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케미파’ 순이익 18% 감소, 대한(對韓) 수출 규제 탓”
코로나19로 日언론 태도 급변 “한국은 잘하는데 일본 뭐 하나”
韓기업 ‘소부장’ 개발 노력에 日재계 불안감
“기업의 안정적 조달 능력, 정부가 망쳐”
‘한일 연합군’으로 제3국 공동 진출해야
8월 2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히고 있다. [AP=뉴시스]
일본 기업가들에게 아베노믹스에 대한 견해와 일본 경제에 대한 전망을 주로 물었다. 한 기업인은 일본 경제가 많이 회복된 듯하나, 지방에는 아직 어려운 기업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한일관계 악화가 기업에 악재라며 우려했다.
“아베 총리에 동의 안 해, 민간 차원 교류해야”
그는 “아베 총리의 대한(對韓)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간 차원의 교류를 이어가야 한다”며 액자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액자 안에는 오래된 건물의 현판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 현판은 조선통신사가 쓴 것이다. 조선과 일본은 물론, 사해(四海)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옛 조선통신사의 자취를 통해 한일 우호를 다지려는 마음에 크게 감격했다.액자를 직접 가져온 일본 기업인의 성의가 무색하게도 지금껏 한일관계는 냉랭하다. 양국 관계가 이토록 악화된 근본 원인은 식민 지배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아베 신조 정부에 있다. 다만 모든 책임을 일본에만 미룰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측에도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
지난해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에 대한 3개 소재(플루오린 폴리이미드·리지스트·에칭가스) 수출 심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한국 경제의 효자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수 소재다.
발표 직후 일본 기업 ‘스텔라케미파’의 주가가 하락했다. 규제 대상 품목 중 하나인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업체였다. 도쿄 증권가에는 삼성, LG, SK하이닉스 등 한국 업체에 납품하는 일본 기업 명단이 돌았다. 투자가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아베 정부는 자국 기업의 손해를 무릅쓰고 무모한 공격에 나섰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었다. 일부 언론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적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2019년만큼 일본 여론이 한국에 적대적인 때는 없었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은 늘 가해자였고 범죄자였다. 지난 침략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5년 한일 양국이 맺은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파기되자 아베 정부는 한국을 ‘약속을 쉽게 어기는 나라’로 폄하했다. 마치 일본이 피해자인 듯 국내외 여론전을 펼쳤다. 그 와중에 2018년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일본이 말하는 ‘징용공’)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해외 언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비해 ‘징용공’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한국이 문제’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는 정치적 트라우마다. 2006년 전후(戰後) 세대 최초로 총리가 된 아베는 일제강점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했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한 1993년 ‘고노 담화’의 철회를 요구했다. 집권 이듬해 7월 아베의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역사적 참패를 기록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이 한몫했다. 아베 총리가 자민당 총무회의에서 사임을 요구받은 7월 31일, 미국 하원은 결의안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아베 총리에게 집권 2기인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영혼을 판’ 일이다. 일본의 국제적 평판을 위해 정치적 굴욕을 감내하겠다는 나름의 결단이 있었던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후 한국 정부가 합의를 실질적으로 파기하자 아베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2019년 일본 내 대한(對韓) 여론 최악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과 함께 피해자 배상에 참여하는 타협안을 제안했다. 한국 정부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한국 정부는 타협안을 일본에 제시했지만 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거부했다. 이미 한국과의 대립 상황을 국내 정치에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데 타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양국의 정치적 판단이 경제 분야에 큰 피해를 끼친 셈이다.최근 상황이 변하고 있다. 우선 아베 총리가 퇴진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일본 언론의 한국 관련 보도에도 변화가 느껴진다.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일 때 일본 언론은 연일 한국의 사례를 보도했다. ‘한국은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는 무엇 하느냐’는 질타였다. 한국에 관한 긍정적 보도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한국 배우 심은경이 영화 ‘신문기자’로 일본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기생충’ ‘킹덤’ ‘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선풍을 일으켰다.
이제껏 일본 언론은 정부의 수출 규제를 비판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최근 수출 규제의 부작용을 조명하는 보도가 점차 늘고 있다. 피해를 본 일본 기업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이다.
5월 20일 일본경제신문은 수출 규제로 인한 일본기업의 피해를 조명했다. LG디스플레이 등 한국 기업에 에칭가스를 조달하던 스텔라케미파의 순이익이 18%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일본경제신문이 인용한 해당 기업의 분기보고서는 순이익 감소의 원인을 한국에 대한 수출 감소라고 명시했다. 일본 제품의 경쟁력은 품질뿐 아니라 안정적 조달 능력이다. 정부의 수출 규제로 제품 조달의 안정성이 훼손됐다.
제 목소리 내기 시작한 日기업들
9월 6일 수출 규제 1년을 맞아 일본경제신문은 일본 제품 의존도를 낮추려는 한국 기업의 노력을 소개했다.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 개발에 대한 일본 소재기업의 불안감을 대변했다.한일관계의 난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여전히 서로에게 매력적인 시장이다. 기업 간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파트너이기도 하다.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과 일본 기업은 필리핀, 요르단,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인구 감소에 따른 국내시장 축소에 직면했다. 제3국으로 진출은 ‘한일 연합군’을 꾸린 양국 기업에 명운을 건 도전이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기업은 만족할 만한 파트너십을 보였다.
말 많고 탈 많던 아베의 시대가 끝났다. 경제지표의 악화로 아베노믹스의 성과는 빛을 잃었다. 아베의 선동으로 극심해졌던 반한(反韓) 감정은 수그러들고 있다. 수출 규제로 피해를 본 일본 기업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냉각된 한일관계를 풀고 한국 기업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기회가 왔다.
일본 주류 정치세력의 과거사 인식에 문제가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국제사회 여론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끌 합리적이고 일관된 대응이 필요하다. 이제껏 한국의 대응은 감정에 치우친 면이 있었다. 아베 정권의 퇴진 속 일본 재계는 한일 파트너십 회복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다. 한국이 일본과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박상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 미국 위스콘신대학 경제학 박사
● 산업연구원 수석 연구원, 일본 국제대학 조교수
● 일본 와세다대학 국제학술원 교수
● 저서: ‘불황터널 -진입하는 한국, 탈출하는 일본’ ‘불황탈출 -일본 경제에서 찾은 저성장의 돌파구’ ‘일본 경제의 장기침체와 한국 경제에의 시사점’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 시장의 변화와 진출전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