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2시간 ‘순환 정전’ 돌입
‘2045년부터 재생에너지만 사용’ 법제화
필요 전력량 30%는 다른 주에서 사다 써
‘수입’ 전력은 화석에너지도 무방
“폭염으로 정전 우려되니 전기 소비 줄여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 인근에 설치된 풍력발전기.
취지에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지만 문제는 현실이다. 우선 재생에너지로 생산할 수 있는 전력량이 많지 않다. 발전 설비를 급격히 줄이다 보니 정전 사태까지 벌어지는 지경이다. 캘리포니아 친환경 에너지 정책의 그늘을 살펴봤다.
‘직장 겸 학교’가 된 집, 전기는 필수
올해 8월 말, 동네 이웃이자 종종 수다를 떠는 친구 데이브가 가정용 발전기를 샀다고 말했다. 데이브는 상당수 실리콘밸리 주민처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3월 중순 이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탓에 혹시라도 전기가 끊길까 걱정돼 발전기를 샀단다. 자신의 업무는 물론 세 딸의 학교 수업을 위해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맏이부터 차례로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세 딸이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 혹시라도 전기가 끊기면 수업에 차질이 생긴다.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집은 직장이자 학교가 됐다.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해졌다.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카페도 ‘테이크아웃’ 손님만 받거나 매장 밖 테이블 몇 석을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다. 차분히 앉아 컴퓨터로 일할 곳을 찾기 힘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실리콘밸리를 포함해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 나아가 캘리포니아 일대에 정전 사태까지 벌어졌다. 가정용 발전기를 구입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8월 14~20일 샌프란시스코베이 일대에서는 지역별로 하루 1~2시간씩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예상치 못한 폭염이 이어지면서 전력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전력회사는 주민들에게 사전 공지 후 계획 정전에 돌입했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운 좋게 정전 사태를 피했지만 캘리포니아의 많은 도시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2000~2001년 ‘캘리포니아 에너지위기’ 이후 처음 겪는 ‘생난리’였다.
‘재생에너지’와 ‘녹색에너지’의 비중을 정책적으로 급속히 늘린 탓이다. 반면 석탄이나 천연가스를 통한 전력 생산은 크게 줄었다. 모두 폐쇄되고 딱 한 곳 남은 캘리포니아 내 원자력발전소도 2025년 폐쇄가 결정됐다. 주민들 사이에서 재생에너지만으로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데 다른 에너지 설비를 너무 급히 없앤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원유 가격 상승 충격, 재생에너지 ‘드라이브’
캘리포니아가 재생에너지를 중시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2000년 원유 가격 상승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캘리포니아였다. 그래서 2001년 이후 석유는 물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정책을 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친환경을 내세워 재생에너지 사용을 높였다.8월 23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2014~2018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천연가스 전력 소비를 21% 줄이고 재생에너지 소비는 54% 늘렸다. 2045년부터 재생에너지만 쓴다는 목표를 정해 법제화했다. 문제는 재생에너지로만 당장 전력 수요를 뒷받침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 모자라는 전력을 어디서든 구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정전 사태를 빚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상황을 조롱하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green’(녹색, 친환경)과 ‘blackout’(정전)을 합친 ‘greenout’(녹색정전)이다.
이번 ‘순환 정전’의 원인은 예상치 못한 폭염이었다. 캘리포니아는 부족한 전력을 다른 주에서 구입해 해결한다. 캘리포니아 인근의 애리조나, 네바다 등 지역은 자체 생산한 전력이 남는다. 최근 이 지역도 폭염에 따라 주민의 전력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캘리포니아에 전력을 팔 여유가 없어졌다.
미국 연방정부의 댄 브루엣 에너지부 장관은 8월 31일 폭스비즈니스(Fox Business) 인터뷰에서 캘리포니아 정전 사태를 이렇게 빗댔다.
“환경을 중시해 차를 사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친구 차를 빌려 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친구한테 차를 빌려 타려고 했더니, 그 친구도 차를 써야 해서 빌리지 못했다. 지금 캘리포니아가 그런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브루엣 장관이 민주당 소속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다만 캘리포니아가 해마다 다른 주에서 전력을 구입해 쓰는 것은 사실이다.
테슬라 성장 숨은 주역 캘리포니아 주정부
8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새너제이의 한 주택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발전기 패널(위). 8월 30일 실리콘밸리 새너제이의 한 건축자재 매장에 진열된 가정용 발전기.
이에 따르면 2018년 12월 말 기준 캘리포니아는 한 해 동안 필요한 전력의 68%만 자체 생산했다. 이 중 47%는 천연가스발전소에서 생산한 것이다. 재생에너지 전력은 자체 생산량의 32%였다. 태양광발전 전력량은 최근 연간 20% 정도 늘었지만 여전히 천연가스발전 전력량에 비해 4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풍력발전 전력량은 답보 상태다. 다른 주에서 수입한 전력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은 29%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석탄화력·천연가스·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다른 주에서 전력을 구입할 경우, 전원(電源)이 화석에너지라도 상관없다.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전기자동차 업체 테슬라가 얼마 전 월마트의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 개인의 능력과 비전이 주효했지만 환경을 중시하는 주정부의 지원도 큰 몫 했다.
캘리포니아는 주정부 차원에서 전기차 구입 시 수천 달러의 지원금을 지급했다. 전기차 운전자는 혼자서도 카풀차선(CarpoolLane·다인승전용차선)을 이용할 수 있었다. 테슬라의 대표 이미지는 환경을 보호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 타는 고급 자동차다. 실리콘밸리의 도로에서 테슬라 자동차가 갈수록 늘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지급은 에너지 정책의 일부다. 전기차가 환경오염 물질을 배출하지 않아 캘리포니아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주정부가 지향하는 캘리포니아의 풍경은 무엇일까. 친환경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충전한 전기차가 도로를 질주하는 세상일 터다. 바람직한 이상향이다. 다만 지금 캘리포니아 전력 수급 상황을 보면 그런 세상이 빨리 다가오기는 쉽지 않다.
정전 사태 얼마나 더 벌어져야…
일조량이 많은 캘리포니아도 1년 중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바람도 때로는 더 불거나 덜 분다. 언젠가 햇빛과 바람이 석유나 천연가스보다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자리매김할지 모른다. 배터리 기술의 획기적 발전과 함께 말이다. 의문은 그때까지 캘리포니아에 얼마나 더 많은 정전 사태가 벌어질지 여부다.9월 4일 금요일 오후, 9월 첫째 주 월요일 노동절 연휴를 앞두고 익숙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이번 연휴 무더위로 정전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각 가정은 전력 소비를 줄여달라는 전력회사의 메시지였다. 캘리포니아 전력난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까.