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호

“죽어도 죽지 못한 전사자들, 끝까지 가족 품으로” 국군 유해 발굴 태두 박선주

  •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입력2020-10-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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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학자 1명·장의사 2명’ 육본 초기 발굴계획

    • 대학원생 제자 모아 사비 들여 전사자 발굴

    • 딸 등에 업힌 전사자 아내 “남편이 휴가 때 사간 호루라기” 통곡

    • 2007년부터 발굴 유해 1만 구 중 신원 확인 100여 명

    • ‘韓기술 신뢰 못 한다’던 미국, 이젠 ‘한미 공동 감식’

    •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하니 “전향하셨어요?”

    • 보편적 인권 문제, 유해 발굴에 ‘좌우’ 없다

    • ‘망자를 가족 품으로’…국가가 지켜야 할 국민과 ‘계약’



    “철모 속에 두개골 뼈가 담겨 있거나, 전투화 안에서 발뼈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6·25전쟁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죠. 인류학자로서 제가 국군 유해 발굴에 참여할지 예상 못 했습니다. 20년 동안 하다 보니 이제 국군에 대한 애정도 깊어졌습니다.” 

    충북 청주시 인류진화연구소에서 만난 박선주(73)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20년간 국군 유해 발굴에 참여한 소회를 담담히 밝혔다. 박 교수는 국군 유해발굴·감식 사업의 태두다. 미국 버클리대에서 체질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충북대 교수로 재직하던 2000년, 육군본부의 제의로 육군유해발굴단 책임조사원이 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2007년 전사자 유해발굴·감식 전문부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의 산파 역할을 하고 2016년까지 국유단 자문위원을 지냈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유해 발굴 20년, 국군에 애정 깊어져”

    2007~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6·25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발굴단장도 맡았다. 박 교수는 “대한민국 국군의 99%는 나라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소수 정치군인이 6·25전쟁 때 학살 등 악행을 저질렀다. 유해 발굴은 보편적 인권의 문제다. 좌우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군 유해발굴사업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1999년 육군본부의 이용석 중령(당시 육본 유해발굴 통제장교, 국유단 발굴과장 역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듬해 2000년이 6·25전쟁 60주년이었다. 군에서 기념사업으로 전사자 유해 발굴에 나서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난 인류의 기원과 진화 등을 연구하는 체질인류학자다. 체질인류학의 기본이 사람 골격을 다루는 뼈대학이다. 국내 전문가를 수소문하다 내게 연락한 것이다. 



    이 중령을 직접 만나 육본 측 유해발굴사업 백서를 건네받았다. 읽어보니 인류학자 1명과 장의사 2명이 주축이란다. 사람의 유해는 문화재보다 훨씬 소중하다. 적어도 문화재 발굴단 정도 규모의 조직을 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육본이 건의를 받아들여 나와 해부학자, DNA 분석가, 군사(軍史) 전문가 등 8명으로 발굴단이 조직됐다.” 

    -발굴단 규모가 단출했다. 

    “육본은 유해 발굴을 한시 사업으로 계획했다. 필요한 병력도 발굴지 인근 부대에서 지원받는 식이었다. 당시 군 수뇌부 중 일부는 유해가 실제 나오겠느냐면서 발굴에 회의적이었다. 옛 격전지를 찾아 발굴해 보니 웬걸,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첫 발굴부터 소중한 성과를 거뒀다.” 

    -어떤 성과였나. 

    “2000년 4월 첫 발굴지가 칠곡 다부동(현 다부리)의 369고지였다. 그곳에서 고(故) 최승갑 님의 유해가 나왔다. 당시 발굴에 나선 병사 한 명이 휴식 시간에 ‘유해가 왜 이리 안 나오느냐’고 탄식하며 흙바닥을 두들겼다. ‘퉁퉁!’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기에 얼른 파봤다. 땅 밑 빈 공간에 웅크린 자세의 유해와 함께 호루라기와 삼각자, 연필 등 유품이 나왔다. 삼각자를 잘 들여다보니 ‘崔承甲(최승갑)’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최승갑 님의 부인께서 꼭 현장에서 수습된 유해를 보고 싶다고 했다. 따님이 어머니를 369고지까지 업고 모셔왔다. 유품 중 호루라기를 보시더니 ‘남편이 휴가 때 가져간 것’이라며 통곡하시더라. 유족이 수십 년간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난 순간이었다. 이 일을 모티프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나왔다.”

    “절대 한시 사업에 머물러서는 안 돼”

    하늘이 도왔을까. 첫 삽부터 전사자 신원확인에 성공했지만 유해 발굴은 녹록지 않았다. 유해 발굴을 맡을 전문 인력이 국내에 없다시피 해 박 교수의 제자들이 현장에서 일을 도왔다. 박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난 정부가 이미 6·25 전사자 유해를 어느 정도 발굴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처음 시작한 국군 유해 발굴은 쉽지 않았다. 인력과 장비 모두 부족했다. 군에서 지원한 경비로는 숙식 해결하기에도 빠듯했다. 필요한 장비를 사비로 구입해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3년, 당초 육본이 사업 기한으로 잡은 3년이 지났지만 유해는 계속 발굴됐다. 박 교수는 “유해 발굴 양상을 보니 몇 년 발굴하고 끝낼 일이 아니었다. 상설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첫 3년 동안 격전지에서 유해 수백 구가 나왔다. 내가 군에 보낸 보고서에 ‘절대 한시 사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한 차례(3년) 연장 끝에 2007년 국방부에 유해발굴감식단이 생겼다. 전사자 유해발굴부대로는 세계에서 미군의 JPAC(실종자 확인사령부 ‘제이펙’·현 DPAA)에 이어 두 번째다. 다만 신생 부대라 배치된 장교들도 일을 낯설어했다. 당장 필요한 장비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당시 JPAC이 쓰던 장비 리스트를 쭉 뽑아줬다.” 

    -전사자 유해 발굴은 인류학자에게도 낯선 일 아닌가. 

    “체질인류학 분야에서도 인골을 다룬다. 현생인류 이전의 고인류(古人類) 유해를 발굴해 연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전사자 유해 발굴에 비해 출토되는 유해의 숫자가 훨씬 적다. 다행히 많은 유해가 뒤섞여 발굴되는 현장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1997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의 유해를 발굴해 봤다. 그래도 전사자 유해 발굴은 전혀 다르더라. 민간인과 달리 유품이 많이 나왔다. 가령 초기 발굴 과정에서 기관총 탄 링크(기관총 탄알을 결속하는 부속)나 무전기 배터리가 나왔는데 도통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참전용사와 정보사령부의 도움으로 6·25전쟁 때 쓰인 군 장비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국유단 창설 전 한국의 유해 발굴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단적인 사례를 하나 말해주겠다. 2002년 경남 창녕에서 전사자 유해를 발굴했다. 격전지로 유명한 낙동강 부근이다. 현장의 발굴병 하나가 뭔가 손에 쥐고 ‘박사님, 이건 나뭇조각이죠?’라며 묻더라. 자세히 살펴보니 풍화된 유해였다. 현장에서 처음 발견된 유해는 아무리 작은 조각도 허투루 여기면 안 된다. 근처에 또 다른 유해가 있을 수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주변 흙을 일일이 체로 걸러 다른 유해 파편과 유품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중 아래턱뼈에서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코카소이드(Caucasoid)의 특징이 보였다. 치아는 아말감으로 땜질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치과 치료에 쓰지 않던 재료다.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 유해로 미군일 가능성이 크다’는 내 소견이 육본을 거쳐 국방부로, 다시 미8군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미군 측 반응이 아주 시큰둥했다. 한국군의 유해 발굴 실력을 신뢰할 수 없다는 거였다.” 

    -미군으로서는 고마운 일일 텐데. 

    “미8군 참모장이 우리 군에 ‘한국군이 발굴한 유해에 대한 감식 소견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더라.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미군 유해가 나오면 미국 측은 현장에 펜스를 치고 한국군의 출입을 막았다. 한국군에 유해 발굴 기술이 전무하다는 이유였다. 내가 편지를 써 인류학자로서 해당 유해가 미군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미군 측이 미안하다며 한미 공동 발굴을 제안했다. 해당 유해를 신원확인한 결과, 고(故) 라일리 에드먼드 소위로 밝혀졌다. 현재 워싱턴 DC 알링턴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미국서 온 국군 유해 147구…감개무량”

    지난해 6월 11일 강원 철원군 민통선 내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남북공동유해발굴 태스크포스’ 장병들이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6월 11일 강원 철원군 민통선 내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남북공동유해발굴 태스크포스’ 장병들이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 대목에서 박 교수는 “이제 한국군의 유해 발굴·감식 역량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한미 공동 감식으로 확인된 국군 전사자 유해 147구가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6·25전쟁 70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한국 공군기(KC-330)편으로 국군 전사자 유해 147구가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북한이 1990~1994년과 2018년 미국 측에 보낸 유해 중 한미 공동 감식 결과 한국군으로 판정된 유해다. 이 중 고(故) 하진호 일병 등 전사자 8명의 신원이 최종 확인됐다. 

    -한미 공동 감식이 성과를 거뒀다. 

    “국군 유해 147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감개무량했다. 한미 전문가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북한은 제대로 된 유해 발굴 기술이 없는 실정이다. 북한이 유해라고 보낸 것 중에는 동물 뼈도 있었다. 

    북한은 미국과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미 유해발굴팀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1996년 시작된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이 북·미관계의 파이프라인 구실을 한 셈이다. 함경남도 장진호, 평안북도 운산에서 33차례 발굴로 유해 600여 구가 나왔다. 물론 북한이 경제적 이익을 노린 측면도 있다. 미국이 유해 1구당 8만 달러 정도를 쳐준 것으로 안다. ‘미군 유해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북한 주민 사이에서 돌았는지 탈북민들이 미국 측에 ‘미군 유해가 어디 묻혔는지 안다. 알려주면 미국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유해 발굴로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얼마나 되나. 

    “2007년부터 지금까지 전사자 유해를 1만 구 이상 찾았다. 다만 그중에서 신원확인 결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분은 100여 분밖에 안 된다.” 

    -신원확인율이 낮은 듯한데. 

    “신원확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DNA 감식이다. 유해에서 DNA를 채취해 유가족의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유품을 통한 신원 확인이다. 

    그런데 개전 초 입대한 한국군의 경우 인식표가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워낙 전황이 급박하니 징병이 질서 있게 이뤄지지 않았다. 당초 국방경비대 소속이던 군인 외에는 인식표조차 귀했다고 한다. 병사가 직접 구한 동판에 자기 이름을 적은 유품이 나올 정도다. 혹여 유품에 이름이나 군번이 적혀 있어도 신원확인은 막막하다. 당시 병적 기록을 100% 신뢰할 수 없다. 이름도 주소도 실제와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다.”

    “땅 파는 것이야 도굴꾼이 더 잘해”

    국군 유해 발굴·감식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 진행된다. 우선 6·25전쟁 전사(戰史) 및 참전자·지역주민 제보를 참고해 현장답사로 발굴 지역을 정한다. 이후 고고학적 문화재 발굴 기법을 통해 유해·유품을 발굴한다. 유해·유품 감식은 발굴지 인근의 현장 임시감식소와 서울 동작구 국유단 청사 내 중앙감식소를 거쳐 여러 차례 이뤄진다. 유해와 함께 출토된 유품과 전투 기록 등을 바탕으로 유해의 피아(彼我)를 파악한다. 이후 유해에서 시료를 채취해 DNA 검사를 진행한다. 이를 데이터베이스화된 6·25전쟁 전사·실종자 유가족의 DNA와 비교한다. DNA가 일치한 유해는 다시 정밀 분석해 신원을 확인한다. 

    ‘유해 발굴’이라고 하면 땅 파는 단순 작업이 연상된다고 말하자 박 교수는 웃으며 “땅 파는 것이 능사라면 도굴꾼이 더 잘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유해 신원확인까지 과정이 복잡하다. 

    “그렇다. 유해 발굴과 감식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발굴 작업도 단순히 땅을 파는 것이 아니다. 지층을 분석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분석해야 한다. 가령 인위적으로 땅을 파 지층이 교란된 흔적은 매장의 유력한 증거다. 흙더미 속에서 이런 흔적 하나하나를 추적해 유해가 묻혔을 가능성이 높은 곳을 특정해야 한다. 실제 유해가 나와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신원확인을 위해 유해의 매장 상태와 유품 출토 양상을 면밀히 봐야 한다. 가령 바른 자세로 발견된 유해는 사후 시신을 수습해 매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반명 웅크리거나 엎어진 상태라면 전사 후 그대로 땅에 묻힌 경우다.” 

    -유해 상태로 사인(死因)을 추측할 수도 있나. 

    “다른 정황을 함께 분석하면 가능하다. 예를 하나 들겠다. 다부동에서 유달리 상처 없이 표면이 깨끗한 유해들이 나왔다. 대부분 전사자 유해에는 검상이나 총상이 있기 마련이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병사(病死)한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해가 온전했다. 유해의 골격 등을 고려하면 나이가 10대로 추정됐다. 전투 기록 등을 살펴본 결과 미군의 폭격에 숨진 북한군 전사자로 추정됐다. 융단폭격이 극심하면 화염이 산소를 모두 태워 숨 쉴 공기조차 부족해진다. 폭탄에 직격당해 죽는 것 뿐 아니라 질식사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북한군은 어린 의용병에게 술을 먹여 전선에 앞세웠다고 한다. 후방 독전대(督戰隊)의 강요에 못 이겨 골짜기 따라 행군하다 미군 폭격으로 사망한 듯하다.” 

    박 교수는 “유해발굴사업은 국가의 중요한 의무다. 6·25전쟁 전사자는 물론 민간인 학살로 숨진 피해자의 유해 모두 잘 발굴해 가족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힘닿는 데까지 유해 발굴을 도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20년 동안 국군 유해 발굴에 나선 이유는.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은 국가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국가가 어떻게 유지되나. 국민과의 계약으로 성립된 것 아닌가. 국방의 의무를 지고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었으면 유해라도 가족 품에 돌려줘야 하지 않나. 동시에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사자는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산야에 유해가 쓸쓸히 묻혀 있다. 제대로 된 장례조차 못 치렀다. 망자를 애타게 그리던 가족도 상당수 세상을 떠났다. 국가 차원에서 구천을 떠돌던 영혼을 잘 모셔야 한다.”

    “유해 발굴 시 ‘이념’ 얘기 못하게 해”

    -6·25전쟁 전사자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도 주도했다. 

    “학살 피해자는 ‘빨갱이’ 꼬리표가 붙어 죽어서도 우리 사회 일원이 되지 못했다. 추상적 이야기지만 망자가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치게끔 해야 한다. 남은 가족도 연좌제로 사회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국가가 끊어줘야 한다. 유가족의 한이 얼마나 깊겠나. 그 환부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대충 덮어놓고 지나가면 진정한 사회 화합은 없다.” 

    -국군 전사자와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 느낌이 사뭇 다른데.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해 발굴을 도맡았다고 하니 주변에서 ‘언제 전향했느냐’고 하더라. 우스갯소리지만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을 보여준다. 유해 발굴에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없다. 산야에 묻힌 망자의 유해나마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일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문제다. 그 와중에 편 가르기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에는 아무래도 진보 시민단체 사람이 많이 참여한다. 나는 유해 발굴할 때 이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지 못하게 한다. 내 원칙이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포천 전방지역의 국군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았다. 노 대통령이 발굴된 유해와 유품을 둘러볼 때 내가 안내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 비서실장으로서 동행했다. 노 대통령은 유해 발굴 성과를 보고 흡족해했다. 국유단이 창설된 것도 노무현 정부 때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보수인가? 아니잖나. 6·25 전사자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발굴사업 모두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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