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주머니처럼 생긴 땅콩호박. 길게 반으로 쪼개면 쉽게 손질할 수 있다. [GettyImage]
늙은호박은 단단하고 무겁기가 채소 중엔 제일일 것이다. 옮기기 힘들고 쪼개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속이 꽉 찬, 촉촉한 늙은호박 한 덩이를 손질하면 여러 가지 맛좋은 음식으로 탈바꿈하니 엄마는 용을 쓰면서 일 년에 한두 덩이는 꼭 ‘잡아’ 먹곤 했다.
손목이 얼얼, 손은 바들바들
단단하고 무겁지만 풍성한 맛 덕에 가을철 먹을거리로 인기 많은 늙은호박. [GettyImage]
채 썬 호박살은 그 자리에서 부침개가 된다. 엄마는 내가 호박을 잡는 내내 일꾼 새참처럼 호박전을 부쳐 나른다. 구수한 호박을 기름에 지졌으니 다디달고 부드럽다. 뜨거운 것을 입에 가득 넣고 먹으면 입천장이 벗겨지기 일쑤다. 얇고 넓게 부친 호박전이 옆에 놓일 때마다 젓가락질하랴 칼질하랴 손이 바빠진다.
큼직하게 썬 호박으로는 죽을 끓인다. 냄비에 넣고 물을 자박하게 부어 푹 끓이며 국자로 눌러 대강 으깬다. 으깬 호박에 찹쌀가루 넣고 약한 불에서 잘 저어 끓이면 호박죽이 된다. 엄마는 미리 삶아 둔 통팥이나 콩, 여름에 발라둔 옥수수 알맹이 같은 것을 넣어 씹는 맛을 더해주셨다. 큼직하게 썬 호박은 냉동실에 뒀다가 뽀얗게 국을 끓여 먹고, 갈비찜에 넣고, 채반에 얹어 살캉하게 찐 다음 설탕 솔솔 뿌려 겨울 간식으로도 먹곤 했다.
늙은호박을 요리하려면 단단한 몸체를 쪼개고 두툼한 껍질을 칼로 쳐내는 ‘노동’ 과정을 거쳐야 한다. [GettyImage]
허리가 잘록한 땅콩호박의 매력
엄마랑 오순도순 갖은 수다를 떨며 호박을 잡던 날 먹던 구수한 부침개와 달콤한 죽이 때로는 그립다. 그러나 한 끼 밥 차리는 일도 버거운 내게 늙은호박은 그림의 떡보다 멀다. 늙은호박을 갈무리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호박 한 덩이를 엄마와 둘이 손질하다 보면 손목이 얼얼하고 손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이 든다. 이러니 나이든 엄마가 늙은호박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단호박이 늙은호박 자리를 메울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둘은 좀 다르다. 단호박의 단맛은 진하고 좋지만 과육이 단단하고 수분이 훨씬 적다. 단호박을 밤호박으로 부르는 것도 그래서인 듯하다.
단호박이 뭔가 아쉬운 사람에게는 땅콩호박을 추천한다. 땅콩처럼 허리가 잘록하게 생긴 호박인데 속살이 촉촉하고 부드럽다. 단맛이 늙은호박보다 조금 덜하지만, 익으면 나아진다. 그걸로 충분하다.
물주머니처럼 생긴 땅콩호박을 길게 반으로 쪼개 손질한다. 늙은호박과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러워 칼질이 쉽다. 요리도 수월하다. 씨를 파내고 오렌지색 과육에 소금을 솔솔 뿌리고 올리브오일을 바른다. 버터를 작게 잘라 호박 위에 군데군데 올리고 180℃ 오븐이나 토스터기에 넣어 30분 이상 굽는다. 말랑하게 익으면 숟가락이나 포크로 똑똑 잘라 먹는다. 버터 향이 물씬 밴 촉촉하고 부드러운 호박살에서 달콤함, 짭짤함, 고소함이 배어난다. 손질할 때는 호박이 아담해 좋다고 생각하지만, 먹을 때는 좀 더 크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곤 한다.
가을 호박의 풍성하고 달콤한 맛
땅콩호박으로 전을 부치면 부드러운 단맛에 쫄깃하면서도 바삭한 식감이 더해져 여러 면에서 즐겁다. [GettyImage]
늙은호박처럼 가늘게 채를 썰어 전을 부쳐도 맛있다. 호박전 부치듯 밀가루를 아주 조금만 넣고, 슈레드 모차렐라나 덩어리 치즈를 잘게 썰어 섞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반죽을 팬케이크처럼 작게 넣고 튀기듯 앞뒤로 구워낸다. 부드러운 단맛에 고소한 치즈 향이 어우러지고, 쫄깃하면서도 바삭한 식감이 더해져 여러 면에서 즐겁다. 이맘때면 엄마도 나만큼 늙은호박의 풍성하고 달콤한 맛이 그리울 게 틀림없으니 귀여운 땅콩호박 두어 개 구해서 가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