 수집과 대량 피해를 구조화한다”고 강조했다.
‘번호 변경 허용’ 다음은?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오른쪽)이 2017년 10월 12일 열린 행정안전부 국정감사에서 김부겸 장관 주민등록번호 맞히기 시연을 하며 주민등록번호 임의번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왼쪽). 2015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번호 변경 불가’ 규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재정 의원실 제공]
“주민번호 변경을 신청하려면 신청자가 자기 신체나 재산 등에 위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음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 정부가 파악하는 개인정보 유출사례가 1억3000만 건에 이르는데 어디서 자기 주민번호가 사용되고 있는지 본인이 어떻게 스스로 입증하나.
또 변경 신청이 받아들여져도 총 열세 개 주민번호 중 등록지역 정보 등을 담은 뒤 여섯 개(123456-abcdefg 가운데 bcdefg)만 고칠 수 있다. 고유정보가 담기지 않은 임의번호 부여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진 의원이 8월 현행 주민번호 대신 임의번호를 부여해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희훈 선문대 법학과 교수도 “미국, 독일, 일본 등은 국민에게 무작위 일련번호를 부여해 개인식별번호로 사용되도록 한다. 우리도 이 경우처럼 제도를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미 2014년 지역고유번호 ‘44’를 부여받은 세종시 주민들이 “신생아 주민번호에 4가 연달아 들어간다”며 집단으로 문제 삼자 240여 명의 주민번호를 고쳐준 일이 있다. 2000년대 태어난 여자는 주민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4로 고정돼 있어 이 무렵 세종시에서 태어난 일부 신생아에게 ‘4444’가 들어가는 주민번호가 발급됐다는 후문이다. 숫자 ‘4’를 불길하게 여기는 국민 정서로 해당 지역에 불만이 커지자 당시 정부가 ‘주민번호 변경 불가’ 원칙을 깬 것이다. 탈북 후 경기 안성(고유번호 25) 하나원에서 일괄적으로 주민 등록을 하는 탈북자 주민번호 뒷자리가 남자는 125, 여자는 225로 동일해 탈북자임이 쉽게 드러나고 중국 입국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일도 생긴다는 지적이 일면서 2009년 이를 바꿔주는 특례법을 만든 일도 있다. ‘탄생’ 50년 만에 또 한 번 거대한 도전에 직면한 주민번호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