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의 일본, 아베 때와 달라질 게 없다
일제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에 한일 양국민 정반대 인식
일본 국민 마음 돌리지 않으면 한일 협상 진전되기 어렵다
첫째, 양보와 타협 필요…한일이 100% 만족할 방안은 없다
둘째, 리더의 결단이 없으면 해결 불가능·국장급 회담은 싸구려 연극
셋째, 대국민 설득해야… 진보 정권 나서면 반발, 후유증 덜할 것
넷째, 한일이 동시행동에 나서야 한다. 先조율 後 동시이행 방식
한일 양국의 공감대 찾는 ‘희망의 살라미’ 전술
‘불가능한 최선’과 ‘가능한 차선’ 사이의 선택
아베 신조 뒤를 이어 일본 총리를 맡을 것이 유력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 9월 16일 일본 임시국회에서 총리 지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도쿄=AP 뉴시스]
우선 16일 총리가 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를 보자. 그의 임기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잔여 임기인 내년 9월까지다. 현 중의원의 4년 임기도 내년 10월까지다. 만약 중의원을 해산하지 않는다면 그의 정권은 1년 과도, 단명 총리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임기만료 전에 중의원을 해산해 신임을 물은 뒤 내년 9월 다시 총재가 돼 3년 더 총리를 하려 할 것이다. 중의원 해산 시기를 예상하기는 어려우나 전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억제와 경제부양이다. 그런 스가에게 한국과의 관계 개선은 우선 순위가 아니고, 관계 개선에 나설 명분도 없다.
스가 “일한청구권 협정이 일한관계의 기본”
스가 총리는 역사수정주의자로서 이념 지향적이던 아베에 비해 현실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 ‘금수저’인 아베와 정반대로 ‘흙수저’ 출신이어서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말도 한다(그러나 1960년대에 집안이 부농이고, 누나 둘이 대학을 졸업했으며, 본인은 고교를 졸업했는데 무슨 흙수저냐는 반박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베의 낙점’으로 총리가 됐고, 2012년 12월 이후 7년 8개월간 관방장관으로서 아베와 호흡을 맞추면서 굵직한 내정은 거의 본인이 담당했다. 총재 선거 과정에서 “아베 계승”까지 표명했으니 아베 전 총리와 다른 노선을 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베가 수렴청정할 것으로 보고 ‘아베 없는 아베 정권’이니, ‘아베 정권 시즌 3’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베가 러시아 푸틴처럼 1년 뒤 컴백할 것이라는 농담까지 나온다. 아베가 상황(上皇) 노릇을 하면 스가의 입지는 더 좁아질 것이다.외정은 어떤가. 그는 외교에 대해 특정 의견이나 정책을 밝힌 적이 없다. 다만 총재 선거에 출마하며 “아베 정책을 확실히 계승하겠다”고 했다. 내정은 아베노믹스가 있고 헌법 개정도 있다. 외교 면에서는 아베의 미일동맹 중시, 적극적 외교, 대국다운 외교, 지구의(地球儀)를 부감하는 광역 외교 등을 승계하겠지만 적극적으로 새로운 구상을 펼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어떤가. 산케이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일한청구권 협정이 일한관계의 기본이므로 그것에 구속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는 강제징용자 관련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국의) 국제법 위반에 철저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아베가 해온 말과 같고, 정부 대변인으로서 본인이 해온 말과도 같다.
스가 총리는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는 것조차 부정적으로 여기던 아베를 설득했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검증하는 태스크포스를 만들었을 때도 “비판을 강하게 하겠지만 파기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 외무성 보고를 믿었다가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보고 한국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다는 말이 있다. 2013년 12월 남수단에 주둔중인 한빛부대 요청을 받고 ‘선의로’ 실탄을 빌려줬는데, 오히려 ‘무기수출 3원칙’을 무력화하려는 꼼수라는 비난을 받고 상당히 실망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치공학적 분석은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본질은 따로 있다. 일본 국민이 변했다는 것이다. 한국일보와 요미우리신문이 5월 실시한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한국인 응답자의 80.6%는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인 응답자의 79%는 ‘납득할 수 있다’고 했다. 두 나라 국민 10명 중 8명 정도가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에 대해 정반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도 국민이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 국민 정서는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이 정서가 일본 정치 및 정치인을 속박한다. 즉 일본이 한국처럼 바뀐 것이다. 그 연원을 따지면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관련 발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위안부 합의 사실상 파기, 일본 해상자위대 욱일기 게양 갈등,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기업 배상 판결, 일본 해상대 초계기와 해군 함정 조사(照射) 충돌 등으로 한일관계는 줄곧 곤두박질쳤다. 그 결과가 지난해 7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와 같은 해 8월 한국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선언이다(지소미아 종료 선언은 11월 유예됐다).이 과정에서 일어난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 정부의 대한(對韓) 강경책을 일본 국민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가의 한국관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일본 국민 정서가 바뀌지 않는 한 총리는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는 이런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있고, 한국 국민은 이런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필자는 이런 상황을 “일본에도 국민이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언젠가는 굽히고 들어올 줄 알았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일본도 국민이 나서면서,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은 어떤가.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 간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지난 광복절 축사에서 “정부는 사법부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 방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 왔고, 지금도 협의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연설은 대화에 무게를 둔 게 아니다. 한국 정부 입장이 바뀌지 않았음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냉담했고,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꿈쩍 않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를 잘 극복해 오히려 일본에 ‘본때’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K방역 성공으로 자부심도 커져 일본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리더의 결단과 한일 동시행동
6월 26일 일본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행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 시민들. 시민단체 ‘금요행동’ 회원인 이들은 매주 금요일 일본 외무성과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강제징용 배상 및 사과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김범석 동아일보 기자]
스가 총리 취임을 협상의 모멘텀으로 살릴 수는 있다. 그런 기회가 오더라도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양보와 타협이 필요하다. 어떤 해결책이든 한국이나 일본이 100% 만족할 방안은 없다. 양보와 타협을 전제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둘째, 리더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의 결단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다. 양국 외교부와 산업부의 국장급 회담은 관객 없는 싸구려 연극이다. 양국 모두 명분만 쌓고 있을 뿐이다.
셋째, 대국민 설득이 필요하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다는 걸 설득해야 한다.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필자는 역사 문제는 과거사에 원론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진보 정권이 해결을 시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반발도 덜하고, 후유증도 줄일 수 있으며, 국민 설득도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넷째, 한일이 동시행동에 나서야 한다. 지금은 상대방에게 먼저 안을 내라고 한다. 하지만 한쪽이 먼저 무릎 꿇고 안을 제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순차 행동이 아니라 고위 접촉을 통해 조율하고 동시행동을 하는 쪽으로 협상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런 방안들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결정적인 허점이 있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해결을 원할 때 작동한다는 점이다. 쌍방, 또는 일방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희망의 살라미’ 전술
현재 한국 분위기라면 압류한 일본제철 자산 현금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사법 바퀴를 막을 명분도, 방법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양국이 너무 멀리 와버린 바람에 어설픈 타협도 하기 어렵다. 현금화 고비는 금년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금화 이후 대책을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듯하다.11월경에 한중일 정상회담을 열고자 조율 중인데, 이 회담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한국인 전문가가 많다. 만약 그즈음 현금화 문제가 부각된다면 스가 총리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현금화를 하게 되고 일본이 보복 조치를 취한다면 정부는 대국민담화나 성명을 통해 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 국제사회에서 어떤 논리를 전개할 것인지 등을 국민에게 소상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현금화를 하면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로 맞서던 지난해 7, 8월경보다 훨씬 험악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어두운 터널의 끝은 알 수 없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은 물 건너가고 영구 미제로 남을 것이다. ‘시한폭탄’은 터지기 전이 무섭지, 터져버리면 ‘폭탄’이 아니기 때문이다.
터널로부터의 탈출은 서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한국과 일본은 지금까지 ‘서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해 왔다. △아시아에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와 인권을 공유한 유이(唯二)한 나라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한일이 손잡아야 한다 △한국은 저출산고령화 등을 먼저 경험한 일본에서 배울 게 많다 △한미일 동맹의 약한 고리인 한일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선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는 등등의 ‘이유’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갈등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다. 과거사가 국익 위에 있었다. 지금은 의료 선진국인 두 나라가 코로나19 방역 모델을 개발해 세계로 전파하면 좋겠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진전이 없다. 양국 모두 그럴 마음이 없다. 필자는 이렇게 ‘공통의 그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을 ‘희망의 살라미’라고 표현한다. ‘살라미 전술’은 소시지를 조금씩 나누어 썰어 먹듯 쟁점 이슈를 세분화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협상 방법을 뜻한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썼던 ‘살라미 전술’을 한국과 일본은 해결이 아니라 입구를 발견하기 위한 ‘희망 찾기’에 쓰고 있다.
‘불가능한 최선’과 ‘가능한 차선’
9월 8일 일본 도쿄 자민당사에서 열린 총재 선거 소견 발표장에서 일어나 인사하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가운데). 그는 이 자리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도쿄=AP 뉴시스]
왜 종이띠를 한번 뒤트는가. 일본의 그런 행위를 우리는 ‘역사수정주의’라 하고, 한국의 그런 행위는 ‘역사우월주의’에서 나온다. 한일관계가 바닥을 치고 올라갈 것으로 예상한 적도 여러 번 있으나 바닥 밑에 늘 지하실이 있었다.
이제 한일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재정립해야 한다.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화와 국력 상승, ‘잃어버린 20년’과 일본의 국력 저하, 시민단체에 의한 역사 쟁점화, 중국의 급부상과 미국의 영향력 저하로 인한 지정학적 파워 시프트 등으로 한일관계는 과거로 돌아가거나 회복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한일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게 두 가지 진지한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첫째 “어떤 수준을 해결로 볼 것인가.” 일본과 합의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합의 수준에 합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과 합의해도 다시 요구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둘째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만약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해결하지 않은 것으로 해결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수세적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3월 했던 것처럼, 일본에 계속 진상 규명을 요구하되 금전적 조치는 한국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오히려 당당하다. 필자는 이를 ‘제2의 투 트랙’ ‘신(新) 투 트랙’으로 부른다. 한국과 일본이 의무를 나누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이 방식을 쓸 시기를 이미 지나버렸다. 만약 지금 그런 방식을 쓰면 일본에 졌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권은 이 부분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하다.
국민도 한일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원하면 조금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찬성과 반대는 국민의 권리이자 자유다. 만약 모든 것을 얻지 못할 경우 합의를 하지 말라는 것이 국민 뜻이라면 정부는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그럴 경우 우리가 입을 손해나 불편 등도 감수하겠다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상의 제안을 종합하면 ‘불가능한 최선’과 ‘가능한 차선’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엇이든 하나만 선택하면 해결의 실마리나 협상 여지가 생긴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도 ‘가능한 최선’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국가도, 국민도, 운동단체도, 언론도 이제는 ‘가능한 최선’에 대한 믿음을 재고할 때가 됐다(같은 방법을 쓰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엄정한 현실에 바탕을 둔 전향적인 논의가 일본에서도 이뤄지길 기대한다).
심규선
● 전 일본 게이오대 방문연구원
● 전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 정치부장·편집국장 · 대기자
● 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관훈신영기금교수
● 현 한일포럼 운영위원·세토(서울-도쿄)포럼 이사
● 저서: ‘일본을 쓰다’ ‘조선통신사, 한국 속 오늘’ ‘한일관계 막후 60년 최서면에게 듣다’(번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