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가 上王 노릇할 것
韓에 유화적 자세 보이겠지만 해법 없을 듯
文, 반일파 아니다…한일관계 풀려는 의지 강해
징용배상, 정치로 풀어야 하는데 韓정부도 역할 못해
자민당에선 ‘수출규제’ 이익 없어 풀고 싶어 해
간사장, 관광객 2000명 데리고 방한계획 했었다
코로나 터지면서 물거품, 운이 없는 건지…
이낙연, 청와대에 한일관계 개선 강력 요구해야
여권 일본통 강창일 전 의원은 도쿄대에 유학해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박해윤 기자]
스가 총재는 9월 2일(현지시간)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아베 정권을 확실히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아베의 상왕(上王) 정치가 신호탄을 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베스(아베+스가)’라는 낱말도 돈다. 아베 총리는 의원직은 유지하기로 했다. 복잡하게 꼬인 한일관계의 실타래가 좀체 풀리지 않을 거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4선을 지낸 강창일(68)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여권의 의중을 반영하는 무게감 있는 일본통으로 꼽힌다.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로 유학해 동양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7대 총선 때 제주시갑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그 뒤 한일의원연맹에서 간사장, 수석부회장, 회장을 지냈다. 지난 1월 “20대 국회를 돌아보면 국회의원으로 자괴감을 느낀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일본에서 계속 전화 온다
일본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만큼 한일관계에서 양국 간 소통 창구로 국회만 한 곳이 없다. 아베 내각이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부품소재 수출규제 조치를 취한 뒤, 강 전 의원은 한일의원연맹 회장 신분으로 청와대와 교감하며 일본 측과 물밑 대화를 벌였다. 그와 9월 4일 서울 양재동 ‘역사디자인연구소’에서 마주 앉아 저간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일본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어쩌다 일본을 화두로 삼게 됐나.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활동하면서 민주화운동 하다가 1980년에야 복학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전두환 정권이 모교 대학원을 못 가게 했다. 또 데모할 거라 생각했던 거지. 이후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제침략사를 주제로 논문을 썼다.”
- 도쿄대 논문 주제가 일제침략사였다는 게 흥미롭다.
“단어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제 때문에라도 치밀하게 쓸 수밖에 없었지. 논문 심사위원이 8명이었는데, 실증적으로 써놓으니 아무도 손을 못 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권 줘야겠다”면서 두꺼운 책을 건넸다. 도쿄대 박사 논문을 한국어로 옮겨 쓴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아베 내각을 분석하며 꺼낸 ‘대일본주의’라는 단어와 묘하게 겹친다.
- 한일의원연맹에서 회장까지 지냈으니 한일관계에는 잔뼈가 굵은 셈인데.
“17대 국회에 들어오니 이낙연 의원(현 민주당 대표)이 한일의원연맹 활동을 같이 하자 하더라고. 이 대표가 동아일보 특파원 할 때도 일본에서 자주 만나 술 마셨다. 18대 국회에서 이 대표가 간사장, 나는 사회문화위원장을 했다. 19대 때 이 대표가 전남지사로 가면서 내가 간사장을 맡고, 집권 뒤 회장을 했지.”
최근 이 대표의 비서실장에 내정된 오영훈 의원도 강 전 의원의 보좌관 출신이다. 이야기는 다시 한일의원연맹으로 돌아간다.
“이 대표가 대선에 나가게 되니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하기 어렵지. 이 대표는 고문으로 모시고, 김진표 의원이 회장을 맡았다. 간사장은 야당 몫인데, 저쪽(국민의힘)에서 간사장을 못 뽑고 있다. 아직 한일의원연맹 구성이 안 됐다. 일본에서 계속 전화가 온다. 한국 파트너가 없어 죽겠다고.”
- ‘스가 총리 시대’는 ‘아베 총리 시대’와 바뀌는 게 있을까.
“안 바뀐다. 아베가 총리 관저 비서들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를 총괄한 사람이 스가다. 누구는 ‘스가가 기획하고 건네면 아베가 폼 잡고 지시한다’고 한다. 그의 위상은 대변인 겸 비서실장 격이다. 아베가 스가한테 전권을 주니 비서실장 역할까지 맡은 거지.”
- 박근혜 전 대통령 때 김기춘 비서실장 같은 역할인가.
“그렇다. 단, 스가는 실용주의자이니 폼 잡지는 않고 모양새로는 한국에 조금 유화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반도체 부품소재 수출규제 조치를 두고 어떻게든 대화의 장까지는 나아가리라 본다. 물론 ‘대화하자’이지, ‘푼다’는 아니다.”
- 실질적 해법을 갖고 올 가능성은 작다는 건가.
“차기 총리 임기가 1년밖에 안 되니 온전히 자기 정치를 펼 수는 없다.”
- 관리형 내각이 되리라는 분석이 많다.
“아베의 측근들, 특히 총리 관저의 강경파를 중심으로 계속 정권을 운영해 나갈 것이다. 자민당이나 내각에서는 불만이 많다. 장관들이 얘기할 수가 없다고 한다. 고노 다로 외무상이 반도체 부품소재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얘기를 못 들었다는 것 아닌가.(*당시 일본 언론에는 ‘총리 관저와 경제산업성이 주도권을 쥐면서 외무성은 발표 직전에야 세부 내용을 알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베가 이상한 밀실정치를 했다.”
- 아베가 스가 정권에서 상왕(上王) 노릇을 할 거라는 해석까지 나온다.
“상왕 노릇하지. 그러려면 (아베 처지에서는) 총리 적임자로 스가밖에 없다.”
풀어보려고 했는데 터지고 또 터지고…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2월 14일 청와대에서 한일의원연맹 합동총회를 위해 방한한 누카가 후쿠시로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을 비롯한 일본 대표단과 강창일 한국 측 회장(왼쪽에서 첫 번째)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많이 했다. 실제는…. 허허, 나 또 욕먹을라. (잠시 뜸들이다) 서로 문제가 있다.”
그는 고민에 잠긴 듯 담배를 태워 물었다. 이면지를 찾더니 펜을 들고 양쪽에 동그라미를 각각 그렸다.
“이쪽에는 문재인 대통령, 또 다른 한쪽에는 아베 총리가 있단 말이야. 문 대통령은 반일파가 아니다.”
- 문 대통령을 두고 반일파(反日派)라는 공격이 많았는데.
“반일파가 아니라 원칙주의자다. 법을 공부해서 그런지 피해자 인권 중심의 사고를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좋게 만들고 싶어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다. 아베는 거꾸로다. 반한(反韓) 분위기를 타서 권력을 강화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문 대통령이 시켜서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3권 분립이 돼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법체계는 다르다. 외국과의 조약은 정부 의견을 듣게끔 돼 있다.”
강 전 의원은 “독도 갖고 시끄럽게 싸우다가도 불똥이 경제나 안보로 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역사 문제가 경제보복과 안보 이슈로까지 확대됐다. 최악의 경우”라고 했다.
- 일종의 악순환이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1년 해보니 도리어 일본 기업이 더 손해를 봤다. 관광객도 안 오고 지방 경제가 침체해 실물경제가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법적으로 풀 수는 없으니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왜 그런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풀려고 하면 다른 국내외 이슈가 터져버리니.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풀어보려고 할 때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주장한 3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경제보복 풀라. 둘째,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도 풀자. 셋째 근원적인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는 협상 테이블에 앉고 대화하자.”
- 문 대통령한테 직접 말했나.
“내가 여기저기 인터뷰에도 나가니까 (알았겠지). 청와대와 내가 (한일관계를 풀기 위한 방법을) 준비했다. 지금도 유효하다. 국회의원 안 하니 오히려 홀가분하다. 한번은 미국대사관에서 나를 찾아왔길래 ‘지소미아는 미국 때문에 체결했으니 당신들이 한일관계를 중재하라’고 말하면서 3가지 원칙을 전해줬다.”
- 미국에서는 뭐라던가.
“‘알았다’면서 보고하겠다고 하더라. 트럼프 대통령한테 꼭 얘기하라고 일렀지.”
-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관계에 관심이 아예 없는 것 같던데.
“관심 없더라. 나중에 미국대사관에서 (한일관계 중재를 위해) 행동하는 체는 했지.”
- 조 바이든이 새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한미일 3각체제 복원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바이든은 한일관계에서 조금 가운데 서겠지. 트럼프는 한일관계에서 완전히 일본 편만 들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한일관계 악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결코 도움 되지 않는다.”
日서 2000명 오기로 했는데 코로나 터져
일본 정계의 거물들에게로 눈을 돌려볼 시점이다. 강 전 의원은 “자민당에서는 니카이 도시히로(간사장, 니카이파 영수), 가와무라 다케오(전 관방장관,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간사장), 누카가 후쿠시로(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 누카가파 영수)가 친한파”라면서 “한일관계는 이들에 의해 결정돼야 하는데, 총리 관저의 몇 사람이 마음대로 다뤘다”고 일갈했다.이 대목에서 니카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가는 선거전에 등판하자마자 순식간에 대세를 휘어잡았다. 그가 자민당 내 주요 파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니카이는 ‘스가 대세론’의 설계자로 꼽힌다. 그는 “정책을 연속성 있게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스가 지지를 주창하며 주요 파벌을 규합했다. 그는 2016년 8월 자민당 간사장 자리에 올라 여태 직을 지켰다. 역대 최장수 간사장이다. 간사장은 자금과 공천권을 쥔 막강한 자리다. 그런 그가 스가 정권 탄생에 지분을 확보하면서 직을 더 오래 쥐고 있을 전망이다.
- 니카이 간사장과 가깝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주 친하다.”
그는 한일의원연맹 회장 신분으로 동료 의원들과 올 초 도쿄에 다녀왔다. 1월 10일 열린 재일본대한민국민단(한국민단) 신년하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한일관계를 풀어보려고 1월 5일에 미리 출국했다. 누카가를 만나 얼큰하게 술 한잔했다. 내가 ‘아베의 혼네(本音·속마음)가 뭐냐. 한일관계 풀고 싶은 거냐. 나는 못 믿겠다’라고 말했더니 누카가가 ‘당에서 수출규제 조치에 이익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당은 풀려고 한다는 거지. ‘진짜냐’ 되물었더니 아베도 만났다는 거야. 뒷날에는 호텔에서 가와무라를 7시에 만나기로 했다. 6시경 가와무라가 전화해서 호텔 밑으로 내려오래. 니카이가 날 보고 싶어 한다는 거야. 니카이가 최근 2년 동안 한 번도 한국 사람 안 만났다.”
시곗바늘을 지난해 8월 1일로 돌려보자. 이날 오전 11시 강 전 의원이 이끈 국회 방일 의원단과 니카이 측이 도쿄 자민당 당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본 측은 전날 밤 방일단에 “급한 회의가 잡혔다”는 이유로 면담 취소를 통보했다. 애초 방일단과 니카이 측은 전날 오후에 만나기로 했었다. 그때도 일본 측이 회의를 이유로 면담을 하루 연기하자고 요청한 바 있다. 당시 강 전 의원은 “우리가 거지냐. 구걸외교 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면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강 전 의원의 말을 들어볼 때다.
“이번엔 니카이를 만났더니 올해 5월이나 8월 오봉(일본의 전통 명절) 때 2000명쯤 데리고 한국에 오겠다고 하더라. 니카이가 전국관광협회 회장이기도 하거든. 잘됐다 싶어 귀국 후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했지. 경색 국면이 풀리나 싶어 일본 가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 달 후 코로나가 터져버렸다. 그 뒤 다 손 놔버렸다. 서로 신경 쓸 여유가 없어져버린 거지.”
日 언론, 이낙연에 매우 우호적
- 니카이가 스가를 총리로 만드는 데 역할을 했으니, 한일관계에는 긍정적 요소 아닌가.“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바뀌는 모습도 있을 것이다. 누카가나 니카이가 아베에게는 함부로 말을 못 했다. 스가에게는 그래도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다. 11월 한중일 정상회담 때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문 대통령과 일본의 새 총리가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스가는 상대적으로 성격이 유연하고 실용적이다.”
- 지일파(知日派)인 이낙연 의원이 여당 대표가 됐다. 한일관계에 긍정적 요소일까.
“며칠 전 누카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가 대세론’이 형성된 후다. 내가 ‘풀어보자’ 하니 본인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낙연 의원이 당 대표가 돼 분위기는 좋아진 것 같으니 풀어보자’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일본을 샅샅이 알고 인맥도 많다. 한일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한일관계가 지금보다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 이 대표가 청와대에 강력하게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했으면 좋겠다.”
- 일본 정치권에서는 이낙연 의원의 당 대표 선출을 어떻게 보나.
“굉장히 좋아한다. 총리 때도 일본 언론이 이 대표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3선의 이개호 민주당 의원은 8월 28일 페이스북에 “친일파와 토착왜구들은 아베 총리가 물러나면 그 상실감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아베 총리의 건강이 많이 나쁘다고 한다. (중략) 그동안 어지간하게 대한민국 국민들과 정부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쾌차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적었다.
- 일본은 8년여 만의 권력교체인 만큼 민감한 시기다. 여권 인사들도 발언을 조심해야 할 때다. 이개호 의원의 발언은 논란이 될 법한데.
“나는 ‘토착왜구’다 뭐다 그런 얘기 안 한다. 이 의원이 한일관계 정상화를 바라는 책임 있는 여당 정치인이라면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한일관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의 발언이 한일관계에 영향 미칠 일은 없다.”
反韓과 反日 모두 하책
맹목(盲目)과 편가르기가 독버섯처럼 사회에 틈입했다. 무례와 악다구니가 소신과 개혁으로 둔갑한 채 바이러스처럼 확산했다. 상대편을 적으로 규정한 채 이득을 취하려는 모리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강 전 의원은 “일본 내에서 반한 분위기를 타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수준 낮은 짓이다. 한국에도 반일 분위기를 이용해 정치하려는 사람이 많다. 역시 하책”이라고 했다. 특정 계파에 속한 적 없는 여권 중진의 고언이 현해탄에서 메아리처럼 퍼져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