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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막후 60년-최서면에게 듣다

“번역의 원동력은 부끄러움이었다”

  • 심규선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일관계 막후 60년-최서면에게 듣다

최서면 구술·고하리 스스무 등 채록·심규선 옮김, 나남, 각 452·562쪽

최서면 구술·고하리 스스무 등 채록·심규선 옮김, 나남, 각 452·562쪽

국가의 역사든 개인의 역사든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3간(三間)’이 만든다. 필자가 번역한 ‘한일관계 막후 60년-최서면에게 듣다’라는 책은 거칠게 말해 시간과 공간에서 추방당한 한 인간의 ‘라이프 스토리’다. 누군가가 듣고 싶어 할 정도의 ‘라이프 스토리’라면 성공한 삶일 것이다. 그러나 최서면의 성공은 자신을 추방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복수도 아니고, 돈과 권력이라는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도 아니다. 그의 ‘성공’이 독특한 이유다. 

최서면은 연희전문에 들어가 대한학생연맹위원장으로 있을 때 연맹 단원이 설산 장덕수를 암살한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다. 6·25전쟁 때 피란지 부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며 이름을 알리게 됐고, 그 덕분에 노기남 대주교와 장면에게 발탁돼 가톨릭 총무원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그렇지만 장면의 정적인 이승만 정권이 예전 사건을 빌미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1957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으로 망명한다. 

최서면에게 일본은 외롭고 쓸쓸한 무인도였다. 그런데 그곳에 자신을 추방한 고국 관련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끼니에 매달릴 것인가, 사료를 읽을 것인가. 그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파묻혀 한국관계사료를 읽고 또 읽었다. 

‘최서면에게 듣다’는 고하리 스스무 시즈오카현립대 교수 등 한국전문가 4명이 ‘오럴 히스토리’라는 형식으로 최서면을 일본어로 인터뷰한 보고서(비매품)를 번역한 책이다. 일본 정부가 경비를 대고 한국전문가 4명이 7년 동안 17번에 걸쳐 70시간이나 그를 인터뷰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서면이 ‘한일관계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최서면은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전인 ‘안응칠역사’와 유묵들, 야스쿠니신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북관대첩비’, 조선이 만든 걸작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발굴해 한국으로 가져왔고, 이봉창 의사 재판 기록을 처음으로 공개했으며, 일본에 동경한국연구원과 국제관계공동연구소를 설립하고 학술지 ‘韓’을 창간해 일본에 한국학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 



독도 관련 지도 수집에서도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 후쿠다 다케오 총리 등 거물과도 친분이 깊어 양국의 정치적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흥미진진한 뒷얘기가 많이 실려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자극적인 인물

최서면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방대한 한국 자료를 보고 한국을 너무 모르는 자신이 부끄러워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필자도 고하리 교수 등이 만든 560쪽의 방대한 보고서를 읽고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최서면은 한국 정부가 돈을 대고, 한국인 학자가, 한국어로 인터뷰했어야 옳다. 그런 부끄러움을 감추는 방법이 내게는 번역이었다. 

다만, 원본에 충실하면서도 조금이나마 번역자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증언 중에서 틀린 부분은 검증해 각주로 바로잡았고, 등장인물 600여 명에게는 약력을, 300여 개 항목에는 설명을 붙였다. ‘아주 자유로운’ 영혼의 인간이(최서면), ‘아주 장시간’에 걸쳐서 한 오럴 히스토리에(70시간), ‘아주 자세한’ 설명을 붙이겠다는(장문의 주) ‘3자’의 콘셉트를 세운 것이다(물론 평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최서면은 일본에 있던 30년 동안은 물론이고 1988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공직을 맡아본 적도, 월급을 받아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번역을 마치며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최서면은 불리한 시간과 공간을 애써 극복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무시함으로써 초월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는 온전히 자신이라는 ‘인간’에 집중할 수 있었고, 화려한 업적은 자연스레 따라온 것이 아닌지. 흥미로우면서도 자극적인 인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동아 2020년 6월호

심규선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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